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샬롯츠빌한인교회

주일설교

조회 수 3468 추천 수 249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히브리서는 매우 깊은 진리에 대해 말씀합니다. 히브리서는 히브리인들을 향해 주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말씀 자체가 구약적 배경을 깊이 깔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 대제사장에 대한 말씀도 히브리인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마땅히 잘 이해해야 할 히브리인들이지만, 그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제 멜기세덱에 대해 말씀을 전하려다고 권면의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그것은 그들이 히브리인으로서 당연히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그들을 향해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함으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들어야 합니까?


1. 멍에를 매고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첫 번째는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우리는 사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잘 기울이지 못합니다. 대개 자기가 원하는 말씀만 들으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11장 28-30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대부분의 성도님들은 28절만을 보고 이 말씀을 참 좋아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의 요지는 ‘주님의 멍에를 메면 쉼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멍에를 메지 않으면 쉼을 얻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고 익히고 순종하는 것은 분명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멍에를 메는 것은 자기 맘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가 멍에를 메는 순간 소는 주인의 인도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것은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멍에가 오히려 쉼을 준디는 표현은 확실히 역설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하신 말씀과 맥락이 비슷합니다. 제사장은 약한 존재입니다. 약하지 않는 존재는 제사장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의 약함을 경험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약함을 위해 중보할 수 있습니다. 동일한 이치입니다. 멍에를 메지 않으면 쉼이 없습니다. 내가 아파봐야 아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죽음의 두려움을 겪어봐야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 중보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인간관계의 고통을 겪어봐야 같은 고난에 있는 사람을 이해합니다.

섬기지 않는 사람은 자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 부담을 갖지 않는 사람이 영적으로 자라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혼에 대한 부담을 없는 사람이 과연 자신에 대해 자라갈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서리집사를 임명했습니다. 서리집사를 임명하는 원칙 중에 하나는 구체적으로 하나 이상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그냥 이름만 걸고 있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서리집사는 멍에입니다. 멍에가 축복이 됩니다. 2011년 한 해 주님의 멍에를 멥시다. 주님을 위해 짐을 지고 살아갑시다. 멍에를 메지 않으면 말씀을 들을 수 없고, 또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2. 말씀을 구체적으로 적용해야 합니다.

신앙의 성숙을 위해서는 말씀이 삶 속에서 적용되어야 합니다. 본문은 초보적 신앙의 예로 여섯 가지를 제시합니다. 1)죽은 행실을 회개하는 것과 2)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3)세례들과 4)안수와 5)죽은 자의 부활과 6)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닦는 것입니다. 이것을 초보적 신앙의 요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적 문제로 인해 여전히 주저앉아 있다면 하나님의 더 깊은 말씀을 이해할 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신앙적인 문제들을 확실히 넘어가야 합니다.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죽은 자의 부활을 믿습니까? 어떻게 믿습니까? 사람이 죽어서 썩은 다음 살아나는 것을 믿습니까? 죽어서 썩어 거름이 되고, 나무가 그 위에서 자라고, 열매를 맺습니다. 사람의 몸이 썩어 어디에서 어리도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죽은 자가 부활하면 그 몸들은 어떻게 회복되는 것입니까? 설명이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그런 점에 대해 답을 줍니다.

그러나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점은 그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 옆에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고 있을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때 주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물으실 것입니다. “얘야! 너는 죽은 자의 부활을 믿니?” 그 때 우리는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예! 주님, 믿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래! 그러면 됐어!” 그것입니다. 이게 되어야 합니다.

“영원한 심판”에 대해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천국은 차별이 없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심판은 무엇입니까? 심판이 있다는 것은 상급이 있다는 말이고, 상급이 있다는 것은 차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에도 차별이 있다는 말입니까? 이 점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천국에서 있을지도 모를 차별에 대해 논쟁하는 것이 본문의 논점이 아닙니다. 그렇게 반응하는 것은 여전히 초보적인 신앙입니다.

문제는 이 땅에 살면서 영원한 심판을 믿고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심판을 믿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습니까? 우리가 영원한 심판을 믿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영원한 심판을 믿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겠습니까? 정말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을 자처럼 지금 여기서 사는가의 문제입니다. 이것이 되지 않은채로 이런 주제들을 논한다면 그것은 초보적인 신앙입니다.

이런 기본적인 신앙의 문제 앞에 언제나 자신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구원의 감격이 내 가슴에 살아있습니까? 부활의 소망이 나를 움직이고 있습니까? 영원한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깨어있음이 내게 있습니까?


3. 받은 은혜를 책임져야 한다.

4-6절입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이 말씀은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은혜를 나열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어려운 표현이기도 하지만, 4-5절 상반절은 은혜를 이미 한 번 이상 경험한 성도를 의미합니다. 그들은 복음을 이해했고, 하늘의 기쁨을 맛보았으며, 성령을 받았고, 내세의 능력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다시 타락하면 회개할 수 없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이런 의미입니다. 히브리인들의 교회에 위기가 생겼습니다. 신앙의 열정이 식어졌습니다. 교회 안팍의 고난 속에서 지쳤습니다. 교회가 냉냉해졌습니다. 앞에서 누군가가 열심을 내어 신앙생활을 하려고 함녀 비웃고 조롱합니다. “누가 왕년에 기도 안 해 본 사람 있나”라고 말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을 원망하고 조금도 영적 회복을 위해 움직이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그들을 향해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미 당신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맛본 자들입니다. 이미 당신들은 말씀의 능력을 맛본 자들입니다. 이미 당신들은 하늘의 기쁨을 경험했습니다. 성령의 은혜를 체험한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낙심해서 주저앉아 있다면 무엇으로 당신들을 다시 일으키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 말고 다른 길이 있겠습니까? 예수님도 당신들을 영적으로 회복하지 못했다면 누가 그 일을 하겠습니가? 그들의 영적 무책임을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3인칭 대명사는 다른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향해 당신들이라고 말함으로서 정면으로 그들을 공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깨닫도록 하기 위한 히브리 기자의 배려일 뿐입니다. 이 말씀을 받는 수신자들은 그 책망의 대상이 바로 자신들이었음을 너무도 잘 알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받은 은혜에 책임적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면 이제는 감사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냥 주저 앉아 누군가가 우리를 일으켜 세워줄 때를 기다려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결단은 성도 각자의 몫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7-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하나님은 하늘에서 동일하게 비를 내려주십니다. 그 비를 땅이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좋도록, 그리고 합당한 채소를 내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는 것은 그의 몫입니다. 만일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햇빛이 비춰도 땅이 채소를 내지 않고 엉겅퀴와 가시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됩니다. 결국 그 몫은 개인이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즉 다시 말해서 개인적인 신앙의 결단이 필요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나의 믿음이 회복되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지금 바로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 앞에 순종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일자 설교 제목 성경
229 구원의 증거(히9:1-22) 2011. 2. 27 주일예배
228 구원에 이르는 지혜 (딤후 3:13-17) 2011. 2. 13 주일예배
227 내가 새 언약을 맺으리라 (히8:6-13) 2011. 2. 6 주일예배
226 하늘의 성소(히8:1-5) 2011. 1. 30 주일예배
225 영원한 제사장 (히7:20-28) 2011. 1. 23 주일예배
224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히7:1-19) 2011. 1. 16 주일예배
223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히6:9-20) 2011. 1. 9 주일예배
» 성숙한 신앙을 위한 권고 (히5:14-6:8) 2011. 1. 2 주일예배
221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신 예수(히5:1-10) 2010. 12. 26 주일예배
220 마리아의 찬가(2) (눅1:46-56) 2010. 12. 19 성탄축하주일
219 마리아의 찬가(1) (눅1:46-56), 2010. 12. 12 대강절 세 번째 주일
218 은혜를 받은 자여(눅1:26-38) 2010. 11. 28 대강절 첫 번째 주일
217 감사의 이유(딤전2:12-17) 2010. 11. 21 추수감사주일
216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 (히4:14-16) 2010. 11. 14 주일예배
215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 (히4:1-13) 2010. 11. 7 주일예배
214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히3:7-19) 2010. 10. 31 주일예배
213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3:1-6) 2010. 10. 24 주일예배
212 우리의 형제 되신 그리스도(히2:10-18) 2010. 10. 10 주일예배
211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 (히2:5-9) 2010. 10. 3 주일예배
210 이같이 큰 구원 (히2:1-4) 2010. 9. 26 주일예배
Board Pagination Prev 1 ...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 41 Next
/ 41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