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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후 일곱 째 되는 날에 안식하셨습니다(창2:2). 안식은 단지 쉬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랍비들은 안식을 메시야의 시대를 맛보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메시야가 다스리는 나라의 기쁨을 맛보는 것이 바로 안식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사람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치유의 행위를 노동이라고 여기고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범한다고 비난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것이 안식일의 목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은 메시야의 시대를 맛보는 것이라는 점에서 예수님의 치유는         지극히 합당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의 환희와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완전한 안식은 하나님 나라에서 완전하게 성취될 것입니다. 그 안식은 주님의 다스리심으로 가득차 넘치는 기쁨과 감사, 완전한 회복의 역사를 맛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 이 땅에서도 그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리는 안식은 하나님 나라에게 완전한 모습으로 누리게 될 안식의 그림자입니다. 그리고 그림자로서의 안식을 맛보면서 성도는 완전한 안식을 사모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임재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로 살다가 가나안이라는 약속의 땅에서 안식하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러나 출애굽한 1세대는 안타깝게도 가나안 땅을 밟지 못했습니다. 물론 가나안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완전한 안식을 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가나안은 장차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주실 안식의 땅, 하나님의 나라의 상징으로서 충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안식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고난으로 흔들리던 초대교회 히브리 성도들에게  본문은 참된 안식을 바라보며 소망을 잃지 않고 믿음으로 달려가도록 권면합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출애굽 1세대는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어 광야로 나왔지만 가나안이라고 하는 안식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사실에 대해 계속 말씀합니다(2, 6절). 출애굽 1세대가 안식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불순종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6, 11절).



이스라엘 조상들의 불순종

출애굽을 경험한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이스라엘 민족들 중에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가장 많이 경험한 세대입니다. 그들은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경험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홍해 밑을 통과한 역사상 유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위에서 물이 솟는 것을 경험했고,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메추라기가 동풍을 따라 이스라엘의 진영 주변에 쌓여서 그것을 식량으로 삼은 유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주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과거를 그리워했고, 미래를 두려워했기 때문에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출애굽하여 광야로 나와서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항상 애굽을 그리워했습니다.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 고기가마를 그리워했고,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라고 불평했습니다.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애굽에 있을 때 그들은 노예였습니다. 아주 고된 노동을 하는 노예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가 애굽을 나가야 한다고 했을 때 400년 이상 살던 그 땅을 떠나 다 따라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곳에서의 삶의 고단함을 보여줍니다. 마지막에는 아들을 낳으면 다 나일 강에 던져 죽여야만 하는 고통을 겪으면서 그들은 애굽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들은 다시 그곳을 그리워합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다 과거를 그리워하는 기질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5년만 더 젊었어도 좋았을텐데 하면서 세월 가는 것을 아쉬워합니다. 5년 전, 혹은 10년 전이라고 그렇게 예뻤던 것도 아니면서 주름이 생겨서 얼굴이 망가졌다는 둥 불평을 합니다. 과거를 그리워하지 마십시오. 그리워할수록 더 불행해지고, 비참해집니다. 얼굴도 더 망가져버립니다.

몸에서 힘이 빠지고 기력이 쇠하는 것을 느낄 때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오고 있음을 기억하면서 더욱 더 영광스럽게 그 날을 맞이할 준비를 하십시오. 그래서 죽을 때도 멋지게 죽어야 합니다. 영광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찬송하면서 가야합니다. 죽을 때 조금도 아쉬워함이 없이 기꺼이 이 땅에 이렇게 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렇게 죽을 수 있기를 소망하십시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열심히 사는 것입니다. 아주 멋진 모습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 조상들이 과거를 그리워할 뿐만 아니라 또한 가나안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이 땅에 대한 약속을 의지해서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나오게 한 것은 그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 먼저 정탐꾼 12명을 가나안 땅에 보냈습니다. 그들은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고했습니다. 그들의 보고에 의하면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했으며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는 아낙 자손이라는 거인 족속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주하고 있었고, 헷 족속과 여부스 족속과 아모리 인들은 산지에 거주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크고 장대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들어가 살 빈 땅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지배만 받고 지내온 400년 동안 그들은 어떤 결정도 할 수 없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대한 환상은 사라져버렸고, 그들의 마음에는 큰 두려움만 엄습해 왔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기억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돌아가자. 애굽으로 가자.
모세가 안 간다고 하면 다른 지도자를 뽑아서라도 가자.’ 그들은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과거를 그리워하고, 장래를 두려워합니다. 이것이 불순종의 이유입니다. 자꾸 돌아갈 수 없는 과거만을 그리워합니다. 이렇게 불행한 인생이 어디있습니까? 어디로 가겠다는 것입니까? 정말 애굽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인가요? 정말 젊음을 찾고 싶으십니까? 그렇게도 젊을 때가 좋았습니까? 젊어지면 다시 활기차게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인생은 오직 앞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인생에 뒤로 가는 길은 없습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애굽을 젊음으로 비교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에서 노예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애굽생활이 그들에게는 원기왕성하게 살던 시절로 기억된다는 것입니다.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고기가마 곁에서 고기를 먹던 세월을 추억하고,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을 먹은 것이 생각난다고 했습니다. ‘값없이’ 먹었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배급으로 살았다는 말 아닌가요?



믿음을 결부시키지 못함(2절)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여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불순종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게 된 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자신들의 고난을 ‘믿음과 결부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삶은 믿음과 연결되지 못했습니다. 믿음으로 애굽에서 나왔지만, 막상 광야에서 가나안의 소식을 들었는데 그들은 그 상황을 믿음으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즉 믿음 위에서 판단한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믿음으로 그 상황을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완고했고 강퍅해졌습니다(3:8, 13, 4:7). 마음이 완고하다는 것은 의지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믿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에는 수동성도 있지만, 능동성도 있습니다. 믿음의 수동성이란 믿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은 본래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믿으려고 한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에게 믿게 하실 때 믿음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믿음에는 능동성도 있습니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강퍅해지는 것입니다. 그 반대의 경우 믿음의 능동성은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믿는 것은 순종함으로 표현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거부하는 것은 믿어지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의지를 가지고 믿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우리에게 능동적인 믿음을 촉구합니다. 의지적으로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갈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크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지혜로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다 알고 믿을 수는 없습니다. 지난 주일 설교의 주제처럼 믿을 때 알아지는 것이지, 알기 때문에 믿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의지적인 믿음이 필요합니다. 의지적인 불신앙도 있지만, 의지적인 믿음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순종입니다. 순종은 알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알고 가는 것은 이미 순종이 아닙니다. 그것은 알기 때문에 그렇게 판단하는 것뿐입니다. 순종은 오직 나에게 그것을 말씀하신 하나님을 믿고 가는 것입니다. 상황을 보는 것도 아니고, 내 형편을 보는 것도 아닙니다.


여호수아가 요단 강을 건너가서 길갈이라는 곳에 진을 친 후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할례를 행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요단 강을 중심으로 동쪽이 진을 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강을 건너 서쪽, 즉 가나안 지역으로 들어갔습니다. 앞에는 든든한 여리고 성이 진치고 있고, 뒤에는 요단 강물이 흐르고 있고, 앞에는 가나안 족속들이 높은 성벽을 쌓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에게 할례를 행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의지적인 믿음입니다. 기꺼이 믿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운명이 어디로 갈지 모르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믿기로 작정했고, 그것은 순종으로 나타나는 믿음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그 답을 12-13절에서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더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느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넉넉히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잘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아십니다. 우리는 그 분 앞에 벌거벗은 것처럼 다 드러난다고 말씀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고, 우리의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너무도 잘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고 가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고 계신 한, 그리고 나를 알고 계신 한, 나는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열심히 달려가면 되는 것입니다.


11절에서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안식은 어떻게 들어가는 것입니까? 그것은 순종함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믿음으로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의지적인 믿음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기꺼이 믿으려고 함으로 믿는 것입니다. 뒤에는 요단 강물이 흐르고 있고, 앞에는 가나안 족속들이 진을 치고 있지만, 기꺼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려고 하는 순종이 바로 능동적인 믿음이며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런 믿음만이 우리로 하여금 과거를 그리워하고 미래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이기고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나가게 합니다.

그래서 가끔은 하늘을 쳐다 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신다고 생각하고 달려가다가 어느 순간 우리 혼자 달려갈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보고 계신지,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그 뜻에서 이탈하고 있지는 않는지, 새벽마다 기도하고, 믿음의 고백을 확인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풍성히 하면 우리가 비록 그분의 뜻을 다 몰라도 그분이 우리를 아시기 때문에 우리는 조금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근거를 내가 그분을 안다는 데 두지 마십시오. 그분이 나를 안다는 사실에 우리의 믿음의 근거를 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나로서는 늘 불확실하지만, 나를 지켜보시는 분 안에서 내 인생은 가장 확실한 인도를 받고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는 성도의 삶입니다. 그렇게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을 누리고 살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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