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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년 영국 런던의 한 옷 가게에서 일하던 한 점원이었던 George Williams라는 사람이 큐티를 하다가 고린도전서 15장 2절의 말씀에 붙들렸습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그는 이 말씀에 붙들려 주말마다 기도 모임을 시작했고, 그 모임이 YMCA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말씀은 곧 사건이고,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빛이 생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해와 달과 별들이 만들어졌으며, 바다의 고기와 하늘의 새들이 날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선포될 때 사람들이 변화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 37절에는 사도 베드로가 설교를 끝냈을 때 사람들은 마음의 찔림을 받으며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자기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았습니다. 초대 교회는 그로 인해 엄청나게 자라갔고, 그로부터 세상을 바꿔가기 시작했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옷 가게 점원을 통해 일하신 하나님을 봅니다. 그에게 어떻게 그런 놀라운 힘이 있었겠습니까? 그가 무슨 힘으로 세상에 그토록 놀라운 영향력을 주었던 YMCA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그의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일하신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을 때,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믿을 때 하나님께서 일하신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 그는 어부였고, 지식이 많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그들이 복음을 담대히 전할 때 그들을 잡으러 다니던 유대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이 그를 보고 놀랐습니다. 사도행전 4장 13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말씀의 능력입니다. 말씀을 믿고 신뢰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일하셨습니다. 모세도 그랬고, 다윗도 그랬습니다. 아브라함과 그랬고, 이삭도 그랬으며, 아벨과 노아,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런 믿음이 그들을 홍수에서 구원했고, 골리앗으로부터 구원했고, 애굽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할 능력을 갖게 했습니다. 이런 은혜가 오늘 우리들에게도 있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단 두 절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첫 성인 여리고 성을 점령하는 사건에 대한 말씀입니다. 배경이 되는 말씀은 여호수아 1장부터 6장까지의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역사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견고한 성(진)을 무너뜨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예리한 분별력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1.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믿을 때 견고한 진을 무너뜨립니다.

즉 주님의 말씀을 믿을 때 주님은 우리의 장애물을 무너뜨리십니다. 3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여리고 성은 당시 가나안에 있던 성들 중에 대표적으로 견고한 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자 마자 제일 먼저 여리고 성을 만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실 오합지졸의 병사들입니다. 그들은 제대로 된 군사 교육을 받은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전쟁의 경험도 별로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여호수아 6장을 보면,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먼저 나가고, 백성들은 그 뒤를 따라며 군사들은 맨 앞과 뒤에 서서 여리고 성을 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말씀에 순종했을 때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오늘 본문은 저희가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믿었을 때 승리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본문은 아주 단순하게 설명합니다. 그들이 여호수아의 명령을 따라 그대로 했더니 성이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끝입니다. 더 이상 없습니다. 물론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배경을 전제로 한 말씀이긴 합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이 말씀은 너무 단순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이렇게 단순하게 믿을 수 있다면 우리에게도 동일한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이 단순한 믿음이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단순하게 믿기까지는 여러 가지 유혹과 어려움이 우리에게 일어납니다.


첫째는 되돌아가고 싶은 유혹입니다.

여리고 성은 가나안에서 가장 견고한 성읍 중 하나라고 했습니다. 신명기 1장 28절에 보면 광야에서 열 두 명의 정탐꾼들을 가나안 땅에 보냈을 때 그들이 와서 그들의 성읍들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어느 정도 과장이 섞인 것이지만, 실제로 그들의 성읍은 견고했고 높았습니다.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여리고 성은 4-5m의 옹벽이 있었고, 그 위에 다시 폭이 2m, 높이가 6-8m 정도의 진흙 벽돌로 된 성벽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밖에서 볼 때 성벽의 높이는 약 10-13m 정도였습니다.

생각만 해도 그 성벽의 높이에 기가 질릴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얼마 전 요단 강을 건너왔습니다. 당시 요단강은 곡식을 거두는 시기로서, 항상 물이 항상 언덕에 넘쳤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앞에는 높이 솟은 여리고 성벽이 있었고, 뒤에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요단강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쯤 되면 사람들은 대부분 한 번쯤 뒤를 돌아봅니다. ‘잘못 온 것 같다.’ ‘아마도 우리가 잘못 판단한 것 같지?’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에 대한 단순하고도 순전한 믿음은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아니 뒤를 돌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앞으로밖에는 갈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오직 주님만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을 때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처음 애굽에서 나왔을 때, 그래서 홍해 앞에 이르렀는데, 애굽의 군사들이 쫓아왔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마구 원망을 했습니다. “우리가 애굽으로 돌아가서 그들을 섬길 것이라.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출14:12).  돌아갈 수 없는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뒤를 돌아봅니다.

민수기 13-14장을 보면,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열 두 명의 정탐꾼을 보내서 정탐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돌아와서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백성들이 다시 원망하며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믿음의 길에 뒷문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가는 길은 오직 앞 길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믿고 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렇게 갈 때 우리는 비로소 단순한 믿음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본문의 말씀,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하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뒷문이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젊은 남녀가 서로 사랑해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살면 살수록 잘못 만난 것 같습니다. 기도를 잘못한 것 같고, 계시를 잘못 받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의 음성을 잘못 들었든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잘못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 생각을 한 두 번쯤은 해 보셨습니까? 아니면 앞으로 혹 그런 생각을 할 기회가 있을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의 삶에는 뒷 문이 없습니다. 혹 마음으로라도 딴 생각을 하셨던 적이 있으면 얼른 회개하십시오. 성도는 항상 현재로부터 출발합니다. 과거를 후회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도 다스리시고, 현재도 미래에도 함께 하시지만, 그런 식으로 과거로 돌아가게 하지는 않습니다.


둘째, 단순한 믿음을 갖는 것은 인내를 요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성을 7일 동안 돌았습니다. 매일 하루에 한 바퀴씩, 그리고 마지막 일곱째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았습니다. 이 부분은 참 놀라운 면이 있습니다. 사실 이런 성을 점령하려면 상당한 기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보통 성 안에는 전쟁을 대비해서 군량미를 땅 속에 숨겨 놓습니다. 성 주변에 살던 사람들도 다 성 안으로 들어와서 전투에 참가해야 하기 때문에 오랜 시간 전투를 하다 보면 군량미가 결국 다 없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고고학자들이 여리고 성을 조사한 바에 의하면 성 안에 불에 의해서 파괴된 곡물로 가득한 많은 저장 항아리들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것은 고고학적으로 매우 특별한 발견인데, 그 이유는 곡물은 보통 상품으로 교환가치도 있기 때문에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모두 정복자들에 의해서 약탈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성은 두 가지 중 하나였어야 합니다. 오랜 전쟁으로 곡물이 없든지, 아니면 곡물이 있었다면 약탈되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여리고 성은 곡물이 남아 있었을만큼 짧은 전쟁으로 점령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탈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리고 성이 성경의 방법대로 점령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오늘 여리고 성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다른 면을 보고자 합니다. 여리고 성을 일주일동안 하루에 한 바퀴씩,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을 도는 횟수에 큰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도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엄청 높이 솟은 성벽 주위를 도는 것은 위압감을 느낄 수도 있고, 두려움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더욱이 한 바퀴 돌고, 두 바퀴 돌고, 그러면서 여리고 성벽의 돌들이 하나씩 둘씩 빠지고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마지막 날 마지막 일곱째 바퀴를 돌 때까지 그대로 있었습니다. 즉 그들은 마지막 일곱째날 일곱째 바퀴를 돌 때까지 단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명령만을 의지하고 돌아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데는 인내가 필요했습니다. 단순한 믿음은 그냥 믿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성도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끝까지 그 말씀만을 믿고 가는 것입니다. 다른 계산도, 다른 가정도 하지 않습니다. 만약 이것이 무너지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동안은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고, 특이한 징조가 일어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동안은 찬송을 하면서 소리를 치면서 축제를 할만한 기쁨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숨죽이고 조용히 그 일을 끝까지 추진해야만 했습니다.


어느 성도님이 우리교회가 그동안 참 많이 변하고 성장했다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공감하고 감사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교회 성도님들이 그동안 이런 마음으로 오늘까지 왔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주의 말씀만 붙드는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어떤 획기적인 변화나 이벤트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 결과 오늘의 교회를 이뤄가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그런 시기가 있습니다. 오직 주님의 약속 한 말씀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잡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어둠의 터널을 지나가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그 시간이 오히려 하나님의 더 크고 놀라운 역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단순한 말씀,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라는 말씀은 바로 이런 믿음이었습니다. 되돌아가고 싶은 뒷 문을 차단하고, 인내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기다리고 가는 믿음이었습니다. 이런 단순한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뒤를 돌아보지 마십시오. 그리고 여리고 성에 아무런 변화가 없어도 칠 일 동안 오직 말씀만을 붙들고 도십시오. 그래서 참된 믿음의 승리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2.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믿을 때 우리에게는 예리한 분별력을 갖게 됩니다.

31절 말씀은 여리고 성 점령에 관련된 기생 라합에 대한 말씀입니다. 세상에서도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것은 매우 큰 힘을 갖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날 일을 5분 전에만 알 수 있어도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Warren Edward Buffet(워런 버핏)이라는 사람은 뛰어난 투자가로 세계의 몇 째 안가는 부자입니다. 그는 늘 세계 경제의 동향을 잘 예측함으로 투자자들의 방향을 인도하고, 부를 누리는 사람입니다.

본문의 기생 라합도 어떤 면에서 그런 면을 지닌 여인이었습니다. 정말 투자할 때에 자기 인생을 투자한 사람입니다. 3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기생 라합은 믿음으로 정탐꾼을 영접하여 순종하지 아니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멸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라합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의 사건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사건은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히브리어로 말씀이라는 단어는 사건이라는 의미를 갖기도 합니다. 여호수아 2장에 보면,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정복하기 전에 두 명의 정탐꾼을 여리고에 침투시켰습니다. 이 때 정탐꾼들이 기생 라합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 때 기생 라합은 정탐꾼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그녀는 미래를 예측했습니다.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더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수2:9-10).

여기서 눈여겨 볼 내용은 홍해를 건너게 하신 하나님의 사건을 기생 라합은 보고 안 것이 아니라, 들어서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건들을 듣고 라합은 저가 참으로 하나님이심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라합은 정탐꾼을 숨겨주고, 평안히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점령할 때 특별히 그와 그의 가족은 구원을 받고 후에 다윗의 증조모가 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여호수아를 볼 때 우리가 질문하고 싶은 내용들이 있습니다. 과연 라합이 자기 민족을 버리고,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정보를 제공하고, 스파이를 숨겨주는 행위가 옳은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런 질문은 성경의 관점과 다른 것이기 때문에 대답하기 어려울수도 있지만, 오히려 오늘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민족은 단일 민족으로 수천년을 내려왔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일본이 독도를 자꾸 자기네 땅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일본의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우리나라에 와서 자기 민족의 그런 점을 미안하게 생각하고 사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입장에 있는 것을 쉽게 논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항상 편견이 들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내 민족, 내 가족, 내 교회이기 때문에 무조건 옳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분명 옳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넘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옳은 길을 갈 수 있고,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 작은 도시에서 교회 연합 체육 대회를 하곤 했습니다. 친선으로 하는 게임이었습니다. 교회마다 천막을 쳐 놓고 응원을 열심히 하는데, 시작기도를 하면서 ‘우리 교회가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아주 어리석은 기도입니다. 정말 자기 중심적인 기도입니다.

오늘 우리는 라합의 모습을 보면서 그런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그는 자기 민족을 버린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옳은 것을 좇았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가능한 여러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그가 알릴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알렸습니다. 여호수아 6장 23절을 보면, “정탐한 젊은이들이 들어가서 라합과 그의 부모와 그의 형제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고 또 그의 친족도 다 이끌어 내어 그들을 이스라엘의 진영 밖에 두었다”고 했습니다. 그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다 구원한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보려고 하는 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영적인 예리한 분별력이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백성들에게 일어난 사건을 들으면서 이 사건의 배후에 계신 그 신이 참 신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사건을 듣고 들은대로 믿은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은 예리한 분별력을 갖게 합니다. 믿음은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가 어떻게 서야 할 지를 알게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반응할 필요가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대로, 마음이 끌리는 대로, 사람의 경험에 의지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설 것을 촉구합니다.

기생 라합의 믿음과 행위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했던 이스라엘 민족들과 잘 대조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 반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반응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홍해를 건넜음에도 불구하고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 정탐꾼 열 두 명을 보내어 보고를 들었을 때 불평과 원망을 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하지만 라합은 멀리서 소문으로만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심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런 차이가 어디서 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말씀에 대한 반응의 차이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미래가 불투명한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우리에게 좀 더 예리한 믿음의 분별력을 가진다면 얼마나 귀하고 놀라운 일이겠습니까? 우리에게 그런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생과 사를 가르는 상황에서 이런 믿음과 이 믿음으로 인해 갖는 분별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런 분별력을 얻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결론

믿음은 견고한 진를 파하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으로 여리고 성을 함락했습니다. 그들은 그냥 단순히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여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돌았습니다. 그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성을 도는 순종은 그냥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어머어마한 여리고 성벽을 보면서 되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이기고 여리고 성을 돌았습니다. 믿음의 길에는 뒷문이 없습니다. 결혼한 가정에게 뒤돌아설 문을 없습니다. 교회와 직장, 내가 충성해야 할 삶의 자리에서 우리는 힘들고 어려울 때 뒤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단순한 믿음은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또한 단순한 믿음은 인내가 필요합니다. 여리고 성을 점령하는 일은 단 칠 일 만에 이루어졌고,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 위대한 일이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아무런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느낄 때, 그래서 마치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고 있다고 느낄 때, 그 때도 여전히 하나님의 역사의 시계를 멈추지 않고 있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믿을 때 예리한 분별력을 갖게 됩니다. 기생 라합은 이방인으로써 하나님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그분이 참 신인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자기 민족, 자기 가정, 자기 교회라는, 자기애적인 좁은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주님의 말씀을 바르게 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믿을 때 예리한 분별력을 갖습니다. 삶의 길, 생명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의 유익을 얻고 세상에서 주님의 은혜로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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