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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는 히브리인들, 즉 유대 크리스찬들에게 보내진 서신서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여전히 구약의 전례를 따라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많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성전 제사를 버리고 예수 앞에 나온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개종은 엄청난 박해를 가져왔습니다. 잡히고, 끌려가고,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심지어 죽임을 당하고, 더 나아가서 출교를 당했습니다. 출교는 유대 사회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출교는 삶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격적으로, 사회적으로, 육체적으로 모든 삶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이방인처럼 취급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런 박해 속에서 어떤 유대인들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유대교로 돌아가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박해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박해는 그들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를 의심하게 만들었습니다. 계속된 박해와 고난 속에서 자시 신앙에 대해 회의를 갖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제대로 믿는 것인가? 하고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유대교로 돌아갈 명분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천사와 율법, 그리고 제사의 정당성을 찾았는 지도 모릅니다. 그것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는 논리를 폈을 지도 모릅니다. 꼭 그렇게 예수만 믿어야 한다고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히브리서는 쓰여졌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시며,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설명하는 서신서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히브리서는 5개의 경고 메시지를 던집니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굳게 붙잡을 것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5개의 경고의 메시지 중에서 첫 번째 말씀입니다.

1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흘러 떠내려가다’는 말의 헬라어 원어는 파라레오(        )라는 말인데, 그 의미는 반지가 손가락에서 빠져버렸다든가,         음식을 실수로 흘려버렸다든가 혹은 어떠한 일을 무의식 중에 말해버렸다든가 어떤 문제에 대해 의논하다가 핵심에서 벗어났을 경우를 들어 표현하는 것입니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들은 참된 복음을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1절 앞부분에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하는 것이 마땅하다.” 유념하다는 말은 굳게 붙들다는 뜻입니다. 자신들이 들은 복음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복음, 말씀을 놓치지 않습니다.


요즘은 뭐가 옳고 뭐가 잘못된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서로 자기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사정없이 주변 사람들을 향해 공격을 하는 것을 보면 너무 아슬아슬하게 느껴집니다. 세상의 언론들이야 서로를 향한 비판을 통해 견제하고 어떤 사회적 공감대와 중심을 잡아간다고 할 수 있지만, 왜 기독교 언론이 그래야 하는가? 말입니다.

그렇다고 기독교 언론이 침묵만 할 수는 없지만, 교회들이 겪고 있는 아픔과 상처들을 사정없이 들춰낼 때는 정말 가슴이 너무 아프게 느껴집니다. 말하고 싶지도 않은 상처와 아픔들이 인터넷에 오를 때 저의 마음도 그렇게 아픈데, 주님은 얼마나 안타까울까 싶습니다. 어떨 때는 ‘그 목사는 그렇게 혼자 잘난척하든이 결국 그렇게 되는구나!’하는 생각이 마음 속에 들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목사가 하는 생각입니다. 목사가 이런 생각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솔직히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교회들이 겪는 그런 상처들을 기사로 읽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런 마음으로 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기사를 보면서 ‘하나님! 이 시대의 교회가 지금 여기까지 왔습니다. 주여! 오늘의 교회를 치유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도대체 사명을 가지고 그렇게 교회의 상처를 들추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렇게 하면 교회가 치유되고 회복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자신들이 교회를 회복시키는 선지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들의 모습에서 선지자의 모습을 볼 수도 있는 것 같긴 합니다. 하지만 뭔가 핵심에서 벗어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흘러 떠내려간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기자가 통곡으로 교회를 위해 기도하면서 그런 기사를 쓴다면 그 글을 읽는 사람들도 함께 아픈 가슴으로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신앙이 어디선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다고 권면합니다. 어디선가 잘못된 것입니다. 뭔가 이유도 있고, 명분도 있어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렇게 그 길로 갔지만, 사실 그길은 길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곳은 그들이 의도한 곳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신들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들이 의도하지 않은 곳에 서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에 뱀이 하와를 유혹하는 장면에서 하와가 그렇게 흘러 떨어지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뱀이 여자에게 접근해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그러자 여자가 대답하기를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라고 대답합니다. 이 때 뱀에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그 다음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말을 들은 여자가 그 나무를 다시 보았을 때         ‘그 나무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였다’고 말합니다.

여기 5절과 6절 사이에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것은 하와가 그동안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와의 눈에 새롭게 비춰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동안은 몰랐었는데, 뱀의 말을 들은 후 다시 보니 그 나무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또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로 보였습니다.

여기까지는 성경에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와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잃어버렸다는 점입니다. 하와는 5절에서 6절로 넘어오면서 하나님과 하와 사이에 신뢰 관계가 깨져버린 것입니다. ‘네가 그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될 것인데, 하나님이 그것을 알기 때문에 먹지 말라고 하신 거야’ 라는 말을 들었을 때, 하와는 당연히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 그래, 하나님이 그런 생각으로 그렇게 말씀하신거야. 전혀 몰랐는데….” 그리고 나서 다시 그 나무를 보니 그 나무는 사실 굉장히 매력적인 나무였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 나무가 새롭게 보였습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웠습니다.

하와는 하나님을 향해 막 원망하며 도전할 마음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 어떻게 당신 혼자만 그런 특권을 누리고 우리에게는 어두운 눈으로 살아가라고 이 좋은 열매도 먹지 못하게 하시는 것인가요?         라고 원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와는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 항의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신뢰가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하와의 입장에서는 하나님께 더 이상 찾아갈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을 속인 분에게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습니까? 하와의 입장에서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했겠습니까? 하와는 불순종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켰고, 이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도록 주도적인 역할을 한 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와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나님을 떠난 하와를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 명한 실과를 먹은 것입니다. 하와의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의 올바른 신뢰, 하나님과의 관계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디론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 떠내려 간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우리의 인간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뢰가 깨지면 다 깨져버립니다. 보는 것도 바뀌고, 이해도 바뀝니다. 동일한 것을 봐도 전에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 이제는 더 큰 오해를 쌓아갑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피차 신뢰를 깨뜨리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모든 일에는 정당성과 명분이 있습니다. 하다 못해 사람을 죽이고 감옥에 가는 사람도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하와도 그렇고, 죄수도 그의 입장에서는 할 말이 있는 법입니다. 관계가 뒤틀어지고, 꼬이고, 엉기성키되어도 그 나름대로 할말은 다 있습니다. 하지만 본래의 자리에서 떠난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흘러 떠내려보낸 것입니다. 그곳은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복음의 자리를 굳게 붙들어야 하고, 은혜의 자리를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신뢰와 사랑의 자리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생각을 내려놓으십시오. 오히려 내가 바뀌어야 합니다. 내가 변하면 다 바뀔 수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본래 서 있던 자리를 떠났다는 것입니다.



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광야 40년 동안 그 율법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광야 1세대들이 그곳에서 다 죽었지만, 후손들이 광야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율법을 철저히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율법 없이 광야에서 지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안식일에 나가 만나를 주으려고 하다가 심판을 받지 않습니까? 철저한 삶의 규칙들이 그들을 살린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가나안에 들어가 보니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이제까지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우리를 지켜주신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는 다른 상황이라고 느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밟자마자 만나는 그쳤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농사를 지어서 먹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부득이 가나안 민족들에게서 농사짓는 법을 배워야했습니다. 그들과 접촉하면서 그들은 농사짓는 기술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문화도 받아들이고, 그들의 종교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의 문화와 종교는 그들의 삶의 상황과 너무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농사를 짓는데, 비가 오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방법을 모릅니다. 그런데 가나안 사람들에게 가서 보니 그럴 듯한 방법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꼭 그렇게 하면 비가 올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따라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어디서부터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서서히 흐러 떠내려간 것입니다.’ 삶의 필요 때문에 떠내려 갔고, 삶의 유지, 편의를 위해 그렇게 되었습니다.

2절을 다시 보면, 그들이 순종하지 않아 공정한 보응(심판)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순종하지 아니하다는 말은 ‘파라코에(      )’입니다. 이 말은 처음에는 ‘잘못 듣다’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불완전하게 듣는 것입니다. 청각 장애인이 무엇을 듣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다가 점차로 부주의하게 듣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로 쓰였습니다. 그래서 주의력 부족으로 오해하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듣지 않으려는 태도를 의미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고의적으로 귀를 막는다는 의미로 쓰여진 단어입니다.

즉 불순종한다는 말의 마지막 의미는 고의적으로 듣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고의적으로 듣지 않았고, 또 거부할 명분과 근거들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근거들은 대부분 대개 합리적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서 있는 자리가 그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와가 뱀의 말에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진다고 했는데, 하와는 진짜로 눈이 밝아졌습니다. 하와의 입장에서 하나님은 분명 거짓말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아니 차라리 주장하면 좋았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와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스스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눈은 밝아졌지만, 자신의 벌거벗음을 발견했고, 수치로 인해, 그 수치는 단지 벌거벗음으로 인한 육체적 수치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됨으로 인한 영적 수치심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내 생각을 멈출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눈에 보인다고 다 그게 진실은 아닙니다. 내 논리에 맞는다고 그것이 다 진리는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을 주장하고, 우리의 논리를 내세우다보면 공동체는 깨어지고, 결국 하나님을 등지게 됩니다. 진리에서 멀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더 크고 놀라운 진리, 구속의 은혜, 구원의 은총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시편 36장 7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운지요. 인생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나이다.” 주의 날개 그늘 아래가 어디입니까? 그것은 그분의 말씀, 그분의 진리, 그 말씀 아래 나를 놓는 것입니다. 그분 아래 거할 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와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경은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우리가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았을 때 그에게 하나님의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고 거절당하는 심판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에 순종하지 않고 가나안 사람들의 풍속을 쫓았을 때 그들은 이방인에게 압제를 당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우리가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같이 큰 구원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우리는 다 흘러 떠내려 간 자들입니다. 우리는 다 죄로 인해 오염된 생각과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전에 먼저 우리를 정죄하는 것입니다. 즉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죽음으로밖에는 구원의 길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놀라운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 이면에는 인간의 철저한 죄와 악함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선한 행위를 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기 죄를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지금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흘러 떠내려간 자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은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한정된 시각, 제한된 시야를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항상 주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겸손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더 낮아지고, 더 듣고자 하는 자세로 서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바른 자세입니다. 히브리 성도들이 자기 생각을 여전히 주장하고 있다면 그들은 주님께서 주시는 그 큰 구원의 은총을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겸손해져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말씀 앞에 낮아져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사는 길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3절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우리가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여기에 ‘이같이 큰 구원’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또한 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다시 말해서 소홀히 여기면 우리가 어찌 그 보응(심판)을 피하겠는가?”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구원의 문제를 보응, 즉 심판의 문제와 직결시킵니다. 우리의 구원은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이 아닙니다. 받으면 좋고, 안 받아도 크게 아쉬울 것이 없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구원이란 저주 받아 죽었던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임금의 무조건적인 탕감으 받음으로 빚으로부터 자유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은혜이면서 동시에 심판의 의미가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를 빚진 자가 그 빚을 탕감해 준다는 임금의 은혜를 어떤 이유에서든 받지 못한다면 그는 일만 달란트의 채무 관계가 지속되고, 그것은 그를 감옥으로 보내게 하거나, 목숨으로 바꿔야 할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죄와 허물로 저주를 받아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으로 구원받는 은혜를 받지만, 만약 어떤 이유에서든 그 은혜를 누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곧 그에게 저주가 되고,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심판은 이미 그 전에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속성 앞에서 우리는 다 심판의 대상이었고, 심판 받은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분의 사랑의 속성이 그분의 공의로운 속성을 넘어서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고,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죽게 하셨으며, 그것을 믿는 자마다 구원함에 이르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를 거부하는 것은 곧 그 자체가 심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양면입니다. 구원은 지극히 크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 은혜 앞에 나오도록 초청하셨습니다. 그것은 어떤 조건도 갖지 않습니다. 복음은 돈 없이 값없이 나와 구원의 은총을 누리라고 초청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하루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너무도 많은 자기 정당성이 있고, 그럴 수밖에는 없는, 합당한 이유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의 생각은 흘러 떠내려 간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내가 마땅히 서 있어야 할 자리에서 떠난 상태로 생각하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해야 합니다. 여기에 구원이 있습니다. 그것을 잃어버리면 상당한 보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니 이미 우리는 다 심판의 지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이같이 큰 구원’을 솔홀히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같이 큰 구원에 다 참여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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