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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장을 흔히 ‘믿음장’이라고 합니다. 믿음이란 말은 성경 안에서도 다양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누간가를 신뢰할 때 믿는다고 말합니다. ‘신앙의 열정과 충서의 정도’를 말할 때 ‘그 사람은 믿음이 좋아’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는 ‘지적인 동의’를 표현할 때도 믿음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야고보서 2장 19절에 보면,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했습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을 믿고 떤다는 표현은 귀신의 지적인 동의입니다. 귀신들은 하나님께 충성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지만,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고 인정합니다. 그런 점에서 ‘귀신들도 믿는다’는 표현이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이런 지적 동의를 가지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혀 믿음의 원리를 따라 살지 않으면서도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믿음에 대해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말씀은 하박국서에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로마서 1장 17절과 갈라디아서 3장 11절에서 인용합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늘 제목을 ‘성도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삽니다’라고 정했습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사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본문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세상의 세계관과 세상적인 삶의 방식을 거부한다는 뜻입니다. 왜 그럴까요? 거기에 소망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세상적인 삶의 방식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방법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신하고, 그분의 통치를 믿으며 그분께서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신뢰함으로 살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능력을 누립니다.


먼저 믿음은 세상적인 가치관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세 가지 점에서 세상적인 가치관을 거부하는 믿음에 대해 정의합니다. 이 믿음은 미래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믿고, 현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말하며 그 가운데 과거의 삶이 치유받는 은혜를 누리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1. 믿음은 미래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본문 1절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장래의 소망을 실제로 느끼고 경험하고 확신하고 사는 것입니다. 믿음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지만, 장차 이루어질 것들을 실상으로 보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은 미래를 기대합니다. 믿음은 현재에 매여 있지 않습니다. 믿음은 현재를 뛰어넘는 힘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미래에 약속된 하나님의 말씀을 실상으로 보며 현재를 뛰어넘는 삶을 살았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미래를 불안정한 것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께 속한 영역이라고 믿었습니다.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창세기 12장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인도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13장과 1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15장 13절에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400년 동안 (애굽에서) 고통을 당할 것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아브라함이 머물고 있는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에게는 이방 땅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이 땅을 나일 강에서부터 유브라테스 강까지 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일생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가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단 한 명의 자손도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약속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 약속에 근거해서 가나안 땅에 왔습니다.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이방 땅이고, 기댈 곳도 없는 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이곳에 와서 살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이 곳을 주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미래는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 위에 세워지는 것임을 조금씩 알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있어서 미래는 항상 불확실하고 불안한 그 무엇입니다. 미래에 어떤 일이 우리에게 닥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미래의 가능한 위험들에 대해 여러 가지 대책들을 세웁니다. 보험을 들고 노후를 위해 재정적인 준비를 합니다. 그러고도 불안과 염려, 걱정을 벗어버리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장래의 일을 말씀하시고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와 너의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번성하게 하고,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따라 올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믿음은 장래의 약속을 따라 가는 삶이었습니다.



2. 믿음은 현재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1절 하,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그리스도인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살아갑니다. 그의 현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수종하는 삶의 현장입니다. 현재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가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현재가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미래가 현재를 끌고 가는 것입니다. 현재는 미래에 일어날 그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어가는 역사의 현장입니다.

여기에 세속적인 사고와 성경적인 사고가 완전히 갈라지게 됩니다. 세속적인 사고는 현재의 삶이 미래의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현재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미래의 운명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세계관에서는 현재의 삶이 미래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현재의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즉 현재는 하나님의 손에 있는 미래에 의해 확실하게 구속되어 있습니다.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계획이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삶을 좌우합니다.

아브라함은 철저히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을 때까지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우고 시도했었습니다. 첫째는 자기 종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는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거절하고 막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계획은 여종 하갈을 통해 아들을 낳아 후계자로 삼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이스마엘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계획도 거절하셨습니다. 거절할뿐만 아니라, 그와 여종 하갈을 아예 밖으로 쫓아내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로 인해 많이 고통스러워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한 여정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을 향하신 하나님의 미래의 계획이 그의 현재의 삶을 제한하고 이끌고 있습니다.

너무도 분명한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을 따라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철저히 장래에 나타날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그의 삶이 지배받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삶이 장래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장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오늘 그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그의 삶의 방법과 길을 안내한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힘든 삶입니까? 하지만 또한 이것이 얼마나 기대와 소망을 가지게 되는 삶입니까?

아브라함은 그 삶 자체로 놓고 보면 그렇게 부러워할만한 인생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는 75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고향을 떠나왔습니다. 가나안이라는 이방 땅에 와서 유목민으로서 방랑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때로는 애굽까지 내려가기도 했고, 때로는 이방 민족들의 위협 앞에서 두려워하기도 했습니다. 예쁜 아내를 데리고 다니면서 자기 아내 때문에 자신이 죽임이라도 당할까 싶어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기도 했고, 아내를 힘있는 권력자에게 빼앗기기도 했습니다. 남자답지 못한 자신의 모습, 아내를 빼앗기고 목숨이라고 부지하려던 비겁한 모습 등등 얼마나 괴로운 순간들이 많았겠습니까? 그가 만약 갈대아 우르 고향에 살고 있었다면 그는 그런 고생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인생은 오늘 우리들과 같이 매우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위기 속에서 변함 없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의 미래의 약속이 되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따라 갔다는 점입니다. 오늘날처럼 내일을 알 수 없는 불안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처음 발을 디딘 가나안에서 미래도 알 수 없고, 지역 정보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좌충우돌하면서 살아갔을 그의 삶이 얼마나 불안합니까? 이것은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삶의 상황과 흡사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인생을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오늘을 순종함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미래를 붙들어 주셨고, 확실한 약속을 가지고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미래는 하나님의 손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아브라함을 인도하셨습니다. 그의 현재의 삶을 흔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현재라고 하는 자리를 그가 의지할 안전 지대로 느낄 수 없게 하셨고, 그보다 더 확실한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의지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길이며, 믿음으로 사는 삶의 방법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현재의 삶이 장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움직여진다는 것을 믿습니까? 우리가 불안해하고 두려워할 것은 장래에 대한 불투명한 운명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는가 라는 점입니다. 우리의 과거가 현재를 만들고, 우리의 현재가 우리의 장래, 미래의 운명을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장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오늘 우리들의 삶을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이고 믿음입니다.

얼마나 안심이 되고 안정된 인생입니까? 시편 기자는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산섯이시며 요새시고 나의 하나님이시고 방패시며 바위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을 믿고 우리의 미래를 붙드시는 하나님께 현재의 삶의 자리에서 순종함으로 살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의 삶을 살아감으로 승리하시길 축원합니다.



3. 믿음은 과거의 삶을 회복합니다.

3절,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믿음으로 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역사는 과거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이 일에 우리는 참여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창조의 역사는 늘 신비롭기만 합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믿음으로 안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 말씀은 과거도 주님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과거를 볼 뿐만 아니라, 그 과거조차도 주님의 주권적인 손에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놀라운 것은 본문은 미래로부터 현재로, 그리고 현재에서 과거로 넘어가면서 믿음의 실체, 본질에 대해 말씀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과거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압니다. 이 말씀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인간은 지나간 과거를 움직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세상의 창조를 직접 하신 분이시고, 따라서 우리의 과거조차도 그분의 손에 있음을 밝히십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과거가 현재의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하는 원망과 불평이 조금씩 있습니다. 어렵고 불행한 환경에서 자람으로 아주 겪기 어려운 경험과 그로 인한 상처가 여전히 있는 사람들은 더욱 이런 마음이 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불평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전적으로 느끼지 못하게 합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어디선가 실수를 하셨거나, 아니면 한 때 그분은 내게 대하여 무관심하셨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이라도 주님의 은혜를 소망하긴 하지만, 그분의 손길조차도 나의 삶을 완전히 치유하고 회복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와 사랑을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과거도 치유/회복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모든 세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습니다. 하나님은 과거 그 때에도 우리와 함께 하셨고, 우리의 삶을 주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음으로 안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삶도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주관하심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주관하십니까? 이미 지나간 과거를 우리 하나님은 어떻게 회복하시며 치유하십니까? 여기서 저는 이런 하나님의 손길을 가장 크게 발견할 수 있는 본문을 요한복음 9장에서 발견합니다. 요한복음 9장에는 나면서 맹인 인 사람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길을 걸어가시는데, 길 가에 이 사람을 본 것입니다. 이 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한 것입니까? 자기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이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제자들의 질문은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그대로 반영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즉 이 사람의 죄가 아니라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있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소경 됨의 목적은 미래에 있고, 소경의 현재는 미래에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현장이고, 그 결과 그의 과거는 완전하게 회복되고 치유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그의 삶의 의미가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그는 지금까지 죄인으로 살아왔지만, 이제 그는 더 이상 죄인으로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불행한 과거도 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전에 그는 죄 때문에 소경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죄인이 아니라는 말은 아니지만, 죄가 그를 소경되게 한 것은 아님에 틀림이 없습니다. 저는 그가 자기 눈이 떠졌다는 것보다 오히려 그의 삶에 대한 재해석을 해 주셨다는 것이 그에게 더 놀라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현재와 미래를 바꾸신 것만이 아니라 그의 과거도 치유하신 것입니다. 그는 아마도 과거에 그가 맹인으로 살아온 것 자체를 기뻐하고 감사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아팠던 과거를 사랑하고 감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그 부족함 때문에 우리는 모두 더 나은 인생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을 그렇게 살지 못한다고 생각할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하나님을 만난다면 우리는 그 어떤 약점과 아픔들, 부족함들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께서 더 위대한 역사를 이루셨음을 고백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 고백이 없는 사람은 진정한 성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나의 나됨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고후 12:9)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내 삶의 자리가 바로 그런 자리임을 발견한다면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삶의 고백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의 삶을 헛되어 버려두는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지금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해서, 혹은 너를 위한 계획을 가지고 있어서 너를 그 때 그곳에 있게 하셨다.’ 그 때는 몰랐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애 속에 이런 고백이 있기를 원합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는 분명히 고백해야 합니다. 어떤 불행한 상황도 하나님의 역사, 치유, 회복을 가로 막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는 아무리 불행한 삶의 자리에 있었던 과거도 회복하신다.

성경을 보십시오. 성경 안에는 그런 고백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도 자신의 과거가 예수 안에서 완전히 치유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누가복음 19장의 세리장이 삭개오도 예수님을 만난 후 그의 삶이 바뀌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그들의 과거가 더 이상 그들을 구속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과거를 봅니다. 우리의 믿음은 과거를 치유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과거를 이깁니다. 인류의 미래와 현재와 과거가 모두 하나님의 손에 의해 철저하게 다스려집니다. 우리의 믿음은 바로 그 하나님을 향한 신뢰이며 약속에 대한 반응입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믿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을 지닌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의 세계관을 거부하고, 세상의 삶의 방식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세계관을 거부하는 것을 이제까지 언급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세상의 삶의 방식을 거부하고 믿음의 방식을 따라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첫째, 우리 인생에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고백하고 확신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미래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확신하고 살아야 합니다. 이 믿음이 흔들이면 우리는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믿음을 꼭 붙들어야 합니다. 이 믿음에 있어서 든든히 서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을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현재는 미래에 대해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인도받습니다. 현재는 과거에 지배받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약속에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둘째, 성도는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방법을 따라 살 것을 결단해야 합니다. 믿음은 현재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래에 대한 약속을 가지고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는 것은 세상의 불확실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뜻을 고집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착각하는 것이 가장 위험합니다. 말씀 안에 길이 있고, 말씀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철저히 말씀이 나의 삶이 되고, 나의 인생을 붙드는 힘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 성도는 과거를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손에 자신의 인생을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도 치유하시고 회복하시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모든 세계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인생은 누구를 막론하고 회복되었습니다. 창녀가 새로운 삶을 살고, 세리 삭개오가 변화되었고, 나면서부터 맹인되었던 자가 눈만 뜬 것이 아니라 과거가 회복되고, 죽은 자가 살아났습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어떤 일을 하실 것인지를 보여주는 모델들입니다. 그리고 지금 하나님은 다시 우리들을 그 모델들로 사용하시기 원하십니다. 문제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들려져야(맡겨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이루실 삶의 변화를 기대합니다. 하늘의 기쁨을 기대합니다. 미래의 약속이 우리의 현재의 삶을 변화시킬 것을 기대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성도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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