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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대강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대강절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강림하시는 것을 기다리는 절기를 의미합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성탄을 마음으로 준비하고 그분의 오심을 기다리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성탄추리와 장식도 하고, 성탄계획을 세우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으로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성탄절을 다분히 이벤트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성탄절에 뭔가 따끈따끈한 행사나 감동적인 사건을 갖지 않으면 성탄절이 성탄절 같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항상 아쉬운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성탄의 참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게 하기도 합니다. 이번 성탄절을 보내면서 성탄의 의미를 더 깊이 묵상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본문은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에 대해 알려주는 내용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28절). 은혜는 무엇입니까? 가브리엘 천사는 왜 마리아에게 은혜를 받은 자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교회에서 흔하게 사용하는 용어들의 의미에 대해 우리는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지나가곤 합니다. 은혜를 흔히 ‘거져 주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좀 더 깊은 의미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삶에 개입하시는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로 다가오셔서 나의 마음을 여시고, 나를 통해 그분의 뜻을 성취하시는 일체의 과정이 모두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먼저 우리를 찾아오셔서 손을 내미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도 그렇고,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것도 그렇고, 베드로를 주님의 제자로 삼으신 것도 그렇고, 바울은 사도로 부르신 것도 그랬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누군가 나를 돕기 위해 나의 삶에 개입하면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내가 너와 네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단 한 명의 아들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답답해습니다. 자신의 나이는 점점 더 들어가고, 아기를 낳을 수 없는 나이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포기하고, 그가 부리고 있던 종 엘리에셀에게 자기의 모든 것을 상속하려고 계획했습니다.

하지만 하니님은 그것을 거절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개입하신 사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아이디어였고, 아브라함의 계획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개입하신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그의 길이 막히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다음에 아브라함은 여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하나님께서는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이 100세가 되어서야 이삭이라는 믿음의 아들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그의 삶에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삶에 개입하신다는 말은 우리의 생각과 의지, 계획을 거절하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입장에서 필요한 것은         언제나 자기 생각과 의지, 계획을 포기하고 내려놓는 것입니다. 성탄절은 하나님께서 이 따의 일에, 인간의 역사 안에 들어오셔서 개입하시는 사건입니다.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자기 살멩 찾아오셔서 간섭하시고 개입하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는 어떤 면에서는 수동적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 어떤 계획을 가지고 시도할 때마다 하나님은 그의 계획을 거절하셨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이 무너지는 경험을 합니다. 자신의 계획, 의지가 포기되는 과정을 겪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께서 비로소 일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나의 삶 가운데 일어나는 것이 은혜입니다. 거기에는 인간의 욕망과 탐욕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의지와 계획까지도 내려놓는 것이고, 때로는 우리의 선한 의지까지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을 아브라함을 통해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는 삶이 결코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은혜를 거져 받는 것이라고 정의는 옳지만, 거져 받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그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과정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자신이 무너지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우리의 생각과 계획을 거부하시기 때문입니다. 실패하게 하십니다. 때로는 아프게도 하십니다. 때로는 엄청난 고통을 갖게 하기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개입하심으로 당신의 뜻을 이루려고 하실 때 어쩔 수 없이 우리의 의지와 계획은 좌절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중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성도님들에게도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28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그리고 31절을 봅시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하나님께서 마리아의 삶에 개입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여기서 ‘평안하다’고 하는 헬라어 ‘카이레’는 ‘기뻐하다’는 의미로 관습적인 헬라식 인사말입니다. 그래서 다른 번역성경에는 대부분 이 단어를 “기뻐하여라”로 번역했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은혜를 받은 자여 기뻐하여라.”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기뻐하는 자가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의 개입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가는 길을 아니라 하시고 막아서실 때 멈춰서서 주님의 이끄심을 받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같은 단어가 다른 곳에서 쓰였습니다. 요엘서 2장 21절에 같은 단어가 쓰였습니다. “땅이여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여호와께서 큰 일을 행하셨음이로다.” 여기서 기뻐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호와께서 큰 일을 행하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행해지는 것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스바냐 3장 14-15절 말씀입니다.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하였고, 네 원수를 쫓아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여기서도 이스라엘이 기뻐할 이유는 여호와께서 그들 가운데 행하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거하였고, 네 원수를 쫓아냈고,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그들 가운데 계심으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의 이러한 선포에 대해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를 깊이 생각했습니다.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매”(29절). 그리고 34절에서 마리아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이 질문에 천사는 35-37절의 말씀으로 대답하십니다. 36절을 봅니다.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의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다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역사의 확실함을 증거합니다. 나이 많은 엘리사벳도 아기를 배었으니 처녀인 너도 하나님께서 아기를 갖게 하실 것이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하실 일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설레는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가 일상적인 삶에서 경험하는 것을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계속 좇을 것인지, 아니면 돌아설 것인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먼저 믿음으로 살아온 사람들의 길을 보는 것은 큰 힘이 됩니다.

교회는 바로 그런 신앙의 모델을 함께 보고 배우는 곳입니다. 우리에게는 성경 속에서 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역사 속에서도 믿음의 사람들을 만날 뿐만 아니라 또한 교회 안에서도 그런 믿음의 모델을 만납니다. 교회는 바로 그런 곳이어야 합니다. 진정한 믿음이 어떤 것인지, 참된 믿음이란 무엇인지를 가까이서 보고 배울 수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피차 믿음으로 서도록 격려하고 위해서 기도하는 일들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본문을 잘 보면 마리아에게 엘리사벳의 사례가 얼만큼 힘이 되었을까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마리아의 경우는 처녀로서 남자 없이 아이를 낳는 것이고, 엘리사벳은 비록 나이는 들었지만, 정상적인 방법을 통해 아기를 낳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사벳을 통해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는 비록 놀라운 사건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는 그것은 엘리사벳 자신의 체험입니다. 그것이 전적으로 마리아의 삶에 보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리아는 처녀로서 아기를 낳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마리아의 경우는 또 하나의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절대적인 비교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길은 그 자체가 순례의 길입니다. 믿음은 근본적으로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하나님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28절 말씀대로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는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아무도 가보지 못한 길을 걷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직 나에게만 주어진 유일하고 독특한 길을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시고 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각자의 삶을 위해 예비하신 길을 걷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믿음의 길을 보면서 위로를 받고 격려를 받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깊에 볼 때 그 길은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길을 가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 믿음 위에 서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의 길을 볼 때는 쉬워보입니다. 분명 마리아도 그런 생각이 들었을지 모릅니다. 마리아의 길보다 엘리사벳의 길이 더 쉬워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 길이 믿음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은 다 다릅니다. 우리에게 어려움이 닥쳐올 때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결단과 삶을 요구하십니다. 막상 그런 상황 앞에 놓이면 우리는 그것이 나만이 겪는 어려움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맞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길은 하나님께서 나만을 위해 예비하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 안에서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원리를 찾을 수 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을 통해 오직 나에게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는, 주님께서 오직 나에게만 들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왜 나는 저 사람과 같지 않은 길을 가게 하느냐고 원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항상 우리는 내가 가는 길이 가장 힘들고 어려워보이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우리의 길을 다른 사람의 길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역사하심을 보는 것입니다. 과연 내 생애에 하나님은 개입하고 있는 것입니까? 과연 내 생애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은혜가 있습니까? 그리고 그 은혜를 누리며 살아갑니까?

천사 가브라엘이 마리아에게 와서 한 첫 마디는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기뻐하여라)”(28절)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기 원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나만을 위해 일하시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께 내 생애를 높이시고 존귀케 하시는 은혜를 경험하기 원하십니까?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위해 특별한 길을 준비하신 것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 길을 주님만을 바라보며 따라가십시오. 그것이 은혜의 길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길입니다. 성탄을 준비하는 대강절 첫 번째 주일, 우리 자신을 위해 예비하시는 주님의 은총의 길을 믿고 순종함으로 좇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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