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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땅에 매인 독수리
어떤 사람이 독수리 알 하나를 발견하여 자기 집 뒷마당의 병아리 부화장에 놓았습니다. 얼마 후 새끼독수리가 탄생되었습니다. 어린독수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병아리의 생활습관을 배우고 병아리의 습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늘의 야성을 잃어버리고 땅에 붙어사는 습성이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독수리는 땅에 사는 벌레와 곤충을 잡아먹었습니다. 단 한 번도 자신의 날개를 펴서 날아보려는 시도 없이 세월은 흘러갔습니다.  어느덧 늙은 독수리가 되었다. 어느 날 그 늙은 독수리는 창공 높이 날고 있는 멋진 새를 보았습니다. 그 늙은 독수리는 놀랍다는 듯이 쳐다 보면서, 선배 닭에게 "저게 누구지?" 하고 물었습니다. "그건 독수리, 새 중 왕이야"라고 친구가 대답했다. "저 새는 하늘에 속해 있고 우리는 땅에 속해 있는 닭이로구나" 하고 큰 독수리가 부러운 듯 말했습니다. 결국 독수리는 조그만 앞마당에서 평생을 돌아다니며 벌레나 잡아먹는  닭으로 살고 또한 닭으로 죽었습니다.  

경건의 모양만 있는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은 인생을 살 때 닭으로 살지 독수리로 살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늘에 속한 독수리의 본성과 능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독수리로 살고자 하는 이해와 능력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세상 안에서 갇혀 사는 불쌍한 닭 신세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의 가치관과 논리에 매여서 하나님이 주신 하늘의 본성과 능력을 풀어내지 못하며 살아갑니다. 디모데후서 3장 5절은 이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말합니다. 돌아서라는 말을 보십시오. 영어성경은 '피하라'는 뜻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껍데기 신앙을 가지고 아무런 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피하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빠질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날로 발전하는데 그 경건으로부터 아무런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마치 전염병처럼 교회를 무력화시킵니다. 경건의 능력이 없는 자가 아닙니다. 경건의 능력이 부족한 자가 아닙니다.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기독교를 하나의 의식이나 종교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기독교를 윤리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변화에 대한 어떤 기대감도 없이 신앙 생활하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면서도 기도의 능력을 믿지 않습니다. 예배드리면서도 예배에 대한 어떤 기대감도 능력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부르면서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어떤 은혜도 기대하지 않은 채 종교 안에 머무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사야 40장 31절을 보면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경건의 능력은 우리의 삶에 새로운 힘을 공급하는 거룩한 통로가 됩니다. 결코 땅의 문제들 때문에 주저앉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힘을 공급받는 순간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는 모든 문제들을 뛰어넘는 새로운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능력 있는 삶, 경건의 능력을 가지고 사는 삶에 대해서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본론

능력의 장애물 자아를 굴복시키라
경건의 능력을 방해하는 첫 번째 장애물은 내 자신 내 자아입니다. 세상의 논리는 자아를 신뢰하라고 말합니다. 자신을 믿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에서는 자아가 살아있는 사람, 자아를 신뢰하는 사람 결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자아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입니다. 자아가 죽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 안에 자아가 주인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인인 사람입니다. 자아와 예수님은 결코 동거할 수 없습니다.

   세례의 의미가 바로 그것입니다. 물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나의 옛 자아가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때의 옛 자아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삶의 근거와 의미와 목적과 능력을 찾으려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그리고 물에서 나오는 것은 죽음에서 다시 일어나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과 연합된 새 생명으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세의 인생
   성경에 쓰임 받은 사람 하나같이 자아가 죽은 사람들입니다. 자아가 살아있는 사람을 하나님이 사용하신 적이 없습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모세는 40세전까지는 자아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애굽의 왕궁에서 그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자아를 형성한 사람이었습니다.  고대세계에서 애굽의 학술, 특별히 왕자로서 받은 교육은 최고의 엘리트 자의식을 형성했습니다. 문무를 완벽하게 겸비한 사람이었습니다.  또 왕자로서 허랑방탕한 그런 사람 아니었습니다. 민족을 생각할 줄 알고 민족을 위하여 애굽의 왕자로서의 자리를 기꺼히 포기할 용의가 있는 신념의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에서 보면 엘리트 중에 엘리트입니다. 그런데 자아로 충만한 모세가 하나님을 위하여 나섰을 때의 결과는 2명을 살인한 것 밖에 없었습니다. 자아가 충만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올 자리가 없었습니다. 40세의 모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런 모세를 위하여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철저하게 자아를 죽이는 작업을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은 이렇게 소모적일 수 있습니까? 모세와 같은 엘리트를 어떻게 광야에서 무의미하게 썩게 만들 수 있습니까? 애굽의 왕자가 광야에서 양치면서 40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 강하던 자아가 철저하게 무너지는 것입니다. 철저한 자기 무력감과 한계에 직면합니다. 하나님이 언제야 나타납니까? 40년이 지난 80세 때야 호렙산 떨기나무에서 나타나십니다. 40년 동안 애굽의 왕궁에서 강화된 모세의 자아가 완전히 무너지기까지 광야에서 40년이 걸렸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세상실력 보고 사람 사용하지 않습니다. 40년을 기다려서라도 자아를 신뢰하지 않는 사람, 자아가 죽은 사람, 그래서 하나님만 의지할 수 있는 그런 사람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도 주시고 기다리게도 하시고 실패도 주시고 광야와 같은 상황도 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80세부터 120세까지 모세가 사역할 때 초기 40년동안 애굽의 왕궁에서 익혔던 지식과 훈련들의 그의 지도력을 가능하게 한 것 틀림없습니다. 모세오경을 쓸 수 있었던 이유도 초기 40년의 학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러나 광야 40년이 없었다면 그런 학문이나 인간의 능력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날마다 죽는 삶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을 얻기 원한다면 여러분의 자아를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으십시오. 날마다 죽는 연습보다  더 중요한 연습은 없습니다. 한글 번역 성경에서 절대 담아내지 못하는 표현들이 헬라어의 시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했을 때 과거시제 아닙니다. 현재완료시제입니다. 과거시제와 현재완료시제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과거시제는  단순히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쓸 때 사용합니다. 그런데 현재완료는 과거의 특정한 시간에 일어난 그 일이 현재까지 계속 영향을 미치고 때 사용합니다. 오늘 영어성경을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는 표현을 쓸 때 현재완료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날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것입니다. 늘 이순간 매일매일 날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내 자아가 달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의 자랑이 무엇입니까? 날마다 죽는 것을 자랑한다고 말합니다.  또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여기에서도 현재완료입니다. 고난이 올 때 어려움이 올 때 하나님께 불평 하지 마십시오. 자아를 죽이려는 하나님의 수술도구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자아의 욕망, 자아의 생각, 자아의 감정을 못 밖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있어야 그리스도의 능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감정대로 살지 마십시오. 자기연민이나 자기감정에 매여 있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자기 생각, 자기 이성으로 인생을 살지 마십시오. 그동안 여러분이 살아왔던 방식을 주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전의 방식들을 모두 내려놓으십시오. 여러분의 감정, 경험, 상식, 삶의 습관, 사람들의 조언, 세상의 판단을 모두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전혀 새로운 삶의 스타일을 배우십시오. 바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로마서 1장 16절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우리 안에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부활의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능력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지만 우리가 여전히 육체가운데 산다고 말합니다. 육체를 초월하여 열반의 경지에 들어가는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불교나 도교와 같은 신비종교는 인간이 모든 육체를 벗어버리고 공의 상태, 무감무욕의 상태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있을 수 도 없고 그러면 인간도 아닙니다. 자기는 모든 육체성을 벗어버렸다고 말하면 위선자이거나 정신이상자입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라고 말하고 30년을 면벽으로 도를 닦았던 성철스님도 죽을 때 제자들에게 “내 죄가 수미산과 같아서 무간지옥에 간다”며 마지막 말을 남기고 죽었다고 합니다.

육체가운데 사는 질그릇
   육체가운데 산다는 것은 여전히 육적인 세계와 육적인 본성을 가지고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우리의 체질이 바뀌지 않습니다. 갑자기 천사가 되지 않습니다. 원판불변의 법칙 아시죠? 인간의 원판은 절대 바뀌지 않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제 기질이나 약점 절대 잘 안 바뀝니다. 다만 무엇이 바뀝니까? 그런 원판이지만 내 능력을 의지하여 살 것인가? 내안에 계신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살 것인가의 문제만 다를 뿐입니다. 우리는 죽을 때 까지 육체의 본성과 연약함을 벗어버리지 못합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죽는 그날까지 염려를 완전히 벗어던지지 못할 것입니다. 욕심을 버리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미움 질투를 버리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의 유혹 속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여러분의 능력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합니다. 기독교는 결코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 종교가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인간의 열심과 노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목표를 제시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결코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입니다. 믿음은 내가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할 수 있습니다는 고백입니다.

성숙의 개념
  성숙이라는 개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기독교적 성숙은 내가 바뀌는 것 아닙니다. 믿음생활 하면 할수록 내가 더 탁월해지는 것 아닙니다. 인간은 한순간에 무너질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다윗보세요. 그렇게 아름다운 시편을 지어도 성의 유혹 앞에서 한 번에 무너지는 것이 인간입니다. 선줄로 알면 넘어질까 조심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연약성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의 은혜 없으면 한순간에 소멸되는 먼지와 같은 존재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보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배가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아무리 좋아도 질그릇이 보배 되는 법은 없습니다. 단지 질그릇이라고 단정합니다. 지금도 질그릇이고 앞으로도 질그릇이고 영원히 질그릇으로 남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한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질그릇입니까? 이제는 그냥 질그릇이 아니라 보배를 담은 질그릇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질그릇의 가치는 그 안에 무엇이 담겨있느냐에 결정되는 것입니다. 보배를 담았기 때문에 질그릇이지만 보배롭게 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신을 깨뜨려서 보배를 드러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풀어줍니다.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여전히 질그릇이지만 내 안에 계신 예수그리스도의 능력을 통해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새롭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능력으로 살면 우리는 질그릇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살면 우리는 보배롭게 살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은 보배이신 예수님의 능력을 내 삶에 끌어오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다이아몬드와 같은 인생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질그릇으로 살 것인가? 다이아몬드로 세상을 살 것 인가를 결정하며 사는 것입니다. 내 힘, 내 지혜, 내 생각으로 살면 질그릇으로 삽니다. 백발백중 박살납니다. 질그릇이 버티면 얼마나 버티겠습니까? 그러나 믿음으로 살면 그때부터 우리 안에 계신 다이몬드 같은 주님이 나를 위하여 역사하십니다. 결코 깨어지지 않습니다. 새 힘을 얻습니다. 능력이 나타납니다. 어떤 문제도 상황도 뛰어넘는 하늘의 능력이 부어집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4장 8-9절에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하나님께 있음을 아는 사람은 어떻게 삽니까?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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