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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부요하게 하는 믿음
히브리서 11장 17-22절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그분을 알기 전에 그분이 먼저 우리를 찾아와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범죄하고 멸망받을 인간을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구원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자이십니다. 그분은 온 우주를 다스시리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위기를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다 그분의 손에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시며,  우리는 그분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사건입니까? 이런 일이 우리의 인생에 일어났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이것은 생각만 해도 흥분할만한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 앞에 나올 때마다 그 은혜를 기대하고 그 역사를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땅과 후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열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을 주어서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하여 가나안에 들어갈 때 거의 거져 얻다시피 하면서 땅을 차지하였습니다. 여리고 성을 함락할 때 성을 13바퀴 도니까 성이 무너졌습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습니까? 이것은 거져 얻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다 누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신 것들이 그보다 훨씬 더 많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유프라테스 강부터 애굽 나일 강에 이르는 넓은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것을 다 누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모두 그 약속을 누리면서 감격과 기쁨을 표현하였습니다. 대표적으로 다윗이 그런 은혜를 고백했고, 요셉도 그런 인생을 살았습니다. 본문의 주인공들인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도 물론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런 은혜, 삶을 부요하게 하는 은혜를 누릴 수 있는지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지난 여러 주에 걸쳐서 믿음의 다양한 측면들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본문에서는 삶을 부요하게 하는 믿음 두 가지를 나누려고 합니다.


1.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이 삶을 부요하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우리는 여러 가지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다고 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믿는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75세에 부르셔서 100세에 90세인 부인 사라를 통해 아들을 낳은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이 은혜를 통해 그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경험했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한 단계 더 나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당신의 능력으로 얻게 한 아들을 번제로 하나님께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명령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삶에 매우 깊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하실 때 아브라함에게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이었겠습니까? 아들에 대한 사랑이었을까요? 부인 사라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가? 아니면 먼저 번제로 바치고 와서 말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아들을 자기 신에게 번제로 바친 정신 나간 아버지라는 불명예가 두려웠을까요?

아브라함을 힘들게 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이중성의 문제였습니다. 일관성 없는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도 상속자가 될 수 없다고 하셨고, 여종 하갈을 통해 낳은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상속자가 될 수 었다고 거절하셨고, 기어이 나이 100세까지 기다리게 하셨다가 얻은 아들 이삭만이 아브라함의 상속자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그 하나님께서 아직 장가도 가지 않은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관성 없는 명령이 아브라함을 가장 힘들게 했습니다. 본문 17절에서 이러한 모순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이삭은) 약속을(으로) 받은 자로되 (아브라함은) 그 독생자를 (하나님께) 드렸느니라.” 약속으로 아들 이삭을 주셨다는 사실과 그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은 모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말씀하신 약속을 어기고 있습니다. 이삭을 통해 아브라함의 상속자가 나와야 하는데, 그를 번제로 드려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중성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후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신 사건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관계 안에서 볼 때 이 명령은 약속을 무효로 만드는 것입나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모순된 명령을 하신 이유는 무엇이며, 아브라함은 이 모순되어 보이는 명령을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19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이삭을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지만, 좀 더 생각하면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의도로 아브라함에게 이런 명령을 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은 이 명령을 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질문하셨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아! 너 정말 나를 믿니?” “너의 모든 것을 다 나에게 맡길 수 있니?” 너의 장래, 가족, 자식, 재정… 모든 염려를 다 내려놓고 “하나님! 주님께 맡깁니다.”라고 기도할 수 있니?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진짜 믿음을 기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그분 자체를 믿고 신뢰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약속을 믿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비록 나이 들었지만, 아들을 준다고 하니 믿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약속을 받는다고 다 믿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믿어서 손해볼 것은 없습니다. 어차피 없는 아들을 주신다는데 손해 볼 것이 무엇일까 하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명령은 다릅니다. 이 명령은 정말 하나님 그 분 자체를 믿지 않으면 순종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없는 것을 주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내어 놓으라는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명령을 통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대한 무한한 신뢰(믿음)를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진짜 믿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장난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심심해서 시험해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전체를 그분께 맡기는 것입니다.

만약 여기서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다면 우리는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기에 앞서 하나님의 인격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인격을 신뢰했습니다. 하나님의 왜곡되어 보이는 인도하심을 경험할 때도 그들은 여전히 그분을 향한 신뢰를 잃지 않았습니다.


욥을 보십시오. 재산을 잃어버리고, 자식을 잃어버리고, 자기 몸의 건강을 완전히 잃어버린 순간에도 하나님을 신뢰했고, 그분의 주권을 인정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를 보십시오. 바벨론의 우상에 절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풀부불 속에 들어가 죽을 상황이 되었을 때조차         그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단 3:16-18) “왕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우리는 너무도 자주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에 실패합니다. 이것은 사실 굉장히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수록, 하나님께서는 결국 우리에게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지를 물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을 갖게 되면 우리의 삶은 한없이 부요해집니다. 그 때는 하나님과 내가 완전하게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장 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이 말씀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전적인 신뢰, 그분을 인격적으로 믿을 때 갖는 삶의 부요함을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할. 그리하면 이루리라.’ 이런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2. 자격 없는 자에게 베풀어지는 은혜에 응답하는 믿음이 그들의 삶을 부요하게 합니다.

20-21절에서는 믿음으로 이삭은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고, 야곱이 믿음으로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이들 모두 모두 장자에게 축복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삭은 에서에게 축복하려고 하다가 야곱에게 축복하였고,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는 과정에서 형 므낫세에게 오른손을 얹어 축복하기를 바라는 요셉의 요청을 뿌리치고 오히려 오른손을 동생 에브라임에게 얹어 축복합니다.

또한 아브라함도 본래는 이스마엘을 낳고 그를 하나님의 복을 이어받는 자로 삼으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거절하시고 이삭을 낳게 하신 후 그를 통해 하나님의 복을 이어가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신명기 21장 16절에 보면, 자기의 소유를 자식들에게 나눠줄 때 사랑받는 아내의 아들을 장자로 삼지 말고, 덜 사랑하는 아내의 아들이라도, 먼저 낳은 아들을 장자로 삼아서 다른 아들들보다 두 몫을 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문제 있는 자식들에게 상속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본문이 가르쳐 주는 중요한 말씀은 축복은 내가 자격이 있어서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축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결정한 자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복을 얻는 것은 복을 주는 자의 주권적인 의지에 의해 베풀어집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당시 관례화되어 있는) 장자에게 갈 축복권이 차자에게로 갔습니다. 이삭과 야곱은 축복을 베푸는 과정에서 그것을 깨달았고, 또 알았습니다. 즉 복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주도적인 선택이며 주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사건과 같이 다시 한 번 혼란을 갖게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원칙을 파괴하시면 임의로 축복의 대상을 바꾸셨습니까?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질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원칙은 인간의 권리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께서 만드신 원칙을 왜 지키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장자를 통해 축복을 상속하시기를 원칙을 정하셨고, 장자인 나는 그 축복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에서가 그랬지 않았습니까? 내가 받을 장자의 축복을 동생 야곱이 사기를 쳤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이 점은 성경의 구속사적 맥락을 설명해 줍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자격 없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물론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이삭은 태어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그의 출생부터 주관하시고 그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가 받아야 할 축복권을 자격 없는 자로서 받았습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서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하나님의 공평성에 대해 논쟁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받는 사람들은 히브리인들이고 또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들은 이 은혜의 수혜자들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야곱의 후손들입니다. 그들과 그들의 조상, 이삭, 야곱, 에브라함은 본래 장자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흐르고 있는 매우 중요한 구속사적인 이해를 가져옵니다. 우리가 먼저 질문하고 싶은 이스마엘, 에서 등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이미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여 얻고 들어간 후에도 에돔 족속, 즉 에서의 후손들과 다투지 말고, 그의 땅을 빼앗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씀하는 구속사적 흐름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요 자비입니다. 이 점은 위에서 설명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말씀하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은 바로 그런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의 역사를 받아들이고 참여하는 것입니다. 즉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주여! 나는 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주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받았으니 감사함으로 응답하며 살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르는 구원의 비밀입니다. 우리는 이방인으로써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에 참여한 존재들입니다. 자격 없이 주님의 택함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만난 사람은 자격 없는 자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른 복음의 원리, 복음의 방향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바로 이와 같은 은혜에 이르게 된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까? 본래는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에서 대신 허물많은 야곱을 택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장자 므낫세 대신 차자 에브라임을 더 크게 복주신 것처럼 그렇게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은혜를 주셨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런데 만약 나의 자격 없음에 대한 고백이 없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했는데, 우리는 그런 고백이 없다면 이 말씀이 우리에게 상관 없는 말씀이 되고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 됩니다.


마태복음 20장에 포도원의 품꾼들 비유 말씀이 나옵니다.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에 장터에 나가서 일꾼들을 데리고 와서 포도원에서 하루 일당 한 데나리온을 정하게 일을 시켰습니다. 하지만 제 육시와 구시 그리고 십일시에도 나가서 여전히 놀고 있는 일꾼들을 불러와서 일을 시키고 삯을 주었습니다. 나중 온 자로부터 처음 온 자까지 모두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이 말씀은 설명이 필요없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어느 편에서, 어느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해석됩니다.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명령이 하나님께서 처음 주신 약속에 위배되는 명령이었던 것처럼, 그러나 그것이 아브라함에게는 오히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기회가 되었던 것처럼 포도원 품꾼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십일시에 온 사람들은 한 데나리온을 받고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이 말씀은 바로 그점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십일시에 온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 죄인이며, 그렇게 하나님 앞에 자격 없는 자로서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은혜를 모르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비유 말씀을 들으면서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은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본래 처음부터 하나님 앞에 자격 없는 자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사람은 이 말씀을 보면서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 말씀을 너무도 명쾌하기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들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크게 사랑하시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아주 명쾌한 비유 말씀이었습니다.

맞습니다. 주님, 제가 바로 십일시에 온 사람입니다. 그렇게 고백되면 은혜의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사실 모든 사람들은 다 십일시에 온 사람들입니다. 모두가 자격 없는 사람들입니다. 자격 없는 사람들을 예수께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런 고백이 없이 어떻게 주님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왜 우리에게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까? 이 믿음, 즉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은혜에 응답하는 믿음이 우리의 모든 삶의 태도와 자세, 그리고 운명을 바꾸어 놓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근본적으로 자격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믿음의 장자가 되었고, 하나님의 구원의 상속을 받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언어를 돌아보십시오. 우리의 마음으로 그리는 생각들을 점검해 보십시오. 다른 사람들에 대해 갖는 우리의 생각과 판단, 비판과 편견, 이런 것들이 있는 것조차도 모르고 살아가시나요? 우리는 정말 자격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를 믿음의 장자로 삼아주셨습니다. 이 은혜를 고백하여 살아가는 성도와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 부요함을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두 가지 중요한 믿음에 대한 말씀을 주십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은혜에 응답하는 믿음입니다. 이 두 가지 믿음이 우리의 삶을 부요하게 합니다. 이런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부요함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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