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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기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복음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은 백성이 될 때 우리는 흔히 그것을 중생이라고 합니다. 중생이란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미국의 크리스찬들이 흔히 진짜 그리스도인인지를 확인할 때 ‘당신은 born-again Christian이냐?’고 묻습니다. Born again Christian는 표현은 매우 진지한 말입니다. 다시 태어났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흔히 세상에서도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을 때 혹은 누군가의 은혜로 죽을 상황에서 생명을 건졌을 때 ‘나는 새로 사는 인생’이라고 고백하면서 남은 인생을 더 의미 있게 살려고 애쓰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믿음의 고백을 한 후 우리가 다시 태어났다고 하는 것은 그와 같은 이치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인생에서 최고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처음 믿을 때 참 큰 기쁨을 누립니다. 그만한 기쁨이 없고, 그만한 감격이 없음을 경험합니다. 세상과 다 바꿔도 바꿀 수 없는 구원의 감격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그런 고백을 하는 분들을 보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문제는 세월이 흐르면서 그런 마음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왜 예수를 믿은지 오래 될수록 그렇게 마음의 기쁨을 잃어버리는 것입니까? 물론 우리가 정말 믿음으로 살려고 몸부림칠수록 더 어려움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어려움은 우리의 마음을 일시적으로 누를 수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세상의 흐름을 거스리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정말 믿음의 본질을 알고 믿으려고 할수록 우리에게는 어려움이 더 커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는 기쁨도 또한 큽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믿음으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을 그냥 내 버려 두지 않습니다. 반드시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 은혜의 감격을 누리게 하십니다. 그런데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다 보면 세월이 흐를수록 뜨거운 믿음, 간절한 마음은 차갑고 서늘한 냉기가 느껴지는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스스로 자신도 그렇게 느끼고, 다른 사람들이 볼 때도 그렇게 느껴지게 됩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런 현상을 당연시 한다는 것입니다. 냉냉해지는 것이 마치 무슨 계급장이나 되는 듯이 생각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에 무슨 마음으로 오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냥 표정도 없고, 감정도 없고, 무감각한 모습 그대로입니다.

때로는 예수를 처음 믿고 열심을 내는 성도가 자기 믿음을 간증하고 나누고 싶어 무슨 말인가 하면 ‘그 때는 다 그런거야. 처음 믿을 때는 나도 그랬어’ 라는 말을 아무런 부끄러움도, 안타까움도 없이 말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 때의 그 뜨거운 마음을 회복하지 못해 안타까워하며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말을 자신도 모르게 또 한다면 정말 땅을 치며 회개하십시오. 그것은 정말 그리스도의 피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히브리 성도들이 처음에는 예수를 잘 믿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주님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아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만 꼭 그렇게 볼 수만은 없는 것 같습니다. 26절을 보면,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고 했습니다.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라는 표현은 예수를 믿은 것을 말합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믿음의 삶을 살다가 짐짓 죄를 범했습니다.  즉 믿음을 떠나 불신자처럼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무서한 심판이 기다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예수를 반드시 떠났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은 지금 여전히 예수를 믿는 믿음의 공동체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 서신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서신은 지금 예수를 떠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믿음이 많이 흔들리는 이들에게 그들의 믿음을 새롭게 세우기 위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흔히 겪는 문제, 예수를 믿는 연조가 많을수록 신앙의 열정이 식어지는 경험을 하는 우리들의 문제와 어쩌면 동일한 상황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히브리 성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믿음의 문제,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처음 신앙의 열정을 잃어버리게 하고 마치 예수를 믿기 이전의 상태처럼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까?


1. 믿음이 식어지는 첫 번째 이유는 신앙고백이 불확실하기 때문입니다.

29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29절 안에 우리의 신앙이 식어지는 세 가지 이유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신앙고백이 불확실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구속의 역사를 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인간을 대신해서 십자가 위에서 속죄의 제물로 돌아가셨다는 것은 그분이 하실 수 있는 최대의 것,         그분이 가장 아끼고 가장 귀하게 여기는 존재를 내어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고, 다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26절을 다시 보십시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즉 이렇게 주님의 은혜를 알고 난 후 다시 믿음이 식어진 경우는 다시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고 못박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논리적으로도 그렇고, 상황적으로도 그렇습니다. 동물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희생 제물이 되어서 십자가에 죽으셔서 인간의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는데, 그것을 부인하거나, 혹은 그런 신앙 고백을 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으로 돌아가거나 가슴이 식어진채 냉냉하게 살아간다면 그런 사람들에게는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다시 십자가에 죽어야 되겠느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기다리는 것은 무서운 심판 밖에 없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는 신앙고백의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것을 정말로 믿느냐 하는 문제를 점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믿는다고 생각하고 살아가지만 사실은 안 믿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혹 불확실할 수 있습니다. 입으로는 고백을 하지만, 삶으로 고백하는 것은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는데도 그렇게밖에 못 산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냉냉한 이유를 여러 가지로 제시합니다. 장래의 문제로 인해 근심함으로 믿음이 냉냉해질 수 있습니다. 부부 간의 불화를 겪을 때 믿음이 냉냉해질 수 있습니다. 때로는 교회의 문제로 냉냉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관계의 문제가 우리를 힘들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어떤 이유로도 예수를 떠나거나 신앙의 뜨거운 열정이 식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역사를 짓밟는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모든 것을 다 덮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놀라운 사랑이 그 모든 장애물을 넘어 고난과 어려움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음을 보여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에게 어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그 모든 것을 다 이기고 승리하게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 어떤 고난보다 더 크시기 때문입니다.

닉 부이치지라는 호주 청년이 있습니다. 그는 두 팔과 두 다리가 없이 태어났습니다. 단지 불과 10cm 정도만 되는 왼쪽 다리만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목사의 집안에 태어나서 8살이 되었을 때는 죽음을 생각할만큼 절망적인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못하는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악기도 다룰줄 알고, 운동도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는 온세상을 다 돌아다니며 행복을 전하는 전도사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장애보다 크시고, 우리의 장래를 책임져 주시며 부부의 사랑을 회복시키시고 관계를 극복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역사입니다. 죽음을 생명으로 회복시키십니다. 절망을 소망으로, 무기력을 능력으로 바꾸십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믿음의 고백을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은혜의 크기를 체험하지 못하고 부인하며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누리는 성도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식어진 믿음을 회복하는 첫 번째 길입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2. 믿음이 식어지는 두 번째 이유는 신앙 생활에 성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29절에 중간에 보면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긴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는 거룩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죄사함, 중생,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은혜를 부정한 것으로 여깁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입술로는 믿음을 고백하지만 삶은 전혀 그 고백에 걸맞게 살지 못합니다.

히브리 성도들 중에는 과거로 돌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예수님의 희생 제사도 좋지만, 구약 시대의 동물 제사도 제사 드리는 맛이 낫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구약 시대는 제사를 지내면 제물로 바쳤던 것들 중에서 먹을 것도 있었는데, 예수를 믿은 후로는 그런 것도 없다고 불평한 사람들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즉 이유 있는 불성실입니다. 신학적 오해가 신앙의 불성실을 가져옵니다. 자유, 본질, 이런 말들이 신앙적 성실을 빼앗아갑니다.

본질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많이 합니다. 일주일동안 아무렇게나 세상에서 살고는 주일예배 한 시간 예배 잘 드리면 그게 진정한 예배자가 되는 것인지에 대해 질문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런 질문을 오랫동안 하는 동안 오늘날 교회들은 한 시간 주일에 드리는 예배를 소홀히 하게 되었습니다. 삶이 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삶을 엉망으로 살면서 예배만 잘 드리면 뭐하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일주일 동안 열심히 살고 그 결과로 주일에 와서 한 시간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옳습니까? 아니면 일주일 동안 실패하고 주님의 자녀답지 못하게 살았지만, 주일에 주님 앞에 나와 한 시간 정말 전심으로 예배하며 믿음의 회복을 구하고, 새롭게 은혜를 받아 또 한 주간을 주님의 능력을 살아가는 것이 옳습니까? 어느 것이 더 복음적인가요? 전자의 경우 옳은 자세이긴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점차 예배를 소홀히 하게 됩니다. 오늘날 예배를 소홀히 여기는 현상이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예배가 나의 삶을 지배한다는 것을 잊고 살아갑니다.

얼마 전 어느 집사님께서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난 후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모처럼 앞에서 예배 드리니 은혜가 되더라.” 그런 것입니다. 예배가 나의 삶을 지배합니다. 만약 매 주일 예배 때마다 그런 마음으로 예배하다면 하나님게서 얼마나 우리이게 은혜를 주시겠습니까? 그냥 앞자리가 비어서 앞에 나와 예배를 드렸는데도 그렇다면 매번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는 마음으로 예배할 때 하나님게서는 정말 큰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오늘날 믿음이 주는 자유에 대한 오해로 인해 복음의 본질을 다시 혼란 가운데 빠뜨리고 있습니다. 마치 자유를 강조하는 것이 복음의 본질인 것처럼, 율법주의로 가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율법주의와 말씀을 지키기 위해 순종하는 삶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물론 우리가 열심히 살아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자는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 바른 삶의 모습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성실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마음이 회복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열심으로 주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은 해수가 많을수록 더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간절하고 깊고 커지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3. 믿음이 식어지는 세 번째 이유는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은혜에 민감하는 것은 믿음에 있어 매우 중요합니다. 본문에는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시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고, 우리가 약할 때 우리를 대신해서 기도해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 탄식하며 기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모릅니다. 우리의 마음이 식어지는 이유는 성령의 은혜를 구하지 않고, 그분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약할 때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구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식어지고 약해질 때 하나님께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은혜를 구하고 의지할 때 그분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도 인격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의지하고 구하지 않으면 그분이 우리에게 힘을 주시지 않습니다. 내가 그분을 밀어내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억할 것은 순종입니다. 불순종하는 마음을 성령의 은혜를 구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이 미워집니다. 너무너무 미운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어느 누가 많이 밉습니다. 죽도록 밉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저 같은 죄인도 사랑하셨으니 저도 그를 사랑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사랑할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니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기도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이것이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사랑할 마음을 주십니다. 사랑해야지 하고 결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랑할 마음을 주십니다.

그런데 간혹 스스로 사랑하기를 포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도무지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저런 사람은 죽어도 사랑하기 싫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런 마음을 먹었다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서 일하실 수 있겠습니까? 성령께서 그렇게 불편한 마음을 가진 성도의 마음 속에 들어와서 다른 일인들 하실 수 있겠습니까? 성령 하나님은 인격이 있으신 분입니다. 인격이 있다는 것은 지성과 의지와 감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의지적으로 무엇인가 하실 수도 있지만, 성도의 마음이 열려 있지 않으면 우리 안에서 불편한 마음으로 일하시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 식어지는 이유입니다.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연조가 많아져서 냉랭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으면서 종교적 행위에 안주하기 때문입니다. 주일예배를 출석하고, 십일조를 하고 봉사는 열심히 합니다. 교회가 돌아가는 것도 잘 압니다. 리더십이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혜를 구하지 않습니다. 아니 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성령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지 마십시오. 성령의 은혜를 구한다는 말은 내 생각, 내 판단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 판단으로 내 식어진 믿음을 합리화하지 마셔야 합니다. 성령을 의지함으로 내 생각을 그리스도께로 가져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성령의 힘을 얻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식어진 믿음을 회복하십시다. 우리는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들입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다시 살아나게 하신 예수님, 그분의 은혜는 다른 모든 문제를 극복케 합니다. 믿음의 고백을 분명하게 확인하면 세상을 이기는 승리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 생활 하나 하나에 성실하십시오. 예배에 성실하십시오. 모처럼 앞에서 은혜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매주, 아니 날마다 그런 은혜를 누리십시오.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다가 지치고 넘어질 때 성령께서 우리를 다시 일으키시고 도우십니다. 그러나 주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지 않으면 성령도 역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주의 은혜를 누림으로 식어진 믿음을 회복하고 믿음의 승리자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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