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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성도가 부자들이 모이는 교회에 갔다가 쫓겨났다는 흔한 예화가 있습니다. 예화가 생기면 이러저러한 방향으로 편집되고 바뀌게 되는데, 흔히 그가 가려고 했던 교회는 백인교회였고, 쫓겨난 성도는 흑인이었다는 식으로 바뀝니다. 이런 일들은 실제로 미국 교회의 역사 속에 간간히 일어난 일이기도 합니다. 교회에서 쫓겨난 흑인 성도가 밖에서 슬픈 마음으로 울고 있는데, 한 사람이 나타나서 그의 어깨를 만지며 위로합니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나도 저 교회에서 쫓겨났단다.’ 그렇게 말하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예수님도 쫓겨났다는 말에 얼마나 감동을 받습니까? ‘그래! 예수님은 내 편이야.’라고 생각하며 힘을 얻습니다.

오늘날 이런 예화를 다시 듣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성도님들은 어떤 생각을 들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제 마음에 얼른 드는 생각은 그 사람은 왜 굳이 백인 교회를 가려고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냥 자기가 쉽게 갈 수 있는 교회를 가지!’ ‘그러면 쫓겨날 이유도 없었고, 편안한 마음으로 찬송하며 예배를 드릴 수 있었을텐데…’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이런 생각이 바로 우리 믿음의 자화상이라는 생각이 다시 들었습니다. 왜 굳이 흑인이 백인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려고 했냐는 생각이 우리의 현주소를 드러냅니다. 요즘이야 인종차별에 대해 엄격히 금지하니까 문제가 덜하고, 또 아무래도 그 시대보다는 많이 없어진 것이 사실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런 일들은 얼마든지 일어났을 것이고, 오늘날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굳이 그렇게 고집을 피우면서 그런 교회를 가려고 한 것 자체가 무리라는 생각을 하는 것도 타당성이 있어 보입니다. 물론 그 시대에는 갈 교회가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면서 오늘 우리들 마음 속에 있는 편견을 발견합니다. 그냥 편하게 같은 사람들끼리 유유상종하여 예배를 드리면 그들을 정죄할 필요도 없고,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옳은 것은 아닙니다.


초대교회

초대교회는 이와 같은 갈등을 극복한 교회였습니다. 물론 그들에게도 계층간의 갈등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찬식을 할 때 그들은 먼저 온 사람들이 마련해 놓은 성찬식 떡과 음료를 먼저 먹음으로 나중에 오는 사람들이 제대로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식사를 대신할만큼 많은 떡을 준비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요기를 할만큼의 떡을 떼면서 성찬식을 거행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찍 오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묵상하면서 먼저 먹었는데, 너무 많이 먹어서 나중 오는 사람들이 참여하지 못하는 사례가 생긴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생겼는데, 나중에 오는 사람들은 주로 노예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집에서 주인이 밤 늦게까지 자기 할 일을 모두 한 후에서야 올 수 있었기 때문에 항상 늦게 교회에 도착할 수밖에 없었고, 이런 일은 점차 신분의 차별, 빈부의 차별이 생길 수 있는 요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초대교회는 계층간의 차별, 신분의 차별을 극복한 공동체였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그들은 실제로 주인과 종이 함께 한 자리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인에게서 도망 나온 오네시모를 그 주인에게 돌려보내면서 그를 종과 같이 대하지 말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대하라고 권면합니다(몬16).

사도 바울을 비롯해서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노예를 해방해야 한다는 둥 어떤 신분 혁명을 외치지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신분을 그대로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아주 강한 아교처럼 교회 공동체가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신분 혁명보다 더 강력한 힘을 지녔습니다. 그들은 함께 모여 하나님을 찬양했고, 동일한 말씀을 들었고, 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그분의 자녀임을 고백했고, 함께 신앙 간증을 나누며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행하신 일들을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 첫 오순절에 성령의 역사를 따라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는데,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 즉 각기 자기 나라 말을 하는 사람들이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사도들의 복음 선포를 각기 자기 나라 말로 알아듣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초대교회에 일어난 아주 특별한 역사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성령 안에서 언어가 통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들 안에 뜻이 통하고 마음이 통했음을 보여줍니다. 말이 통했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매우 다양한 집단이 모여서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가 되어 복음의 능력을 갖게 된 가장 결정적인 요인 중에 하나였습니다.


오늘의 교회

오늘의 교회는 가장 발전된 사상과 민주적 정치 질서 속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피조물임을 고백합니다. 굳이 교회를 나가지 않는 사람들은 생명의 소중함을 인정합니다. 모든 사람은 동일한 천부적 인권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임을 인정합니다. 우리는 모일 때마다 우리 하나님을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오늘의 교회는 과연 공평합니까? 오늘의 교회는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고 있습니까? 누가 언제 어떻게 우리교회에 들어와도 우리교회는 그들을 기꺼이 정중하게 하나님께서 그분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천하보다 더 소중한 생명으로 반갑고 기쁘게 맞이합니까?

오늘의 교회는 계층 간의 소통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어느 교회든 대부분 그렇습니다. 신분과 학력, 직업과 관심사에 따라 생각과 언어와 가치관이 다릅니다. 그래서 불편합니다. 서로 다른 사람과 만나는 것도 불편하고, 한 두 마디 하다 보면 할 말을 찾지 못합니다.

초대교회는 신분의 차이가 뚜렷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 그들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 차별이 없었고, 종과 주인의 구분이 없었으며,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그 반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어떤 교회는 아예 자기 교회에서 전도할 대상자의 부류를 정해놓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정해 놓은 자기 교회에 주로 전도되어 올 사람의 분류를 소개합니다. 그들은 주로 교육 수준이 높고, 자신의 직업을 좋아하고, 자신의 가족의 건강과 신체 관리에 우선순위를 두고, 조직화된 종교를 싫어합니다. 그들은 또한 현대 음악을 좋아하고 자기 만족에 빠져 잘난 체하는 편이고, 정장보다는 편안하고 격식 없는 복장을 선호한다고 정의내려 놓았습니다.

물론 그것을 무조건 나쁘게만 볼 일은 아닙니다. 이것은 어쩌면 그들이 그 지역 주민들을 조사하고 그들이 주로 가지고 있는 취향을 조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면에서는 그들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다가가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모습에서 우리는 오늘의 시대가 겪고 있는 세대간, 신분간, 계층간에 뛰어넘을 수 없는 소통의 문제를 그대로 인정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 이것이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이며, 종과 주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며, 남자와 여자가 하나라고 말씀하신 성경에서 정의내린 교회와 같은 모습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도 가끔 이런 논의를 심각하게 하곤 합니다. ‘서로 좀 섞여 보자.’ ‘물론 지금도 좋지만, 좀 더 섞여 보면 어떻겠느나?’ 그래서 올 가을에는 구역을 완전히 섞어서 조직을 해 보자고 결정해 놓은 상태입니다. 하지만 나름대로 고충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직업이 다르고, 하는 일이 다른 경우는 한 두 마디 하고 나면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관심사도 모르겠고, 또 내가 무슨 말을 잘못해서 상대방이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간에 할 말이 좀 있어야 합니다. 만나면 재미있게, 언제나 반갑게 이야기할 수 있는 소재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 그들을 하나로 묶어 주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화평함과 거룩함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 줍니다. 과연 초대교회가 그렇게 서로 다른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하나로 묶어 주었던 것이 무엇입니까? 14절에 보면, 화평함과 거룩함에 대해 말씀합니다. 화평은 횡적인 인간 관계를 말하고, 거룩함은 하나님 앞에서의 종적인 관계에서 정결함, 깨끗함, 온전함을 의미합니다. 본문은 이 둘을 하나로 묶어서 말씀합니다.

즉 초대교회가 횡적인 관계에서 노예와 주인이,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하나로 묶어질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안에 화평함과 거룩함을 함께 이루어갔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한다면 그들이 횡적으로 하나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삶을 추구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성숙한 초대교회의 공동체처럼 세워지려면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본문은 이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에서에 대해 말씀합니다. 에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잘 아십니다. 에서는 야곱과 함께 쌍둥이로 태어났지만, 에서가 이삭의 장자였습니다. 한 번은 에서가 밖에서 사냥을 하고 돌아왔는데, 마침 시장기를 많이 느끼고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그가 허기졌다고 말씀합니다. 아마도 많이 배가 고팠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때 마침 야곱이 집에서 죽을 쑤고 있었습니다. 에서가 배가 고프니 죽을 한 그릇 달라고 하자 마침 야곱은 형의 장자의 권리를 나에게 주면 내가 죽을 형에게 주겠노라고 제안을 했습니다. 허기진 에서는 장자의 권한이 뭐 그리 중요하겠냐고 생각했습니다. ‘그래. 내 장자권은 네가 가져라’하고 주어 버리고, 그야말로 말로만 주었다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고 팥죽 한 그릇을 얻어 먹었습니다.

그래서 16-17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에서에게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본문의 맥락에서 에서의 문제는 삶의 이슈들과 신앙적 이슈들이 분리된 채 그의 삶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합니다. 에서에게 있어서 삶의 이슈는 배가 고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적 이슈는 장자의 명분에 대한 문제입니다. 즉 그는 삶의 문제, 즉 배고픔의 문제를 겪었을 땐,         신앙의 이슈, 즉 하나님께서 자기 아버지를 통해 주시는 장자의 명분을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에서가 믿음이 없었을까요? 그가 아예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후에 동생이 자기의 장자권과 축복권을 다 가로챈 것을 알고는 분노해서 동생을 죽이려고까지 했었습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무가치하게 여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배고픔이라는 삶의 문제에 부딪혔을 때 그에게 장자의 명분이라는 신앙의 문제를 뒤로 제껴놓았습니다.

본문 17절에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축복을 받고 싶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간구했습니다. 아버지 앞에서 나를 위하여 빌어줄 복이 남아 있지 않으냐고 소리 높여 울면서 간구했습니다(창27:35-38). 하지만 에서는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축복의 기도를 받지 못했습니다.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에서에게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삶의 이슈가 신앙의 이슈들과 함께 가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삶의 이슈들을 위해 신앙의 이슈를 언제나 뒤로 미루어 놓았습니다.

믿음이란 삶의 이슈가 신앙적 이슈들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믿음 따로 생활 따로가 아닙니다. 믿음과 삶은 언제나 함께 가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삶의 이슈들이 신앙의 이슈들과 함께 묵상되지 않습니다. 내가 어떻게 세상에서 성공적으로 잘 살 수 있을까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믿음으로 살 수 있을까가 별개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왜 오늘날 교회에서 우리가 말이 안 통하는 것을 경험합니까? 직업이 다르기 때문일까요? 삶의 배경이 다르기 때문일까요? 배움이 다르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 어떤 것도 이유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믿음으로 삶을 고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그런 일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교회 생활에 열심인 학생이 시험 기간이 되면 주님 앞에 예배드리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식의 진학을 위해 자녀의 신앙 지도를 소홀히 하거나 아니면 아예 진학 뒤로 미루어버립니다. 교회는 언제든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장래를 위해 믿음의 이슈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며칠 전 제 아이가 고민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 친구들은 이미 SAT를 다 끝내놓고 다른 준비를 하는데, 자기는 아직도 여전히 SAT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 힘들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고민이 신앙적 고민입니까? 아니면 학업에 대한 고민입니까? 저는 그의 질문을 듣는 순간 이것은 학업의 문제이기 전에 신앙적 고민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문제입니다. 자기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세우는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문제를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나오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신앙 따로, 삶의 문제 따로가 아닙니다. 이 둘은 항상 같이 가는 것입니다. 이 둘 사이의 간격이 생겨서 서로 만나지 못하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그것을 머리 좋게 믿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원도 받고, 세상에서 누릴 것도 누린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도 성공하고, 예수도 믿겠다는 것입니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이 없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성경을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신앙과 삶을 분명 분리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 안에서 삶의 이슈들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난 후에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합니다. 삶의 급한 불을 끄고 난 후 기도하려고 하고, 삶의 복잡한 일을 해결하고 난 후 성경공부도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학교의 어려운 시험을 끝내 놓고 믿음 생활을 잘 해 보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에서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일단 배가 고프니 팥죽 한 그릇을 얻어 먹고 난 후 나중에 장자권을 생각해 보겠다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본문에 뭐라고 말씀합니까?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회복할 수 없었습니다.

현재 내 삶의 문제가 주님 앞에서 해결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문제들, 삶의 이슈들이 주님과 상관 없이 해결하고 난 후에 그 때 돌아와서 신앙적 이슈들에 관심을 가진다면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삶의 문제가 해결된 것도 아니며, 설령 해결되었다고 해도 다시 문제에 부딪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에서가 팥죽 한 그릇을 얻어 먹고 배고픔은 이겼지만, 결국 다시 장자의 권한 문제를 부딪칠 수밖에 없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처음 문제로 돌아가 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즉 본문의 표현대로 한다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서로 서로 대하기 어색하고, 만나도 할 말이 없고, 그래서 마음 맞는 사람을 찾아다닐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니 이도저도 만날 수 없는 사람은 결국 소외될 수밖에 없는 교회가 되는 것,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거룩함을 좇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의 이슈들을 주님께 가지고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삶의 문제가 믿음의 문제로 해석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의 고민, 나의 아픔, 나의 과제를 가지고 주님께로 가지고 가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로 우리의 삶의 문제를 가지고 나간다면 우리는 그분 안에서 함께 만날 수 있습니다. 말이 통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통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문제는 신분의 문제도 아니고, 빈부의 문제도 아니고, 지식의 문제도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진실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부부간에도 동일한 원리이며, 부모 자식 간에도 동일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모든 문제를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 되고, 말이 통하고, 마음이 통하는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 은혜를 누리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힘써야 하겠습니까?

1. 말씀을 매일 묵상하셔야 합니다.
매일 일정한 말씀을 보면서 그 말씀을 통해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듣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말씀 안에서 내 삶을 조명하고 해석하고 이해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2. 매일 기도하셔야 합니다.
일정한 시간 정해놓고 기도하십시오. 기도를 통해 자신의 문제를 소상히 주님께 말씀하십시오. 그리고 주님께서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깊이 들으십시오. 물론 그런 들음은 보통 자기 생각을 통해 오지만, 그리고 그런 것들은 처음에 대개 자기 욕심, 자기 생각일뿐일 수 있지만, 그런 시간을 오래 가짐으로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나 계획이 아닌 주님의 음성, 주님의 뜻을 분별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3. 다른 사람과 함께 삶을 나누십시오.
때로는 그냥 삶의 이야기를 할 수도 있고, 때로는 기도를 요청하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서로 서로 삶을 나누는 일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렇게 삶을 나누면서 다른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과 우리 자신에게 동일한 방법으로 역사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나눔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더 풍성하게 누리게 합니다.

아마도 7월 말이나 8월 초에 남전도회에서 버지니아 비치로 야유회(밤 낚시)를 간다고 합니다. 밤 낚시를 하러 간다고 하지만, 저는 그것이 다만 낚시를 위해서만 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고 가는 중에 대화를 하기도 하고, 신앙적 대화를 통해 서로 격려하는 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성도 간의 교제는 우리의 삶을 더욱 유익하게 합니다. 이런 은혜가 삶을 통해 누리고, 우리교회가 더욱 믿음으로 하나 되어 정말 말이 통하는 교회, 마음이 통하는 교회, 은혜를 함께 나누는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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