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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란 무엇인가?  

신앙이란 단순히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란 영적인 전투입니다. 자신과의 싸움이고, 불의에 대한 진리의 싸움입니다. 진리를 거스리는 세상에서 세상의 흐름을 따라 살지 않고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기로 작정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리고 가고 있을 때 신앙은 그 반대방향으로, 즉 진리를 좇아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나는 믿음으로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믿음의 삶을 살다보면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며 또 우리 속에도 그렇게 살려고 하는 아주 강력한 지향성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신앙은 결국 자기 부인입니다. 세상을 부정하는 것이기 전에 자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고 싶은 것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좇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서 우리 속에 흐르고 있는 세속성을 벗어나서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려고 몸부림친다면,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려고 힘쓴다면 우리는 주일예배만 드려서는 심히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배를 많이 드리는 것이 신앙은 아니지만, 정말 몸부림치는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좀 더 예배에 충실해야 하고, 예배 가운데 임재하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이 말씀은 우리의 믿음이 어떤 것인지, 또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히브리 성도들은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으면서 손해를 보기도 했고, 때로는 불쾌한 대우를 받기도 했으며, 어떤 경우는 매우 견디기 힘든 상황을 경험하기도 했었습니다. 나름대로 아주 심각한 상황까지 갔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믿음의 길을 계속 가야하는지 아니면 잘못 온 것인지를 고민하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아직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피흘리기까지 악과 싸우는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믿음은 진리의 편에 서는 것을 말합니다.

히브리 성도들은 지금 예수를 믿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있는데, 이점을 이해할 수 없어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잘 돼야 되지 않겠습니까? 성경은 수없이 믿음으로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형통한 길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는데, 왜 우리는 예수를 믿은 후 계속해서 어려움을 당해야 하냐고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에게 어떻게 말해야 했겠습니까? ‘조금만 참으십시오. 조금만 인내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들에게 놀라운 은혜와 복을 주실 것입니다’ 라고 해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그렇게 말하지 않고,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는 아직 부족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징계하시는 하나님 – 징계는 사랑의 증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본문은 징계를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합니다. 징계를 하나님께서 너희를 사랑하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6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십니다. 일단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으면 그를 혹독하게 훈련하셔서 당신의 자녀답게 만들어가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를 징계하시는 당위성을 설명합니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7-8절)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느냐?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아들과 같이 대우하시기 때문에 징계를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징계를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느냐? 만약 아들이라고 하면서 징계가 없다면 그는 사생자임에 틀림없고, 분명코 친아들이 아닐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으면서 그분의 자녀들이 낙심하는 것입니다. 분명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인 증거임에도 불구하고 그 징계 앞에서 절망하고 넘어집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히브리 성도들에게 이미 주신 구약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구약 잠언 3장 11-12절에서 말씀하기를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고 하셨습니다.



1. 징계는 자녀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절망하지 않으려면 하나님께서 성도가 당신의 자녀이기 때문에 징계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이해하는 것 같은데, 막상 삶의 현장에서는 그 말씀을 잊어버립니다.

말씀은 한없이 우리를 책망하고 징계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꿰뚫는 예리한 칼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그렇습니다. 말씀은 우리의 숨은 생각까지도 파헤쳐 들어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 우리는 한없이 우리의 약함을 드러내게 됩니다.

우리는 대부분 예수를 믿기 전 세상에서는 그렇게 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에서는 그렇게 부족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예수를 믿은 후 그분께 가까이 더 다가가려고 하는데, 왠지 내 안에 있는 내 모습이 초라해보이고, 약해져 가는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자신의 모습으로 인해 힘들어합니다. 그것은 빛 되신 주님 앞에 나갈 때 필연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런 우리의 죄에 대한 발견이 바로 우리를 다만 부끄럽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주님의 역사, 그렇게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들추시는 의도는 우리를 단지 부끄럽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만이 구원의 길이며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신 그 놀라운 역사의 의도가 바로 당신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5장 11-32절에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비유에 보면,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 중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을 받아 밖에 나가 허랑방탕하여 다 쓰고 난 후에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본문은 결코 그렇게 허랑방탕한 아들의 행위를 옹호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본문 중에 보면(18절) 둘째 아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여기서 그는 자신의 죄를 보고, 아버지께로 가기로 결단합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것이 중요합니다. 아버지께로 가는 것입니다. 그가 이 시점에서 바르게 알았던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께 가면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약함과 악함, 아버지께 죄를 지었음을 알았지만, 그는 그것이 아버지께 내침의 요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았던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자신을 받아주실 것임을 그는 알았습니다.

여기서 그는 자신에 대해 절망하지만, 아버지를 향해서는 소망을 갖습니다. 아버지는 부요하시고, 아버지는 넉넉하십니다. 아버지께로 가면 됩니다. 그는 그점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히브리 성도들은 반대로 반응합니다. 환난과 핍박, 주님의 징계가 있을 때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격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은 아들이 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아버지께로 가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것만이 그가 살 길입니다. 우리의 죄를 발견하면서, 아버지의 징계를 받으면서 우리는 그 자리에서 절망의 심음으로 빠져들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히브리서가 계속해서 권고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교회가 심리학의 영향, 처세술의 영향을 받아서 자꾸 자기를 격려하려고 합니다. 우리 안에 잠재적 능력이 많다고 부추깁니다. 우리가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면 잘 될 것이라고 속삭입니다. 용기를 가지라고 격려합니다. 이것은 아주 비슷하지만, 그런 생각으로는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없고, 그분이 주시는 참된 구원의 길, 회복과 은혜의 길, 능력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 둘 사이는 너무도 다른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무너지게 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주의 징계를 받을 때 그분으로부터 멀어질 것이 아니라 그분께로 더 달려가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4).”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습니다. 우리의 약함과 절망, 우리로서는 일어설 수 없는 모든 것을 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산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산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나야 합니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로 인한 소망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이런 은혜가 풍성하기를 축원합니다.


2. 징계는 더 귀한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징계의 목적은 자녀에게 더 귀한 것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징계를 통해 먼저 우리 손에 들려 있는 것을 내려놓게 하십니다. 그래야만 주님께서 주시는 더 귀한 것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때 대부분 자기 기대가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계획이 있고, 꿈이 있습니다. 징계는 이런 우리의 꿈을 내려 놓게 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꿈이 우리의 인생을 복되게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나 남태평양의 밀림이 우거진 섬에서 흔히 원숭이를 잡는 방법이 있습니다. 원숭이는 동작도 빠르고, 머리도 좋기 때문에 쉽게 잡히지 않지만, 원숭이를 잡기 위한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입구를 원숭이 손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작게 만든 자루 안에 원숭이가 좋아하는 과일 하나를 넣어놓습니다. 그러면 원숭이가 냄새를 맡고 와서 손을 자루에 넣어 과일을 꺼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손을 꺼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손을 넣을 때는 빈손이었지만 꺼낼 때는 손에 과일이 쥐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 지키고 있던 사람들이 고함을 지르면서 뛰어가면 당황한 원숭이가 손에 쥐고 있는 과일도 놓지 못하고, 발버둥을 치다가 잡힌다는 것입니다.

욕심이 생명을 잃게 하는 것입니다. 작은 것을 놓지 못해서 더 크고 소중한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작은 욕심은 더 큰 것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원숭이가 뭐가 부족합니까? 뜀을 못뜁니까? 머리가 나쁩니까? 그런데 그의 마음에 있는 욕심, 탐욕이 그로 하여금 뛰지도 못하게 하고, 머리도 쓰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가 왜 말씀을 보면서도 마음의 눌림을 경험합니까?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왜 낙심합니까? 우리 안에 내려놓아야 할 것을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놓으라고 말씀합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더 크고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꾸지람은 우리에게 더 귀한 것을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놓지 않으면 죽는다고 선포합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정말 손을 놓아야 합니다. 놓지 않으면 정말 죽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손을 놓지 못합니다. 세상의 온갖 것에 대한 욕심과 탐욕으로 마음을 채워버립니다.

그것을 기도제목을 삼고 결사적으로 붙들고 있습니다.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이미 우리는 답을 정해놓고 나아갑니다. 이것 아니면 안 된다고 하고 붙듭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이 과일 하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함정에 빠져 있는줄도 모르는 원숭이처럼 미련하게 그 앞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른채 믿음이라고 하는 허울만 지니고 삶을 지속합니다.

주님은 우리 손에 쥐어져 있는 그것을 주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주시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그보다 더 귀하고 소중한 것을 주시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시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의 마음에 이미 자리해 있는 그것을 얻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외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우리가 손으로 잡고 있는 그것을 놓게 하시려고 사정없이 우리를 징계하시기도 합니다. 때로는 인정사정 없이 책망하십니다. 우리가 손으로 쥐고 있는 것을 내려놓을 때까지 책망하십니다. 이것은 분명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매가 우리를 향해 날아옵니다. 너무 아파서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두손두발 다 들고 나니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을 놓아야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존재입니다. 우리가 그만큼 미련한 존재입니다.

가능성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잠재된 능력을 보고 소망을 가질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고민하고 하나님을 신앙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가능성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고백하며 징계하시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잘 믿고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앙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시는지 깊이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언제나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각 속에 갇혀 살게 됩니다. 험한 역경을 지나가는 그리스도인은 우리를 시험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능력을 뛰어넘는 시험을 허락하지 않으시며 우리가 제아무리 심각한 역경을 당한다 해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풍성한 은혜를 주실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진심으로 믿고, 전적으로 그분을 신뢰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가 그분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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