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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제물이 되어 죽으셨습니다.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에 대해 집중적으로 말씀합니다. 환난과 박해 속에서 신앙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 곧 그들을 신앙적 박해 가운데서 세워주는 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을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라고 말씀합니다.

제사장은 인간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다리를 놓는 중개자, 혹은 중보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동물을 대신 죽게 함으로서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이렇게 동물을 하나님께 잡아 드리고, 인간에게 삶의 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바로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사는 아주 큰 모순을 지닙니다. 인간이 범한 죄의 값을 대신하기 위해서는 그 죄에 합당한 값을 지불해야 했는데, 동물은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죽게 하기에는 그 값이 합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본래의 의도는 동물 제사에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대제사장으로 제물이 되시는 것에 있습니다. 즉 동물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려는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진짜가 나타났으니 상징은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의 죄가 정말로 그렇게 죽을만큼 심각한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세례 교육을 할 때 꼭 이 문제를 점검합니다. 제가 세례를 준비하는 분들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말로 당신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고 믿습니까?’ 믿는다고 대답하면 다시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이 지은 죄가 죽어야 할만큼 그렇게 큰 죄였습니까?’ 그러면 조금 고민합니다. 죽어야 할만큼 큰 죄를 지었다고 하면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그렇게 죽어야만 할 정도로 큰 죄를 지었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그러면 중고등학생들은 ‘거짓말을 했다’든지, 혹은 ‘나쁜 마음을 품었다’는 식의 대답을 합니다.

사실 우리는 자신이 그렇게 꼭 죽을만큼 큰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까?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그렇게 목소리를 높이고, 자기 주장이 그렇게도 강하며, 조금도 손해보지 않으려고 다툼과 자기 의에 사로잡혀 사는 것입니까?

우리는 여전히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것은 앞뒤가 안맞는 신앙고백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은 이와 같은 신앙적 이중성에 대한 고민을 더 이상 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이런 고민의 자리를 축복이나 흔히 요즘 말하는 번영신학과 같은 것으로 대치해 버렸습니다.

여기에 삶의 변화를 기대할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기독교인들의 삶은 아주 기본적인 고백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열심히 착하게 살려고 한다고 해서 삶이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변화는 복음이 아니면 안 되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복음적 이해가 없으면 성도의 삶은 전혀 변화되지 않습니다.

내가 죽을 정도로 큰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고 말한다면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예수님의 죽음은 개죽음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죽을 죄도 아닌 것을 위해 예수님이 죽으셨다면 예수님은 뭐가 되는 것이겠습니까?

자기 안에 있는 죄가 보이십니까? 예수를 믿은 후에도 여전히 나를 지배하고 엄청난 힘으로 나를 끊임없이 끌어내리는 죄의 본성이 보이십니까?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듯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저내랴?(롬7:24)”고 죄로 인해 탄식하며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십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우리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서         그분이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정말 내가 죽을 죄인이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시 산 것을 믿는다면 이 놀라운 진리 앞에 우리가 기뻐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고, 여전히 침울함과 낙심 가운데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님, 나는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합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셨기에 이제 무엇이든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고백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현실에 자족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엄청난 기쁨의 이유를 발견하라는 의미입니다. 이 큰 기쁨의 근원을 발견하고 나면 다른 일들이 우리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생명의 삶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삶의 생명력이 바로 이 고백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친히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두 번째 예수님께서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라는 말씀은 그분께서 우리의 고통을 친히 경험하셨다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을 믿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고통을 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즉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그분은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에 그런 일쯤은 넉넉히 이기셨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좀 더 깊이 이해하지 못하게 합니다.

본문 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체휼)하지 못하실 이가 이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분은 우리의 고난을 친히 경험하셨고,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 똑같이 느끼신다고 말씀합니다.

로빈슨이라는 설교자가 히브리서를 강해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의 전 생애는 시험으로 점철되었습니다. 그분이 우리가 가지지 못한 힘과 능력을 가지셨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보다 오히려 고난의 압력을 더 크게 느끼셨습니다. 그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온전하고 생기 있는 분이셨고, 그분의 인성과 인격, 거룩하심으로 인해 그분은 사단의 조롱과 시험, 공격 앞에 더 크게 노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클레이라는 주석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죄를 범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은 예수께서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죄의 깊이 유혹과 공격을 받으셨다는 것을 전제한다.”

인간은 흔히 죄의 공격을 받을 때 공격이 채 우리에게 다가오기도 전에 죄 속에 빠져버리게 되고, 그렇게 되면 죄를 이겨내는 것이 얼마나 무서우며 맹렬한 것인지를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죄의 저항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항하여 자신을 지키려고 할 때, 그리고 죄와의 싸움이 십자가 위에서 승리할 때까지 지속된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을 지니신채 그렇게 끝까지 죄와 싸우셨습니다. 온 몸으로 불의와 대면하셨고, 자신의 생명을 다하여 죄와 맞서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그들을 미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저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처럼 그렇게 깊은 영적 고독과 인간적 고뇌를 겪은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 우리의 일상적인 상황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의 불의 때문에 더 많은 고통을 겪는 사람은 비양심적인 사람이 아니라 양심적인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성을 가지셨기 때문에 그분의 십자가와 함께 오는 인간의 불의와 모순, 악행과 죄악을 온전히 몸으로 감당하셨습니다. 마지막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마지막 호흡이 끊어질 때까지 감당하신 그 주님의 은혜를 오늘날 우리는 너무도 쉽게 간과해 버립니다. 주님은 그렇게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체휼)하셨습니다. 함께 느끼셨습니다.


우리가 아주 많이 아프고 힘든 고난 중에 기도를 드립니다. 그런데 그 기도에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때 우리는 많이 힘들어 하고, 때로는 신앙적 회의를 갖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불신의 마음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섭섭하고 안타깝고 힘들어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그런 고통이 지속되고 더 커질수록 우리는 그 안에서 예수님의 고통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큰 고난과 고통을 당하셨는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고통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사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넉넉히 이기셨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고난을 다시 보게 됩니다. 내가 고난을 당하면서 그분의 고난을 새롭게 보는 것입니다.

거기에 그분의 사랑이 있었고, 거기에 그분의 아픔과 함께 하심이 있으셨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주님의 모습을 보고 깨달으면서 우리에게 회복의 힘을 주시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십자가를 깨닫는 순간까지 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분의 동정하심, 그분이 우리의 고통을 친히 몸으로 체험하셨다는 사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를 너무도 잘 아신다는 사실을 알기까지 우리는 진정으로 주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찬예식에 참여합니다. 1년에 4번 합니다. 성찬식은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예식입니다. 우리는 1년에 4번 하는 것조차도 때로는 습관적으로 맞아하곤 합니다. 십자가게 깊이 다가오지 않습니다. 우리의 굳어진 마음으로 인해 그분의 십자가를 느끼지 못합니다. 감각이 없는 것입니다. 안타깝습니다.

성찬식은 그분의 십자가 앞에 나가는 것입니다. 그분의 고통을 묵상하고 체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십자가를 바르게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분의 은혜를 알게 됩니다. 그분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십자가가 무엇인지,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신 그분의 사랑이 무엇인지 비로소 조금씩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찬식을 통해 정말 진심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할 수 있는 깊은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라

본문 16절은 성도들에게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히브리서가 쓰여질 때까지도         예루살렘에는 여전히 성전 제사가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된 히브리인들은 고난과 박해를 겪으면서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고난과 박해 속에서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왜 이렇게 핍박을 받으면서까지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 때 바로 히브리서 기자는 이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신앙의 형식만 남고 그 형식 안에 담겨진 진리가 깨달아지지 않으면 그 신앙은 힘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동력을 잃어버립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친히 고통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우리를 동정하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의 믿는 도리를 굳게 잡으라”고 권면하고, 또한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할까요? 우리가 왜 좀 더 하나님께 기도하지 못할까요? 우리가 왜 고난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질까요? 주님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내가 그만한 죄인이라는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거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셔도 능히 이길 수 있는 분이셨기 때문에 그 고난이 그렇게 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주님의 은혜와 용서가 필요한 자들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하신 분이셨기 때문에 더 큰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우리를 위해 제물이 되어 주셨고, 또한 우리를 위해 친히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다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형편을 아시고, 우리를 감싸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고통을 친히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주님 앞에 나아와 주님의 은혜를 누리라고 말씀합니다. 이시간 주님의 그 부르심에 참여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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