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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신학자가 한 말입니다. 신학이란 8개의 창을 6개의 창문으로 막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막아도 나머지 두 개의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막을 수 없습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잘 이해하고 설명해도 그것으로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점은 성경을 이해하는 면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말씀을 읽다가 어느 순간 엄청난 것을 깨달아서 무릎을 치면서 감탄하는 진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순간 모든 문제를 관통하는 진리를 깨달은 기쁨이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것으로도 다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다시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진리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히브리서는 4장 14절 이하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중보자가 되어 주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엄청 은혜로운 사건입니다. 그냥 인간을 하나님께로 데려가신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친히 우리를 대신하여 제물이 되어 주셔서 그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고, 우리를 구원하신 제사장이 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의 사건입니까?

히브리서는 히브리 성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그들에게 제사장이 너무 익숙한 존재입니다. 그들은 제사장이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지, 어떤 사람이 제사장이 될 수 있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제사장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사장은 몸이 흠이 있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다리를 절거나 맹인이나 코가 불완전한 자나, 혹은 발이나 손이 부러진 자, 등이 굽은 자는 제사장이 될 수 없었습니다(레21:16-23). 그런데 그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한 조건은 그가 레위 지파여야 했고, 그 중에서도 아론의 자손이어야 했습니다. 아무리 정결하고 온전한 사람이라도 아론의 자손이 아니면 제사장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제사장은 히브리인들에게는 매우 거룩한 사람들이었고, 특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제사장이라는 점에 있어서 그들은 조금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더욱이 자신이 친히 제물이 되셨다는 점은 그들에게 너무도 감격스럽고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아무리 제사장으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위해 제물이 되어 주셨다고 하지만, 어차피 예수님도 그들 조상들 가운데 많고 많았던 제사장들 중 한 사람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도 그들이 경험한 많은 제사장들 중 한 사람에 불과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물론 제사장은 존경 받을만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도 존귀한 일이고, 또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선택 받아 한다는 점에서 존경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역시 인간이었습니다. 그들도 그들 자신을 위해 먼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했던 존재들입니다.

이것이 어느 순간에 결정적으로 그들의 신앙에 문제를 가져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에게 고난과 박해가 일어날 때였습니다. 히브리 성도들은 고난을 당할 때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만 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제사장이십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예수님 말고도 역사 속에 수많은 훌륭한 제사장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사장으로 오셨다면 그들도 제사장이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들은 고난 중에 예수님을 끝까지 붙들고 나갈 이유를 찾지 못한 것입니다.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가 복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믿는다면, 그리고 그 복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건강, 재물, 승진, 학위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예수를 믿지 않고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일이 잘 될 때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고난을 당하고, 원하는 일들이 성취되지 않을 때도 과연 믿음을 계속 가지고 나갈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들도 이런 마음으로 예수를 믿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경험과 지식의 한계 안에 가두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으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결국 어려움에 빠질 때 우리의 믿음은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주신 말씀입니다. 본문은 아론의 자손으로서의 제사장 말고 또 다른 제사장을 소개합니다. 그는 멜기세덱이라는 제사장입니다. 멜기세덱에 대해서는 성경에 히브리서 말고 구약에 딱 두 번 나옵니다. 한 번은 창세기 14장 17-20절이고, 다른 또 하나는 시편 110편 4절입니다.

창세기 14장의 내용입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살고 있던 소돔과 고모라 성이 주변 연합국에 의해 침략을 당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소돔과 고모라 성 주민들이 잡혀갔습니다. 물론 롯과 그의 가족들도 잡혀갔습니다. 이 사실을 들은 아브라함이 자기 집에서 길리고 훈련시킨 군인 318명을 데리고 밤에 기습을 해서 그들을 공격하고 조카 롯과 소돔, 고모라 성 주민들을 구출했습니다. 물론 전쟁의 노획물도 많이 가져왔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에 가까이 와서 그들의 환영을 받는데, 그 자리에 멜기세덱이 나타났습니다. 성경은 멜기세덱이 누군지,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 전혀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는 살렘 왕이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소개합니다. 히브리서는 멜기세덱의 이름의 뜻을 의의 왕이라고 설명하고, 살렘 왕은 평강의 왕이라는 뜻이라고 주석합니다. 그가 아브라함을 맞으면서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떡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성만찬을 연상하게 합니다.

히브리서에게 말씀하려고 하는 중요한 초점은 아브라함은 제사장인 멜기세덱에게 전리품에서 십일조를 드렸고,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과연 멜기세덱은 어떤 사람입니까? 멜기세덱이 누군데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었다는 말입니까?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조입니다. 그들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모두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아브라함의 씨에서 나왔고,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누구도 그를 앞서지 못하고, 누구도 그보다 더 우월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제사장들도 아브라함보다 앞서지 못합니다. 성경의 표현대로 제사장들도 모두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것입니다. 그리고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어주었습니다. 본문 7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두 말 할 것도 없이 복은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빌어 주는 것이다” 아브라함보다 더 높은 자가 멜기세덱임을 분명히 합니다. 그런데 시편 110:4에 보면,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너’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시편 110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예언한 시입니다. 이 시편은 창세기 14장의 멜기세덱과 예수님을 연결시켜 주는 말씀입니다.

이 두 구절은 멜기세덱에 대해 말씀하는 유일한 구절이지만, 예수님의 독특성과 우월성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즉 예수님은 제사장으로 중보 사역과 구원 사역을 행하셨지만, 그분은 레위 지파 대제사장 아론의 뒤를 이은 제사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설명이 필요한 이유는 당시 히브리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사고의 한계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제사장이라고 하면 금방 아론과 그의 후손들로서의 제사장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제사장의 사역에 견주어서 이해하는 것은 분명 도움이 되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예수님에 대한 이해의 한계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 제사장에 대한 한계에 갇혀 있으면 결국 고난이 오고 어려움이 닥칠 때 유대교로 돌아가자 굳이 예수를 믿어야 할 필요가 있겠느냐 하는 분위기가 생기게 됩니다. 이런 점은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에 매우 위험한 상황을 가져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더 깊이 알아가야 합니다.


오늘날 번영신학이라는 말이 미국교회와 한국교회에 횡횡하고 있습니다. 번영신학이란 한 마리로 말하면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복음의 핵심인 것처럼 전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를 믿으면 우리의 삶이 복을 받습니다. 삶의 무거운 짐을 벗어놓고 삶의 근심과 염려를 주님께 맡기면 아무래도 삶에 대해 더 긍정적인 태도와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삶에 더 많은 유익을 얻을 것이라는 점은 굳이 증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말씀을 계속 듣다보면 도대체 하나님이란 분은 어떤 분이신가 하고 의문을 갖게 되는 순간이 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하인같은 분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언제든지 무엇이 필요하다고 하면 달려가서 그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처럼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인식하지 못하지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신 개념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결국 무너지고 맙니다. 왜냐하면 그것으로는 결국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온전한 복음이 아닙니다. 아니 엄밀한 의미에서 복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는 분이십니다. 그런 것을 예수님의 사역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5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신 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보다 높으신 분이었습니다.


본문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본문은 히브리 성도들에게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그 어떤 한계를 뛰어넘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고난을 받으면서 회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난 중에 도대체 우리가 계속해서 예수를 믿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에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실망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는 누구십니까?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유일하신 분이시고, 탁월하시며 우월하신 분이십니다. 독특하신 분이십니다. 요한복음 14:6에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4;12에서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한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고백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히브리 성도들에게 궁극적으로 필요했던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면 거기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고난 중에서도 우리를 통해 일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고난을 두려워 말라는 것입니다. 다니엘을 보십시오. 다니엘은 사자굴 속에 들어가서 정적을 처리하였습니다. 다니엘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의 정적을 처리하셨습니다. 고난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해 일하시고, 돌보시는 매우 중요한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다윗은 도망자로 10년 이상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 고난을 통해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얻었습니다. 에스더는 자기 민족의 위기로 인해 하만의 음모를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고난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의 방법이었습니다. 고난 중에 승리하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인공을 곱개하는 것입니다. 자꾸 현상만 바라보면 하나님의 일하시는 것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오직 그분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오직 그분만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는 언제든지 예수를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많은 능력과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장래의 길을 예비하시며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우리를 강건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필요만을 채워주시기 위해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주인이 되시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만왕의 왕으로, 만주의 주로 모시기 전에 우리는 온전히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분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생각하는 한계를 항상 넘어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각의 한계 안에 가두지 마십시오. 이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우리의 경험, 지식, 상상의 한계 안에서 움직이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항상 모든 상황을 넘어섭니다. 바로 그 하나님, 바로 그 예수님을 만나시기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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