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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는 누가 기록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문체는 매우 화려한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수신자는 히브리인들, 즉 유대인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 서신을 히브리서라고 부릅니다. 히브리서가 쓰여진 연대는 주후 70년 이전인데, 연대를 아는 것을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주후 70년에 예루살렘과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 멸망했기 때문입니다. 즉 히브리서가 주후 70년 이전에 쓰여졌다는 말은 이 서신이 쓰여질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서 여전히 성전 제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인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믿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믿음이 흔들리거나 심지어 배교의 위험한 상황까지 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주 풍부한 유대교의 믿음의 유산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요셉, 다니엘, 다윗, 솔로몬, 히스기야, 이사야, 예레미야 등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가나안으로 왔습니다. 가나안은 아브라함에게 외지였고, 타향이었습니다. 가나안이라는 타지로 온 것이 그의 믿음의 출발이었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 것입니다(창12:1).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그 길을 갔습니다. 그 약속을 바라보고 가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400년 동안 노예로 살던 자기 민족을 구원했습니다. 애굽에 살던 노예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하는 것이 기쁘긴 했지만, 그들 안에는 노예의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노예 생활은 그들에게 불편한 것이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매우 익숙한, 수 백년 이어오면서 몸에 밴 삶의 양식이기도 했었습니다.

믿음으란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바로 그렇게 익숙해진 자리를 떠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기 때문에 더 불편함을 감수하며 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약속이 그들에게 당장의 편안함을 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현재의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나그네가 되는 것은 나그네가 되는 것이고, 순례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본문의 배경을 살펴봅시다. 히브리인들은 역사 속에서 조상들이 물려준 종교적 유산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사, 절기, 율법, 할례, 성전 등입니다. 이 모든 구약적 신앙고백과 행위들은 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입니다. 구약의 신앙행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를 가리켰다는 말은 구약의 모든 율법과 제사, 할례, 절기, 성전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와 십자가의 구원 사건을 내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구역의 모든 말씀과 제도와 절기는 한 곳을 가리키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입니다. 그런 면에서 구약은 그림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삭을 제물로 받지 않으시고, 그 대신 어린 양을 준비하셔서 제사로 지내도록 하셨습니다. 양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양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입니다. 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사건을 들으면서 아브라함의 사건을 같이 떠올립니다. 유대인들은 이 분이 바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드려진 그 어린 양이었음을 깨닫습니다. 그 어린양이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는 일을 감당합니다. 모세이 출생할 당시 애굽은 바로의 명령에 의해 모든 남자 아이들을 다 죽이도록 명령하였습니다. 모세의 어머니는 모세를 숨겼습니다. 하지만 어린 모세의 목소리가 더 커지고, 울음 소리도 더 커져가자 그를 더 이상 집 안에 두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구니를 만들고, 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그 안에 역청으로 방수를 해서 모세를 그 안에 넣고 나일 강에 띄워버렸습니다.

모세는 아직 바구니 안에 있지만, 죽은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는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었으며, 그는 결국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의 공주에게 발견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그는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세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했습니다. 후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면서 이분이 모세가 보여준 바로 그 분이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무슨 의미인가? 예수 그리스도가 진짜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구약의 모든 사건과 종교의식은 예수 그리스도를 비추고, 그분에게서 만나게 됩니다.



이제 문제는 무엇입니까? 문제는 본래의 것이 드러났으므로 그것을 비추던 그림자는 물러가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 대신에 하나님께 양을 바쳤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율법을 따라 하나님께 양과 짐승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사하시는 의식입니다. 하지만 그 양이 상징하고, 비추고 있던 진짜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으므로 이제 더 이상 제사는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와 아브라함, 어린 양과 제사의식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이해하는 도구로 쓰입니다. 그러나 동물제사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성전도 필요 없고, 제사장도 필요 없었습니다. 신약성경은 우리 몸이 성전이고, 우리가 제사장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은 그 속죄 예식 그 자체를 통해 많은 감동과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주후 70년 이전 여전히 성전도 있었고, 제사장도 있었고, 성전 제사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향수에 젖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박해를 받으면서 더 심하게 유대교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신체적 공격, 집을 약탈 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맏고 심지어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지금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그 예식에서 그들은 뭔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것 같고 여전히 하나님은 거기 계신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더 혼란에 빠져있었습니다. 우리가 과연 이렇게 계속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 사실 모세도 귀하고, 아브라함도 믿음의 조상이고, 다윗도 우리과 같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뭐가 문제인가? 라고 질문하게 됩니다.

맞습니다. 모세도 귀하고, 아브라함도 믿음의 조상입니다. 다윗도 훌륭합니다. 이제까지는 그들을 보면서 하나님을 보려고 했고, 또 제사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구약적인 예식이 함께 갈 수는 없었습니다. 이 양자를 함께 놓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본래성은 사라져 버립니다. 이것은 참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은 히브리서의 서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선포합니다. 여덟 가지 정도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 주에 대표적으로 세 가지를 언급한다면, 1) 예수는 창조주이십니다.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2절).” 2) 예수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3절).” 3) 예수는 구속주이십니다.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3절하)”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제 간증을 나누기 원합니다. 목회를 시작하면서 누구나 그렇듯이 설레임과 기대감으로 꿈을 꾸며 시작했습니다. 나름 주를 위해 내 생명이라도 드리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주를 위해 순교라도 할 수 있으면 영광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처음부터 제 안에는 세속적 욕망, 야망 같은 것이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마음과 함께 섞여 들어가 있었습니다. 소명의식이 거짓은 아니었지만, 그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목사의 가운이 멋있어 보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감동적인 설교에 매료되었었을 지도 모릅니다.

순교라는 것은 어느 날 갑자가 ‘꽝’하고 죽으면 끝이지만, 죽는다는 것은 그렇게 쉽게 되지 않습니다. 그 전에 먼저 우리 앞에 다가오는 것들이 있습니다. 감정적인 상처, 육체적 탈진, 심리적 두려움, 관계의 깨어짐에 대한 불편함, 자기 정체성에 대한 혼란, 내가 과연 목사로 부름 받았는가?에 대한 의문들, 처음부터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 등입니다.

이런 혼란은 저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주님을 믿는다는 것이 옳은 일인가?” “과연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모든 손실과 대가를 치르면서도 붙잡을만한 분이신가?” 끊임없이 되돌아가고 싶고, 끊임없이 원점으로 되돌리고 싶은 충동르로 고통스러워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 시간들을 한동안 보낸 훈에 어느 순간인가부터 서서히 조금씩, 아주 조금씩 제 안에 어떤 보석같이 반짝반짝 빛나는 복음의 감격, 기쁨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고통들이 저(우리)로 하여금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도 그것만은 빼앗길 수 없을 때, 내가 이 땅에서 모든 것을 다 버려도 주님께서 주신 그 은혜가 너무 소중해서 그것을 붙들고 가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런 면에서 믿음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아주 소중한 보화를 발견하고 그것을 얻고 누리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3장 44절에서 이런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이 사람은 그 보화를 얻기 위해 자기 소유를 파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지혜로운 행동입니다.

히브리서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믿은 후 박해를 받는 과정에서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보화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계속 말씀합니다. 박해 중에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그 복음의 진수가 무엇일까? 그것을 지식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알고, 마음으로 느끼고, 삶으로 경험하고, 입으로 고백할 수 있다면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 일이겠습니까? 히브리서 말씀을 앞으로 계속 나누면서 이런 은혜가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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