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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2장은 천사들보다 뛰어나신 예수님에 대해 말씀하고, 3-4장은 모세보다 뛰어나신 예수님에 대해 말씀합니다. 유대인들 중에는 천사들을 숭배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던 사람들 중에도 삶의 고난과 어려움을 겪으면서 과거의 천사숭배사상으로 돌아가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1장 14절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천사는 구원받을 상속자, 즉 성도들을 섬기라고 보냄을 받은 이들입니다. 즉 히브리인들이 천사를 섬기려고 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조력자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전능하신 하나님, 절대주권을 가진 신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도구를 찾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을 수단화하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이런 의도가 깔려 있습니다. 그들에게 종교는 자기 삶의 수단입니다. 섬기는 것이 아니고, 경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우리의 신앙은 항상 이타적이고 희생을 요구하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기억할 것은 천사를 숭배하려고 하는 이들의 마음에, 그리고 우상을 섬기거나, 흔히 사람들의 종교적 행위들 안에는 자기 욕망을 이루는 또 하나의 방법으로 사용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주도적인 존재 혹은 주인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때에 갖고 싶은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을 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배하고 싶은 욕구, 남편이 아내를 지배하고 싶어하고, 가진 자가 가난한 자를 지배하려는 마음, 지식 있는 자가 없는 자를 무시하고 지배하려는 마음, 이런 마음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형태만 다를 뿐이지,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이 바로 천사숭배와 같은 종교적 행위에서 나타납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마음이 다 있습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의도가 생각과 언어, 행동을 통해 드러납니다. 컨트롤하고 싶은 욕구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이 내 손에 들어와 있다고 확신이 들 때 비로소 마음의 안심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간혹 이런 것을 기도 응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아주 불행한 일입니다. 이만저만한 착각이 아닙니다. 그런데 실은 우리 안에 이런 생각들이 조금씩 다 있습니다.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을 가장한 우상숭배며,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또 하나의 천사숭배입니다. 이런 믿음이 우리를 불행하게 합니다. 자유가 없고, 기쁨이 없습니다. 본인은 그 안에서 기쁨을 얻고 감사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진짜 은혜는 아닙니다.


그 다음에 조금 더 진보한 믿음을 모세를 존경하는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본문은 천사가 나쁘다거나 모세가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천사를 숭배하고, 모세에 대해 오해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모세는 본문 2절 이하에서 말씀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아 이스라엘에게 전한 사람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아주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율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으로 훈련받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가졌습니다.

광야의 그 어려운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살아올 수 있던 것도 바로 이 율법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이렇게 철저한 율법 준수에 대한 명령이 없었다면 그들은 광야 40년 동안 이미 자취도 없이 자멸했을 것입니다. 안식일에 나가서 일을 하면 죽이라고 하는 가혹하리만큼 철저한 율법의 명령은 그들을 광야와 가나안에서 지켜내는 힘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는 좋은 방법은 철저한 자기 관리, 자기 통제입니다. 긴장을 늦추지 않고 언어 한 마디, 행동 하나에 있어서까지 철저한 자기 관리를 통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율법적인 삶입니다. 이스라엘이 고난의 역사를 헤쳐온 방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주시려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좀 더 궁극적인 것들의 그림자였습니다. 모세의 율법, 구약의 제사, 선지자들을 통해 선포된 말씀들은 더 궁극적인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가장 궁극적인 인간의 삶을 바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내셨습니다. 히브리서 1장 2절에서 말씀하시듯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 이 아들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최종적으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계시와 당신의 목적을 드러내셨습니다.

본문 1절은 바로 그런 배경을 가지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브리서 12장 2절에는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고, 예수를 바라보자고 권면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궁극적인 복음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매우 중요한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생명과 영광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 즉 영생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율법과 다른 이유는 율법은 외적인 통제를 통해 살게 하는 반면, 생명은 스스로 안에서 가장 온전한 삶을 이루도록 합니다. 율법은 엄격한 규칙과 고된 훈련을 통해 살게 하지만, 생명은 안에서부터 그 힘을 얻습니다. 율법은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만, 생명은 할 수 있고, 하고 싶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생명은 스스로 그 일을 하기로 결정합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스스로 이웃을 사랑합니다. 결코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하시므로 그런 삶을 살아가도록 역사하십니다. 무엇을 하든지 자원함으로 하고, 무엇을 하든지 기쁨으로 기꺼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형입니다.

이런 삶은 어려울 수도 있고, 쉬울 수도 있습니다. 어렵다는 점은 그런 삶을 일반적으로 잘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고, 쉽다는 점은 그런 삶이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생명이 스스로 자라가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는 자는 이런 삶을 자연스럽게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냥 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어린아이는 생명이 있다고 태어나자 마자 걷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걷는 연습을 해야 하고, 말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율법을 지키는 훈련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그리고 “예수를 바라보자”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걷는 연습을 해야 하고, 뛰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내가 나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주도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를 통해 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렇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생명을 가지고 그분을 뜻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그 답을 1절에서 찾아봅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이 말씀은 우리를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여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만약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다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삶을 염려하기보다는 삶의 사명에 더 집중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고 해도 우리가 여전히 삶의 염려를 붙들고 있다면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역사할 수 없습니다.

삶의 염려를 붙들고 사는 것은 천사를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그리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욕망이 이끌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것은 아주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자기가 주인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모든 것을 소유하기 원하고, 모든 것을 정복하기 원합니다. 그런 욕망을 절제할 수 없고, 결국 패망의 길로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로 살아갈 때 우리는 사명을 위해 살게 되고 내 사명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으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생명력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런 창조적 생명력을 가지고 우리 안에서 당신의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역사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두 번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영광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제자들은 육신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영광을 보았습니다. 잘 생각해 보면 이 말씀은 많은 궁금증을 갖게 합니다.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육신이 되신 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영광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아닙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그 예수님에게서 본 영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영광이 무엇이었을까요? 사도 요한이 본 영광이란 무엇이었겠습니까?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말씀입니다. 멋진 옷을 입으신 것도 아니고, 얼굴이 멋있으신 것도 아니었고, 얼국에 광채가 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 영광을 이제는 성도들에게 주었다고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1장 3-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성도들에게 은혜의 영광을 거져주셨는데, 우리로 그 영광을 찬송하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그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주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에게 그 영광, 사도 요한이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에게서 본 그 영광을 우리에게 거져 주신 것입니다.

그 영광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영광이 무엇입니까? 더욱이 영광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영광을 찬송하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본 그 영광,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그 영광을 찬송하게 하셨습니다. 즉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그 분 안에 있는 영광을 찬송하고, 또 우리에게 주신 그 영광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할 때 우리는 바로 그분 안에 있는 영광과 우리 안에 있는 바로 그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인도 켈커타(콜카타)에서 45년 간 자기 삶을 다 받쳐서 빈민과 고아와 병자들을 돌보았던 테레사 수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기 전 생애를 다 드려서 그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물론 문제도 없었던 것은 아니고, 신학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려고 하는 것은 테레사 수녀가 어떻게 그곳에서 그렇게 오랜 세월, 자기 전생애를 다 받쳐 그런 섬김의 삶을 살 수 있었겠습니까?

테레사 수녀는 1979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그 외에도 그는 매우 자주 매스컴에 등장하면서 세계의 유명 인사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 정도의 대우를 받을 정도라면 그런 일도 할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유명한 인물이 된다는 보장이 있다면 나도 그런 일을 해볼 수 있겠다고들 사람들은 흔히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녀가 그 일을 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정말 우리에게 노벨 평화상을 준다고 약속하고, 그 외에도 여러 부류의 상과 유명인 대우를 가끔 받는다면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남이 할 수 없는 극단적인 희생과 헌신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그 안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테레사 수녀는 인도의 콜카타에서 빈민과 고아와 병자들을 돌보면서 다  죽어가던 환자가 소생할 때 부모도 없이 정처없이 떠돌던 어린아이를 돌봐서 새로운 생명을 얻고 자라가는 것을 볼 때 그는 마치 새로운 창조의 역사를 맛보는 경험을 했으리라 확신합니다.

그녀는 그 안에서 놀라운 생명의 역동함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온 힘을 다해 생명을 돌볼 때 죽어가는 이들이 예수를 믿고 (물론 테레사 수녀는 그녀가 운영하는 죽음의 집에서 능동적으로 복음을 전하진 않았다고 하지만) 극진한 사랑과 섬김을 통해 사람들이 변하는 것을 볼 때 그는 어떤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녀로 하여금 평생 그 일에 헌신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노벨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어떤 보상을 받아서 감당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외부로부터 오는 인기와 영광을 누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 안에서 이미 그들의 삶을 충만하게 하는 어떤 영광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세상의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영광이었습니다.


요즘은 연애인들이 남보기에는 화려해 보이지만, 남모르는 고통과 어려움을 많이 겪습니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악플들 때문에 연애인들이 마음고생이 심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는 말 중에 ‘그건 아닌데’하는 말이 있습니다. ‘연애인은 인기를 먹고 산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그들 스스로를 죽이는 말입니다. 인기를 먹고 산다는 말은 그들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옛날 가수들은 왜 가수가 됐느냐고 물으면 노래를 좋아해서 됐다고 말했던 것 같습니다. 굶어죽더라도 기타 하나 어깨에 메고 몇 명이라도 모여 있는 곳에서 함께 노래를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을 즐길 수 있는 마음이 가수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가수들에게 물어보면 아마도 대개는 ‘뜨기 위해서’ 가수가 됐다고 말할 것입니다. 전혀 다르지 않습니까? 노래를 잘 하느냐? 노래를 즐기느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중 앞에 뜨면 되는 것입니다. 나는 노래를 좋아해서 노래하다가 뜨지 않고 밥을 굶어도 노래가 좋다고 말할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게 가수의 자존심이고, 가수가 지켜야 할 삶의 자세입니다.


그것을 사도 요한은 육신을 입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보았고, 사도 바울은 바로 그 영광을 우리들에게도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삶의 염려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의 사명에 집중하여 살아갈 때 바로 그 영광이 우리 안에서도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영광을 발견하고 맛보기 시작할 때 우리는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기쁨을 얻게 됩니다. 그런 기쁨과 영광을 누리며 살 때 세상 사람이 해내지 못한 놀라운 일들을 감당하게 되기도 하고, 또 그렇게 세상에 드러난 일을 이루지 못할 때조차도 이미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 안에 주신 그 동일한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 영광의 분량은 세상에 드러나느냐 않느냐와 상관없이 동일합니다. 동일한 명예로움과 동일한 기쁨과 감격을 누리는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의 기쁨과 명예와 영광이 외부로부터 오는 영광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할 때 우리는 바로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써 무엇을 위해 삽니까? 무엇 때문에 살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일은 무엇입니까? 천사숭배로 돌아가려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처럼 자신의 필요를 위해, 자신의 도구적인 목적으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불행하게 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전혀, 조금도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입니다. 삶의 염려와 필요는 주님께서 책임져 주신다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한 번 확실히 믿어봅시다. 그리고 이제 우리 인생의 사명에 헌신해 봅시다. 그 안에 영광이 있습니다. 그 안에 가장 큰 기쁨과 만족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런 삶 가운데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을 맛볼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가득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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