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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11일 지진과 해일, 원전 사고로 인해 일본은 아직도 여전히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일본을 위한 재해헌금을 했습니다만, 이런 끔직한 재해를 볼 때마다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불안한 일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인간의 지식으로 쌓아놓은 발전된 문명이 자연 재해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을 목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년 만년 살 것 같지만, 인생이 그렇게 든든한 배를 타고 가는 항해는 아닙니다.

너무도 빨리 변하는 세상에서 세상의 흐름을 좇아가는 것조차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갑작스럽게 닥치는 재난은 세상의 흐름을 좇아가려는 우리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과연 인간은 무엇을 위해 뛰어야 하는 것입니까? 한 순간 그렇게 무너질 수 있는 것을 쌓기 위해 뛰어 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포기할 수도 없는 세상입니다.

고대 시대에는 확실히 지금보다는 더 그런 점에서 나았다고 보여집니다. 세상의 변화도 오늘날처럼 심하지 않았고, 적어도 내일을 예측할 수 있는 시대에 살았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안정적인 삶을 살았음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본질적으로 인생은 어느 시대이건 다 예측할 수 없는 위기가 있었고, 갑자기 닥치는 재난이 있었고, 이로 인해 세상에 산다는 것이 항상 어렵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생을 고해와 같다고, 고난의 바다와 같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성경의 많은 인물들은 우리에게 그런 면을 많이 보여줍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그런 인생을 살았고, 야곱이 그랬으며, 요셉도 그런 인생을 살았습니다. 다윗이 그랬고, 다니엘이 그런 인생을 살았습니다. 어떤 면에서 내일이 없는 막다른 상황에서 방황하며 고통스러워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들의 인생을 믿음의 승리자라고 말씀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그는 항상 불안하고 위기 앞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에게 선택되어 탄탄대로의 인생길을 걷는 듯했지만, 이내 사울 왕으로부터 견제받는 정적이 되어 늘 도피자로 살아야 했습니다. 항상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했습니다. 언제 어디서 사울의 칼이 다윗의 목을 겨눌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불안한 인생입니까? 이렇게 사는 것이 어디 사람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나요? 나중에 그는 이스라엘 지역에서는 그 어디도 사울 왕의 칼끝을 피할 곳이 없다고 판단하고 블레셋으로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는 자기로 인해 자기 부모와 형제들이 위협을 느꼈기 때문에 가족들을 이방 나라 모압족속에게 맡겨야 하기도 했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은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들의 삶도 다윗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불안해하고 초조해 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내일을 알 수 없는 불투명한 미래가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남보다 좀 더 나은 삶의 조건에 있는 것 같아 잠시 평안을 누릴른지 모르지만, 재난은 누구에게 닥칠지 모를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루 아침에 직장을 잃기도 하고, 어떤 이는 자기 몸에 자라고 있는 질병의 소식을 듣기도 합니다. 때로는 뜻하지 않게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이런저런 재난과 어려움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합니까?

다윗은 그런 극한 고난과 아픔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고, 승리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노래하며 찬양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는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그의 발은 땅을 디디고 있었지만 그를 붙드는 능력은 하늘로부터 왔습니다. 다윗은 그 고난과 위기 속에서 무엇을 붙들고 살았을까요?


오늘 본문은 위기 가운데 있는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동일한 약속을 들려주십니다. 히브리 성도들은 위기 가운데 놓여 있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으로 인해 박해를 받고 있었고, 유대인 민족 공동체로부터 단절될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칫 믿음으로 인해 목숨을 잃을 위기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 위기 속에서 히브리 기자는 히브리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변함 없는 약속을 들려주심으로 그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몇 가지 소망의 말씀을 함께 듣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도 동일한 위기 가운데 살지만 이 말씀을 붙들고 더욱 강건하게, 비록 우리의 발은 땅을 딛고 있지만, 우리를 붙드는 능력은 위로부터 오는 것을 확인하고 체험하며 살아가는 은혜를 누리기 원합니다.



1. 위기 가운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첫 번째로 주시는 약속은 빼앗기지 않는 유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34-36절).

어떤 것에도 빼앗기지 않을 유업(소유)를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34절입니다.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이 말씀을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현대인의 불안은 예측할 수 없는 재난에서 옵니다. 자연 재해이든, 경제적 위기이든, 인간의 노력으로 막을 수 없는 고통으로 인해 인간은 자기가 쌓아놓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고통을 겪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하는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유업)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다 빼앗겨도 빼앗기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 잃어버려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더 낫고 영원한 유업(소유)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기 소유를 빼앗기면서도 기뻐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힘과 완력으로 빼앗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으로 인해 기뻐하였고, 낙심하지 않았고,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세상에서 빼앗겼던 그 어떤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었고, 비교할 수 없는 삶의 은혜였고, 힘이었습니다. 그래서 짐 엘리엇 선교사가 한 말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결코 잃어 버릴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해 지킬 수 없는 것을 버리는 자는 절대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오늘 본문의 히브리서 기자도 동일한 말을 했습니다.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알기 때문이다.” 그 소유가 결국 버려야 할 것이라면 그것을 버리는 것이 지혜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1장 4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썩지도 않으며, 더럽혀지지도 않고, 쇠하지도 않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4장 16-18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서 정말 소중한 것을 빼앗을 수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당시 히브리 성도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기도 했고,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자기 소유를 빼앗기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모든 것을 기쁘게 당했는데, 그 이유는 자신들에게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음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 봅시다. 지금 우리에게 재난이 온다면 그래서 그 재난으로 인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면 내게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남는 것이 잃어버리는 다른 모든 것들보다 더 소중하고 귀한 것들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무엇일까요? 믿음으로 사는 것은 그냥 손해를 감수하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더 귀한 것을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더 낫고 영구한 소유,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급을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로서의 다윗의 왕국이었습니다. 그것은 세속 정권으로서의 왕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서의 왕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있고, 하나님 나라의 상징으로서의 왕권이었습니다. 즉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통치, 살았을 때나 죽은 후에나 동일하게 누리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즉 다윗은 자신이 이 땅에서 실패하고 죽음을 당해도, 결구구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즉 이것이 더 낫고 영구한 유업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왕국은 세속 정권으로서의 왕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었습니다. 이 하나님 나라의 왕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될 하나님 나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 왕국에서 하나님 나라를 보도록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욥기 19장 25-26절에 보면 욥이 고난 중에 하는 고백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그의 소망은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망이 욥을 붙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욥은 이 땅에서 그 영원한 것을 누렸습니다. 그는 잃었던 건강과 부를 회복해서 재산도 두 배가 되었고, 자녀 10남매도 다시 얻었습니다. 이 회복은 하나님 나라에서 누릴 영원한 소유의 파편입니다. 본체가 아니라 일부분이라는 뜻입니다. 이 파편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누릴 본래의 영광을 사모합니다. 이것을 전체라고 여기는 삶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망할 수 없습니다.

모든 성도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의 파편을 경험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도 있습니다. 이 땅에서 보는 하나님 나라의 파편을 마치 하나님 나라의 본체인 것처럼 보는 경우입니다. 마태복음 17장을 보면 예수님과 함께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높은 산에 올라갔습니다. 이 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고, 예수님은 세상에서 그렇게 희어질 수 없을만큼 희어져 광채를 발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이 상황에 너무 놀라워서 그 자리에서 ‘초막 셋을 지겠습니다.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또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리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자리에 머물고 싶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그 상황에서 본래의 천국이 얼마나 위대하고 놀라울까를 생각하지 못하고 그냥 그 자리에 머물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가 본 것은 그것뿐입니다.

여기에 신앙의 비밀이 있습니다. 여기에 믿음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말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말할 수 있고, 그것을 확신함으로 기뻐하는 자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겠습니까? 그것 때문에 기뻐하고, 그것 때문에 찬송하고, 그것 때문에 세상의 고난을 이기는 자가 참된 성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35절,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큰 상을 얻는다고 말씀합니다. 36절입니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약속하신 것을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만약 이 땅에 있는 것이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것이라면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더 낫고 영구한 유업(소유)을 소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그런 영원한 유업을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그런 것을 소망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에서 얻는 그 어떤 것들이 우리에게 영원하기를 그냥 기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거짓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도, 참된 만족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가 얻고자 하는 세상의 것들을 부숴뜨리십니다. 그런 것을 볼 때마다 우리는 믿음의 눈을 떠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더 낫고 영구한 유업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인 눈은 확실히 고난이 없으면 볼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고난을 통해 참으로 더 낫고 영구한 유업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보라보며 소망을 붙들고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결코 넘어지지 않습니다. 결코 실망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믿음으로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2. 위기 가운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두 번째로 주시는 약속은 종말의 승리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종말의 승리를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이 어렵고 힘든 세상에서 의지할 또 하나의 약속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성경은 우리들에게 이 땅에서의 삶이 평탄할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실 것이고, 지체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곧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겪고 있는 그 고난은 이제 그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이 약속으로 들려지시는지요? 이 약속이 소망으로 와 닿는지요? 성경은 수없이 이 약속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임박한 재림에 대해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곧 끝날 때가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체력 검사를 하면 오래 달리기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1,000m를 달리려면 얼마나 힘들었나요? 잘 뛰는 사람이야 그 정도 쉽게 뛰겠지만, 저는 참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운동장 다섯 바뀌를 뛰어보면 한 바뀌, 한 바뀌가 그렇게 힘들었습니다. 그러면 옆에서 친구들이 응원을 합니다. ‘조금 더, 조금 더, 이제 한 바뀌, 반 바뀌’ 그러면서 응원을 합니다. 그 때 어느 누구도 힘들다고 이제 그만 뛰라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때 응원을 하는 것은 조금 더 뛰라는 말뿐입니다. 왜 그런가요? 그것은 오래 달리기의 영광은 마지막 골인 지점에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도 동일합니다. 인생의 영광은 골인 지점에 있습니다.

어제 장로님과 잠시 대화를 나눴습니다. 집안에 애쓰시던 일들이 있으셨던 것이 기억나서 이것저것 여쭤보던 중에 장로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오늘까지 산 것이 너무 감사하다. 긴 고난의 세월을 여기까지 산 것을 생각할 때 너무 너무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이 참 위로도 되었고, 좋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고백 안에는 정말 열심히 사신 흔적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주 살짝 삶에 대한 아픔도 배어났기 때문입니다. 아픔이 배어났다는 말은 힘들게 달려왔다는 뜻입니다.

마라톤 선수들은 마라톤을 완주할 때마다 뛴다는 것 자체가 어렵다고 합니다. 마라톤을 뛰고 다음 날 또 뛰고 싶다고 하는 사람은 그 실력과 상관 없이 잘못 뛴 것입니다. 열심히 뛴 것이 아닙니다. 한 번 뛰면 다시 뛰고 싶지 않을만큼 열심히 뛰는 것입니다. 다시 태어나도 이 일을 또 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사실 정직하게 말한다면 지금 이 일을 하는 것은 감사하지만, 다시 태어난다면 그것은 그 때가서 다시 생각해 보겠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만큼 우리는 힘써 달려가야 합니다. 더 달리고 싶지 않을만큼 달려야 합니다. 인생의 경주는 한 번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 그렇게 생각하고 오늘 말씀을 봅시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주님의 오신다는 약속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 것입니까? 위기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두 번째 약속은 곧 주님께서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니 열심히 달려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가만히 지나온 세월을 되돌아 보십시오. 우리가 어느 덧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많이 왔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이제 남은 과정만 달려가면 됩니다.


어제 권 목사님의 컴퓨터를 잠깐 보았습니다. 사모님과 유진이, 그리고 목사님까지 함께 찍은 사진을 보았는데, 이미 꽤 오래 전 사진인 것 같더라고요. 저는 권 목사님께서 그렇게 미남이었었는줄 몰랐습니다. 지금도 미남이시지만, 그 때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더라고요. 언제 찍은 사진이냐고 하니 한 3년 전쯤 찍은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습니다. 미국 와서 많이 고생하신 것 같습니다. 늙어가는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오심이 가까워오고 있습니다.

주님의 약속은 과거에 있지 않고 그 날, 미래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주님께서 그 날에 내게 주실 면류관을 가지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우리는 그 날을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뒤를 돌아보고 아쉬워하면 불행합니다. 그러므로 세월이 흐르는 것을 느낄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며 기쁨입니다.

그 때까지 우리는 힘써 우리의 믿음을 지키며 힘써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때로는 흔들리는 세상에서 살면서 불안하고 어려운 시간들을 보내기도 하지만, 우리에게는 확실한 약속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오심입니다. 아니면 우리가 주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그거나 그거나 본질적으로 같은 것입니다. 이 땅에서 더 오래 살고 싶은 사람은 주님께서 오시는 것보다 우리가 가는 것이 더 좋은 것입니다. 무엇을 더 기대하기에 더 오래 살기를 바라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것을 원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주님께로 가는 것을 택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주님의 오심에 대한 약속은 확실히 우리에게 큰 약속이며 소망입니다. 이 소망을 붙들고 사는 한 우리는 절망하지 않고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죽을 때까지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죽는 것조차도 소망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소망입니까? 여기까지 달려온 것을 감사하고 기뻐하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왜냐하면 주님을 만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종말의 승리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 위기 속에서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렇게 달려가기를 원하십니다. 삶의 편안함을 약속하시기보다는 삶의 열정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자기 욕망을 위한 경주가 아니라, 세상에서의 명예와 부귀를 위한 경주가 아니라 진정한 영적 승리 영원히 쇠하지 않은 하늘의 기업을 바라보며 달려가는 성도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종말의 승리를 바라보며 달려가는 성도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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