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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마리아가 “마리아의 찬가(Magnificat)로 불려지는 아주 유명한 내용이빈다. 교회는 이 말씀을 즐겨 묵상했고, 찬양했습니다. 요한 바흐는 이 내용으로 Magnificat라는 이름으로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성공회 신부님이 무신론자인 친구에게 이 구절을 따로 떼어서 주면서, 선입견 없이 읽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친구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거, 공산당 선언이네!”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마리아 찬가는 혁명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 속에서 이 노래는 교회 안에서 부르지 못하도록 금지 당한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영국이 인도를 통치하던 말기에 잭 윈슬로우(Jack Winslow)가 이끌던, 인도 민족주의에 동조한다고 여겨지던 기독교 공동체에 가끔 범죄 수사대 사람들이 방문했었는데, 수사대는 이 공동체에게 ‘마리아의 찬가’를 부르지 못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또한 이 말씀은 지배자들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 익숙한 삶의 기준들을 가지고, 평안을 누리며, 부요하고 안정된 삶을 누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매우 당황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리아 찬가를 영적으로 해석하려고 시도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렇게 살기 때문이다. 그들도 이미 부요한 자들이고, 또 부요한 자가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배 세력에 의해         하루하루를 억압 받고, 고통 받은 제3세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말씀이 그렇게 해석되는 것은 부당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전체적인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찬가는 그렇게 혁명적인 면만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오늘 중점적으로 보려는 46-48절에 마리아의 고백에서 우리는 이 찬양이 어떤 고백 위에 놓여져 있는지를 먼저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먼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합니다”(46-47절) 이 찬양은 요리문답 제 1번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영원히 그를 기뻐하는 것’이라는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성경 속에서 가르치고 있는 참된 인간의 목적을 가장 바르게 깨닫고 고백합니다. 그런 면에서 그의 믿음의 고백이 얼마나 귀했는지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어서 마리아는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를 기뻐하는 이유를 고백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고백은 두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는 그의 여종이 비천하기 때문에 돌보셨다는 의미입니다. 즉 마리아가 비천하지 않았으면 돌보지 않았다는 의미도 됩니다. 마리아의 비천함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이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지만, 죄로 인해 그 형상이 깨어지고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에 빠진, 신음하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인간은 다 그런 존재들입니다.

기도원에서 찬송 191장을 부르면서 마음에 진한 감동을 경험했습니다. 양 아흔아홉 마리가 우리에 있는데,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서는 목자의 모습을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우리에 놔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다니시는 이유는 바로 그 양이 어리고 약하고 비천하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지금 그것을 고백합니다. 비천한 자신을 찾아오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고향은 베들레헴이었습니다. 그는 유다지파 출신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지도자적인 지파였고, 왕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마리아가 요셉을 포함해서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이방땅이나 마찬가지인, 이름도 없는 곳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그들의 삶에는 뭔가 말못할 사연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낙오된 사람들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삶은 참으로 비천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 중에도 하나님을 경건하게 섬기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비천한 자들을 돌보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우리 하나님은 비천한 자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인간이 비천하기 때문에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서 비천하다는 말은 다른 어떤 힘도 가지지 못한 자들을 의미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시면 길이 없는 자들입니다. 힘도 없고, 빽도 없고, 권력도 없고, 인맥도 없는 자들입니다. 교회에서 줄을 서려고 해도 설 줄이 없고, 줄에 끼워주지도 않는 그런 사람들을 말합니다. 마리아는 지금 바로 그런 자들을 향해 베푸시는 돌보심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를 찬양하고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는 것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런 은혜를 누릴 준비가 되었습니까? 참으로 철저히 주님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로 살아갑니까? 사실 본문을 보면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마리아의 고백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결론은 좀 더 고민해 보기로 하고, 그의 고백의 두 번째 의미를 살펴봅시다.



마리아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고 하는 말의 두 번째 의미는 그의 여종이 비천함에도 불구하고 돌보셨다는 의미입니다. 즉 이 말은 하나님의 은혜는 마리아의 비천함을 넘어설만큼 위대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을 존귀케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합니다. 이것이 마리아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 그를 기뻐하는 이유입니다. 그는 천사 가브리엘의 계시를 받고 자신의 비천함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혜, 자신의 삶을 가치있게 만드시는 은혜, 비록 이 일로 인해 내 처녀성이 무너지고, 내 결혼과 장래가 무너지고, 그동안 모든 인간관계가 깨어지고 모함을 받고 누명을 쓴다고 해도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아서 너무도 의미있는 인생을 살게 되었다는 것이 너무도 감사하고 놀라워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48하),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도다”(49상)라고 고백합니다. 마리아의 인생은 정말 존귀하게 되었다.

마리아의 인생과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저는 우리의 인생이 마치 높은 빌딩, 혹은 한국형 아파트에 산다고 가정을 해 보았습니다. 1층에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10층에 사는 사람이 있고, 또 20층 혹은 50층, 요즘은 100층까지도 올라갈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층이 그 사람의 삶의 질과 수준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즉 높이 올라갈수록 더욱 양질의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아파트의 기초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어쩌면 아파트가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얼마나 발전된 기술로 지은 아파트인데 그 정도 일로 무너질 수 있겠느냐고 부인합니다. 사실은 그렇게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대하는 마음의 표현임을 금방 느낄 수 있으셨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마치 이런 아파트에 사는 것과 같다고 가정할 때 그런 가정은 그렇게 허황된 가정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높은 층에 있는 사람일수록 만일의 경우 아파트가 무너졌을 때 올 수 있는 충격과 고통이 더 클 것이라는 점, 그리고 아마도 거의 죽음으로 자기 인생을 마치게 될 것이라는 점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가 그동안 쌓아놓았던 재물과 명예와 권력, 인맥과 힘을 잃어버리는 것은 물론이겠고요.

이 상황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가끔은 아래, 바닥으로 내려와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삶이 지금 어디 위에 세워졌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10층이나 20층의 높이에 살면서는 도무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래층, 즉 1층까지, 아니 바닥에 내려와서 권력도, 힘도, 물질도, 명예도 없는 그 자리에 내려와 봐야 알 수 있고,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려와서 보니 정말 내 삶이 바른 자리에 서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시 내 삶을 세우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서 당신의 인생을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을 성경은 “회개”라고 표현합니다. 세례 요한도, 예수님도 처음 선포한 말씀이 바로 “회개”였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지금까지 세워진 그 삶은 잘못된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고백하고 돌아설 때 그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마리아를 다시 생각해 봅시다. 그는 천사의 계시를 받을 때, 그리고 받아들일 때, 정상적인 결혼을 포기했습니다. 사랑하는 요셉과의 결혼에 대한 꿈을 내려놓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마리아는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누렸습니다. 4명의 아들을 낳았고, 딸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는 먼저 내려놓았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세워놓은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서 다 온전히 내려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과 그 말씀에의 순종 위에 자신의 인생을 새롭게 건축해갔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믿음 안에서 새롭게 세워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10층, 혹은 20층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그리고 새롭게 우리의 인생을 건축하고 세워가야 합니다. 그 자리가 어디입니까? 그 자리가 바로 마리아가 말하는 비천한 자리가 아니겠습니까? 아무 것도 없이 정말 비어있는 모습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비천함에도 불구하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혜, 비천하기 때문에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맞보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참으로 하고 싶지 않은 말씀이고, 듣고 싶지 않은 말씀이겠지만, 우리에게는 고난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가 쥐고 있는 힘,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힘, 물질의 힘, 권력의 힘, 지식의 힘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결국 무너질 것을 위해 너무도 많이 애쓰고 수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절실히 우리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내려오는 것입니다. 손에 쥐고 있는 힘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바라보며, 주여 비천한 자를 돌아보소서 하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참으로 비천한 자리임을 알 때 우리는 비로소 그 때부터 주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주님의 말씀과 은혜 위에 세워질 때 비로소 우리의 인생은 어떤 풍파에도 흔들림이 없는 든든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때때로 예기치 않은 고난을 당할 때, 그 안에서 자신의 인생을 새롭게 볼 수 있는 영적 은혜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새롭게 빚으시고 지으시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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