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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절 하반절에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셨고,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말씀이 오늘날 성도들에게 얼마나 의미있게 들릴 수 있을까요? 오늘날은 대개 형제가 적거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욱이 이민사회에 사는 분들은 형제들과의 관계가 멀어진 채 살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기도 합니다.

저는 두 분의 형이 계신데, 바로 위의 형은 6살 위고, 맏형은 8살 위입니다. 아주 어릴 때 둘째 형이 큰 형의 친구와 싸웠습니다. 이마가 깨질만큼 싸우고, 피가 날 정도였습니다. 주말에 시내에서 공부하던 큰 형이 집에 와서 동생의 모습을 보고는 그시로 달려가서 그 친구를 엄청 두드려줬던 기억이 납니다. 얼마나 통쾌했는지 모릅니다. 이게 바로 형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고, 이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편이 되어 주시고, 우리를 위해 대신 싸워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형제가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생활을 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에 더 관심을 많이 갖습니다. 격려와 복, 소망을 주시기를 구합니다. 물론 그것들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관계입니다. 관계가 먼저 형성되고 나서야 그런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형이었기 때문에 동생을 위해 싸워준 것입니다.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자신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보다 더 안타까운 마음으로 동생을 위해 싸웁니다. 형이 아닌데 누가 그를 위해 싸우겠습니까? 남의 동생이 누구에게 맞았다고 해서 누가 그렇게 때려주겠습니까? 문제는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형제가 되십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싸우신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고난 가운데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보시고 그냥 계시지 못하시고 14절 말씀처럼 혈과 육을 지닌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 당신의 자녀들을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기 위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10절 말씀대로 구원의 창시자로 하여금 고난을 통과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대신한 싸움에서 승리하셨습니다. 동생을 대신해서 형이 싸워주신 것입니다.


1. 죄로부터의 승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겪고 있었던 세 가지 영역에서 싸우심으로 인간에게 승리를 안겨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싸워주신 첫 번째 영역은 죄와의 싸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에 대해 패배한 인간을 대신해서 싸우심으로 불행과 절망에 빠진 인간에게 승리를 안겨주셨습니다. 죄는 인간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고, 절망하게 하며 파괴하는 첫 번째 원수입니다. 죄는 인간으로 하여금 진정으로 되고 싶어하는 존재가 될 수 없게 합니다.

17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셔서 백성들의 죄를 속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친히 그 죄의 정체를 몸으로 체험하셨습니다. 그리고 죄로 인해 파멸되는 모습을 친히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의 십자가는 죄가 얼마나 파괴적인 힘을 가졌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죄는 그 사람의 모든 실체를 발가벗긴 채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여섯 시간 동안 십자가 위에 달리셨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까지 그를 비난하고 조롱했습니다. 당신이 왕이라면 그 십자가 위에서 내려와 보라고 조롱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죄의 실체를 정확하게 보아야 합니다. 그 분의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보아야 하고, 그분의 십자가에서 인간이 죄로 인해 얼마나 불행해 지는지, 그리고 그 죄가 얼마나 파괴적인 힘을 가졌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죄에 구속받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죄의 값을 치뤘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죄로 인한 두려움에 시달릴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사해졌습니다. 죄의 실체를 알고 죄가 우리에게 유익을 주지 않습니다. 또한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그 정체를 드러냈고, 속죄되었습니다.


2. 죽음으로부터의 승리

두 번째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싸워주신 영역은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의 승리입니다. 15절,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죽음은 죄의 직접적인 결과요 필연적인 열매이다. 인간은 죽음의 힘 앞에 패배자처럼 살아갑니다. 죽음은 인간을 한 평생 종 노릇하게 합니다. 사람들은 죽음의 두려움으로 인해 하루하루를 염려와 초조 속에 살아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성도님들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와졌습니까? 죽음의 준비는 되셨습니까?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대답할 수 없는 수많은 질문들 앞에 우리는 서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평생 종 노릇하는 우리를 놓아주시기 위해 친히 십자가의 죽음을 담당하셨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에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잃어버리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신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구원 사역을 죽음으로서 성취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죽음이 그렇게 고백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죽을 때, 우리가 죽는 순간 우리의 모든 사명이 완수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안식을 누릴 곳으로 감을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죽음이 부담이나 짐이 아니라 우리가 마땅히 가야 할 길, 그리고 더 큰 영광을 향해 가는 길임을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9절을 보면, 히브리서 기자는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10절을 보면,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고 하셨습니다. 위의 두 구절은 모두 예수님과 그의 형제된 성도들의 삶에서 죽음은 영광으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요즘 매우 자주 들려오는 사람들의 자살 소식을 들을 때, 또 그 사람들이 힘들고 고된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그렇게 했다는 소리를 들을 때, 그들은 과연 죽음을 극복한 사람들일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감하게 죽음을 택한 것은 과연 죽음을 극복한 것입니까?

마라톤 선수가 42.195km를 달립니다. 마라톤은 매번 출전하는 선수들에게도 완주 자체가 매우 힘든 일이라고 합니다. 어느 날 선수가 열심히 달려갔지만, 중간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차량에 실려 출발지였던 경기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면 그는 목적지에 도착한 것입니까? 어떤 방법으로든 죽으면 된 것입니까?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포기할만큼 어려운 삶이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해 줘야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곧 옳은 길이었다고 미화하는 것은 옳은 일은 아닙니다.

그것은 부활신앙이 아닙니다. 부활신앙은, 그리고 죽음을 넘어서 극복하는 신앙은 중간에 탈락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달려가는 것입니다. 마라톤의 골인 지점을 보고 가는 선수는 결코 중도 탈락을 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극복하고 부활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삶을 더욱 강하고 적극적으로 붙들게 됩니다. 삶의 문제를 최선으로 붙들고 가는 것이 곧 부활의 믿음 안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골인 지점을 볼 수 있는 사람만이 달리기를 하는 것입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를 달리기, 그리고 어떤 결과가 주어지는지도 모르는사람은 달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간에 자기 인생의 마라톤을 포기한 것은 인생의 어려움 때문만이 아니라, 어쩌면 목표가 없었기 때문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을 극복해야 합니다. 부활의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십니다. 주님께서 친히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극복하시고,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죽음의 실체를 보여주셨습니다. 죽음을 넘어선 주님의 부활을 보여주셨습니다.

죽음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끝’이라고 보고 가는 것은 죽음을 정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과 부활(영생)은 뗄 수 없는 한 덩어리입니다. 마라톤 선수에게 42.195km를 완주하는 것 자체를 승리하고 했을 때 42.195km를 완주하는 고통과 그로 인해 얻는 영광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살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고통은 있었지만, 승리, 영광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부활의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고 가야 합니다. 죽음을 두려워말고 패배자처럼 살지 말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죽음을 극복하게 됩니다. 죽음을 이기도 승리의 나팔을 불게 됩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3. 사단의 세력으로부터의 승리

세 번째, 예수님께서 인간이 싸우고 있는 영역에 승리를 주신 영역은 사단의 세력입니다. 14절,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형제가 되어 주심으로 그분은 우리를 마귀로부터 자유케 하십니다. 사단은 실제적인 존재입니다. 마귀는 실제로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우리의 삶을 파괴합니다.

마귀가 행하는 일은 창세기 3장에 하와를 미혹하는 일에서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하와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게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무한한 은혜와 축복을 통채로 잃어버리게 합니다. 사단은 늘 우리 가까이 있으면서 우리를 미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마귀를 멸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마귀를 멸하신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십자가의 방법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사실 마귀의 방법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패배처럼 보였고, 십자가 위에서 죄인의 모습으로 죽어가시는 것은 어둠의 세력이 세상을 정복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마귀는 확실히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함으로 그분의 구원 사역을 실패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완성하는 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마귀의 정체를 드러내셨습니다. 마귀의 불의는 만천하에 드러났고,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진리를 드러내셨습니다. 마귀는 예수님만 죽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십자가의 죽음은 그것이 얼마나 불의하며 참담한 속임수였는지를 드러낸 것입니다.

마귀는 오늘도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고 넘어지게 합니다. 마귀의 주된 공격 방법은 속임수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 44절에서 마귀를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마귀를 이기는 방법은 마귀의 거짓과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미혹합니다. 얕은 속임수로 언제나 우리의 시야를 가립니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마귀의 방법에 귀를 기울입니다.

마귀의 방법은 대개 매우 인간적이로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반면 십자가의 방법은 역설적입니다. 마귀의 방법은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치를 드러내고 그를 죽임으로 끝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히려 마귀의 음모와 흉계를 드러내시는 것이었습니다.

마귀의 방법은 항상 절반의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의 정당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와는 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따 먹었을 때 뱀의 말처럼 그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와에서 생명을 가져다 주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속임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귀의 정체를 만천하에 드러내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그의 거짓을 밝히셨습니다. 사단을 멸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죄를 이기시고 죽음을 극복하셨으며 사단을 멸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 은혜를 입고 살아갑니다. 이런 은혜는 오늘도 우리 가운데 계속되어야 합니다. 이런 은혜가 성도님들의 삶 가운데 가득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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