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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일 대학의 심리학 교수인 June Gruber라는 교수가 발표한 내용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행복하면 오래 산다’고 생각하는데, 연구 결과는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인생에서 과도하게 행복감을 느끼거나 억지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 오히려 조용하고 내성적인 사람들보다 단명하는 경향이 발견됐다고 합니다. 1920년 대 태어난 이들의 삶을 분석한 자료와 이들의 인생 경로를 추적한 결과 학창 시절이 ‘즐겁고 활발하다’고 기록된 아이들보다 ‘내성적’인 아이들이 오히려 더 오래 사는 경향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활발하다’는 소리를 듣고 자란 이들은 삶에 대한 낙관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보통 자기 삶에 주의력을 잘 기울이지 못해서 약물중독이나 교통사고 등의 위험에 더 자주 노출되고, 노후 대비도 제대로 하지 않는 등의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또한 덴버 대학의 심리학 연구팀은 사람들을 모집해서 두 팀으로 나누어 연구했습니다. 한 그룹에게는 행복과 무관한 기사를 읽게 하고, 다른 그룹에게는 행복의 가치에 관한 기사를 읽게 한 후에 두 개의 그룹에 동시에 마음이 따뜻한 내용의 영화를 보여주자 첫 번째 그룹은 영화에 감동을 받았지만, 행복에 대한 기사를 읽은 두 번째 그룹은 오히려 실망하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런 연구를 통해서 그들은 지나치게 행복해지려고 하는 것 자체가         행복과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행복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연구팀은 돈과 성공, 명예가 아닌 사회적 관계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아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그루버 교수는 ‘행복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고 사회적으로 건강한 관계를 맺는 것이 행복을 찾는 지름길’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새로운 주장인 것 같지만, 말씀을 보면 이것은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존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에게 주신 큰 두 계명이 있는데, 그것은 먼저 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기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즉 인간이 추구하고 힘써야 할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인간의 목적입니다. 여기에 자신의 행복을 위한 내용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행복은 목적이 될 수 없고, 열매일뿐입니다. 삶의 목적에 충실할 때 그 열매로 행복한 삶이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줄 상급(행복)을 숨겨 놓으셨습니다. 행복을 보고 하나님을 따르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신뢰함(믿음)으로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삶에 힘쓰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표면적으로 전혀 축복의 길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걸어야 할 바른 길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런 인생의 길을 본문은 순례자로 보여줍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순례자의 삶을 결코 쉬운 길이 아니며, 평탄하지 않습니다. 그 길은 모든 사람들이 가고 싶어하지 않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 길은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신뢰와 믿음을 가지고만 걸을 수 있는 길입니다. 그 길로 우리를 인도하시면서 그분께서 준비하신 은혜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이 은혜를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1. 순례자의 삶

성경은 먼저 믿음의 길을 순례자의 삶이라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은 유목민이었습니다. 그들이 텐트에서 살았습니다. 유목민의 삶은 그들의 삶의 양식과 정체성을 드러내 줍니다. 유목민의 삶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이 누구인지 생각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외국인과 나그네임로 인정했습니다. 그들은 한 곳에 머물러 살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어딘가를 향해 다시 떠나야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양과 소에게 먹일 풀이 떨어졌을 때는 언제든 새로운 목초지를 향해 떠나야 했습니다. 이것이 순례자의 삶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그들은 항상 하나님의 부르심을 향해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쩌면 그런 삶의 불편함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훈련이 되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순례자의 삶입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삶의 방법이었고, 길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좇아 살아왔습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 그 다음 고향이었던 하란, 밧단 아람을 떠나 낯선 가나안에 와서 그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좇아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무조건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나이 100세가 될 때까지 자신의 삶을 이어받을 자손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조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살았습니다.

이 때까지 아브람에게는 뚜렷하게 결정된 것이 없었습니다. 정착할 장소도, 상속한 후손도 없었습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함으로 가는 길밖에는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나를 왜 이곳까지 인도하였느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내가 이렇게 당신을 좇아간다면 당신은 나에게 무엇을 줄 것이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정말 나의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길이냐고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부르심을 좇아갔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좇아갔던 것은 그분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그분을 섬겨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내게 무엇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무엇을 줘야할 이유가 없는 분이십니다.

시각 장애를 가진 사람은 청각이 발달된다고 합니다. 앞길이 불투명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더 민감해집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민감해야 합니다. 때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주님의 명령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순례자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가 감취어져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당장 그것을 다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삶의 굴곡과 어려움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불투명한 세계에 살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영적인 민감성이 발달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결국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을 통해서도 바로 그 은혜를 주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 안에서 누리는 은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가 가득하시길 축원합니다.



2. 순례자의 길

본문에는 본향이라는 한 단어가 각기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태어난 본향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앞으로 가서 영원히 거할 영원한 본향, 천국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15-16절). 15절의 본향은 전에 살았던 고향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그 고향을 생각하였다면, 즉 그들이 전에 살았던 그 고향, 갈대아 우르든지, 아니면 밧단 아람이라고 하는 하란이든지, 그곳을 그리워했다면 그들은 언제든 그곳으로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고향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곳을 본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리워하고 사모하던 고향, 본향은 그들이 전에 살던 갈대아 우르도 아니고, 밧단 아람, 즉 하란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원한 곳은 아직 가보지 않았으나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된 그곳,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만약 그들이 그리로 돌아갈 마음이 있었더라면 그들은 그리로 돌아갈 몇 번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이 그들이 사모하는 본향이 아니었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4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장가 보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신실한 종을 그의 고향 밧단 아람으로 보냅니다. 아브라함은 그에게 그곳에 가서 내 아들을 위하여 친척들 중에서 아내를 택하여 오라고 명령합니다. 그 때 이 종이 아브라함에게 “만약 이삭의 아내가 될만한 마땅한 사람을 찾았는데, 그가 이곳 가나안으로 오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주인의 아드님이신 이삭을 그리로 모셔간다고 해도 되겠습니까?” 그 때 아브라함은 단호하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이라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없었겠습니까? 혹시 이 말하듯이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아브라함도 모르는 척하고 다시 하란으로 갈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곳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오직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약속만을 바라보았습니다. 순례자의 길은 분명했습니다. 그들은 그 길을 흔들림 없이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갔습니다.


창세기 28장에 가면 이삭의 아들 야곱이 자기 형과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아버지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 일 때문에 형 에서가 야곱을 죽이겠다고 벼르고 있었는데, 이 일을 안 야곱이 도망을 칩니다. 그가 간 곳은 바로 어머니의 고향이었던 밧단 아람이었습니다. 밧단 아람은 그의 어머니 리브가의 고향이면서 또한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살던 고향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도망자로 가다가 벧엘이라는 곳의 벌판에서 돌을 벼개삼아 자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창세기 28장 15절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은 지금 형 에서의 위협을 피해서 도망가는 길이었습니다. 20년이 지나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야곱은 자기 형 에서가 4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자기에게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야복 나루에서 처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20년 전의 사건이 그때까지도 여전히 그의 마음을 사로 잡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결국 가나안으로 갑니다. 이것이 순례자의 길입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순례의 길에서 그들이 바라본 것은 그들이 살던 고향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앞으로 장차 갈 영원한 본향을 바라보았습니다. 이렇게 더 나은 본향을 향해 가는 이들은 이전의 본향을 부정합니다. 이것이 그들의 순례의 방향입니다. 순례자의 길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순례자로서의 성도는 이렇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좇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숨겨진 은혜가 있습니다. 이런 순종의 삶에 하나님께서 최종적인 승리를 허락해 주십니다. 그런 은혜를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3. 순례자의 상급

16절 말씀입니다.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본문에는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이 가고 있는 순례자의 길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첫째는 관계의 회복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시리라”(16절상).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 자신을 저희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어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 자신을 저들의 하나님이시라고 인정하신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다 부끄러운 존재들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 자기 하체를 가릴 수밖에 없었던 인간은 계속해서 그런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는채 살아옵니다. IMF 전 총재였던 스트로스-칸이라는 사람에게서 드러난 부끄러움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인간은 다 이렇게 부끄러운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아니 부끄러워하신 것이 아니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십자가 위에서 그 부끄러움을 대신 당하시고 수치와 모욕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씻으시고 아담과 하와의 부끄러움을 덮기 위해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신 것처럼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가리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하여금 그분의 은혜를 힘입어, 그분의 은혜로 죄를 덮으시고 용서하시는 은총을 따라 살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것이 귀한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은혜는 우리를 충분히 기뻐할만하게 하십니다.

셋째는 하나님께서 성도를 위해 한 성을 예비하셨다는 것입니다. 성은 안전한 장소입니다. 고대 시대에 성은 한 나라의 안전과 주권을 담보해 주는 요새입니다. 또한 성은 백성들의 목숨을 지켜주는 보루입니다. 성이 없는 나라의 주권과 힘을 고대 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전에 살던 하란과 갈대아 우르는 그런 도시였습니다. 매우 발전된 도시였고, 견고한 성읍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안전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온 가나안 땅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성 안에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장막에 살았습니다. 매일 이동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는 언제 어떤 외부의 침입자가 들어와서 그들의 소유를 빼앗고 목숨을 노릴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불안한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한 성을 예비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들에게 안전을 보장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미래의 안전, 물질에 대한 안전, 외부의 침략으로부터의 안전, 목숨의 위기에서부터 지켜주는 안전, 인간이 살면서 수없이 느끼고 경험할 수밖에 없는 불안과 초조, 두려움과 같은 것으로부터 우리를 신실하게 지키시고 인도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안전한 장소는 하나님의 품 안입니다. 이것을 믿습니까? 우리가 주님의 품에 안길 때만이 우리에게는 가장 큰 안전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이러저러한 고난을 당할 수도 있고,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한 성을 예비하셨습니다. 그 성은 우리에게 가장 편안한 곳이며 어떤 위험스런 상황에서도 우리를 견고히 지키시는 곳입니다. 이런 편안함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보장입니다. 이것을 순레자로 살아가는 성도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행복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맺어지는 많은 열매들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그것만을 바라보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더 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행복뿐만 아니라 삶의 관계, 건강, 안전, 담대함도 주심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모두 열매입니다. 목적이 아닙니다. 즉 그것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기를 결단하십시다.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헌신하십시오. 그럴 때 비록 외적으로는 순례자의 길을 걸어가지만 그 길은 바로 숨겨진 하나님의 은혜의 길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누리는 성도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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