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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성도님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믿습니까? 그리고 우리도 부활할 것을 믿습니까? 안타깝게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는 아무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단 한 사람도 믿지 못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도 믿지 못했고, 예수님을 그렇게 사랑하던 막달라 마리아도 믿지 못했습니다. 계속 무덤만 찾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수제자였고,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다”(마26:33)고 장담하던 베드로도 예수님의 부활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부활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인간이 만들어낸 창작품도 아닙니다. 그리고 부활은 그냥 자기 확신도 아닙니다. “나는 부활을 믿어, 믿을거야. 믿고 말거야”해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활이란?

그러면 부활이란 무엇입니까? 부활은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를 뚫고, 역사 안으로 들어온 사건입니다.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한 사건입니다. 부활은 우리의 생각 속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머리에서 만들어지거나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제자들과 부활절 만찬을 하시면서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도 제자들은 그 소리를 알아듣지 못한 것입니다. 들리지 않았고, 들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기적을 경험하면 예수를 믿을 것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성경을 조금이라도 보고 묵상을 해 본 사람은 기적이 인간에게 믿음을 주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한 후에도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로마의 압제를 이길 수 있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려고 했습니다.

더욱이 오늘 본문 앞의 말씀(요20:19-29)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미 제자들에게 두 번이나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은 한 곳에 모여 문을 닫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 다 문을 열지 않고 들어오셨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십자가에서 못박힌 자국, 칼에 찔린 자국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 앞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말씀에 이어지는 사건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심

본문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세 번째 만나는 사건입니다. 일곱 명의 제자들이 디베랴 호수로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그들은 지금 어떤 소망을 가지고 나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바다의 고기를 잡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름받은 자들이었습니다. 3년 동안 내려 놓았던 그물을 다시 잡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어떤 소망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두 번이나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처량한 마음으로 고기 잡으러 갑니다. 이 일에 제일 먼저 나선 사람은 늘 나서기 좋아하는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베드로의 말의 어감을 느껴보십시오. 이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에잇! 나는 고기나 잡으러 갈란다.”하는 말투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는 마음입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두 번이나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행동과 말투에서 예수님의 부활에서 느끼는 감격이나 기쁨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춤을 추며 기뻐해야 할 제자들에게서 부활의 감격을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부활 신앙이라는 것은 단지 부활을 객관적으로 알았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활신앙은 그냥 그 신앙을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삶의 발전적 진전이 없고, 결국 익숙해져 있던 과거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들의 모습에서도 발견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별 힘 없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이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까? 왜 예수를 믿으면서도 힘이 없나요? 아니 우리가 그렇지 않습니까? 정말 날아갈 것 같은 기쁨을 가지고 살아가나요? 물론 뭐 날마다 그렇게 뛰면서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나 정말 정직하게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 우리 안에 부활의 주님을 만나셨는지를 정검하셔야 합니다.

제자들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제자들을 예수님께서 세 번째 다시 찾아가십니다. 주님은 그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다시 그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부활신앙을 갖게 하셨습니다.


1. 주님이시다

제자들은 지금 육지에서 오십 칸쯤 떨어져 있었습니다. 약 90m 정도 되는 거리라고 합니다. 하지만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낙심한 제자들에게 고기인든 잡혀 주겠습니까? 그런데 이른 아침 제자들이 있는 곳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멀리서 말합니다.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그 말씀대로 그물을 내린 제자들은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업을 정도로 고기를 많이 잡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상당히 생기가 돌았을 것입니다. 그늘졌던 실망과 낙심한 그들의 마음에 작은 소망이 생겼을 것입니다. 이 때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이시다!” “주님이시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 계셨습니다. 많은 고기를 잡은 것은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였습니다. 이 은혜로 인해 그들은 잠시 기뻐했는데, 그 기쁨이 바로 예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안 것입니다.

“아! 주님이시구나!”주님을 처음 알았을 때, 그 때도 주님께서 그렇게 자기들에게 다가오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그 때도 한 없이 낙심한 가운데 처량하게 그물을 내리고 있을 때, 주님께서는 그렇게 다가오셨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일상적인 삶의 자리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셨던 예수님께서 이렇게 그들의 삶 곁에 다가오시는 겁니다. 실망과 절망의 자리로 찾아오셨습니다. 부활신앙은 그렇게 한 걸음씩, 한 걸음씩 구체화되어 갔습니다.

부활신앙이란 그렇게 일상적인 삶의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일을 하다가도 “아! 주님이시구나!”하고 외쳐야 합니다. 공부를 하다가도 “아! 주님이시구나!”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차를 타고 가다가도 주님께서 내 곁에 다가와 계신 것을 보고는 “아! 주님이시군요!”하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오시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는데, 그분이 지극히 일상적인 우리의 삶의 자리에 불쑥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 주님을 보면서 “주님이시다”하고 놀라며 반가워하는 것입니다. 생기가 도는 것입니다. 뭔가 생명의 기운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때때로 우리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오시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의 머리를 때리시기고 하고, 때로는 부드럽게 다기오시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는 매우 기진해 있을 때 조용히 다가오시기도 하시지만, 또 때로는 매우 험한 풍파와 소용돌이 속에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시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살아계신 주님을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경험하고 느끼고 깨닫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야만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도 그렇게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그렇게 외치는 요한의 탄성이 우리의 입에서도 날마나 반복되어야 합니다. “아! 주님이시다.” “주님이시군요!”


2. 와서 조반을 먹으라

예수님을 보고는 제자들은 육지로 나왔습니다. 밖에 나와 보니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고기를 굽고 떡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하지만 제자들은 아직까지도 예수님 앞에 제대로 설 면목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베드로는 겉옷을 주어입고, 바다로 뛰어들어 육지로 나올만큼 반가운 마음으로 뛰어나왔지만, 막상 예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예수님을 저주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을 뵐 면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13절을 보면, 아마도 제자들은 생선을 굽고 있는 곳에서 아직 멀리 있는데, 예수님께서 생선과 떡을 가져다가 제자들의 입에 넣어주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따뜻한 섬김을 받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부활하신 후에도 여전히 제자들을 섬기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제자들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께서 친히 그들에게 다가오셔서 고기를 가져다 주시고, 떡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어깨를 감싸시고, 말없는 위로의 시간을 갖습니다. 때로는 과거의 일들에 대해 말씀을 나누셨을지도 모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떡과 고기를 먹으면서 그 주님과 대화를 하면서 그동안 가졌던 불편함과 패배감, 주님을 배반했다는 죄책감으로부터 서서히 자유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의 따뜻한 위로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억지로 코를 꿰어서 끌고 가시는 것이 아니라 허기진 영혼, 패배감으로 찌들린 제자들을 은혜로 채우시고, 조용히 회복하실 시간을 주시고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과의 교제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양식을 먹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공급하시는 양식을 날마다 섭취해야 합니다. 그분의 섬김을 받으며 그분께서 우리의 어깨에 손을 얹으시고, 다정히 다가오셔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부활신앙은 이렇게 회복됩니다. 아무리 바빠도 주님께서 차려주시는 조반을 먹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여전히 내 삶의 한 복판에 계시면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놀라운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이렇게 다가오시는 주님, 이렇게 조반을 먹여주시는 주님을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결론

부활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 안으로 뚫고 들어오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을 만날 때 부활의 신앙을 경험하고, 부활의 능력을 누리게 됩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내 삶 속에 찾아오셔서 때로는 기적과 같은 능력으로 함께 하시는 것을 보고, 때로는 일상적인 삶의 자리에서 변화를 가져오시는 주님의 은혜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려면 그분의 음성에 민감해야 합니다. 요한이 주님을 알아보고는 ‘주님이시다’고 외쳤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외침에 자주 일어나야 합니다. 예기치 않은 장소에서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만나십시오.

그리고 그분과 깊이 교제하십시다. 조반을 차려주시고,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어깨를 어루만지시며 감싸시고 함께 하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진정한 부활의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역시 속으로 침투해 오신 그 주님을 이 역사 안에서 누리는 것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최대의 은혜이며 최대의 축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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