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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에 일본에서 지진이 일어나고, 쓰나미가 발생했습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엄청난 사상자와 피해가 집계되고 있습니다. 인간의 기술은 날로 발전되어 우주 정복을 꿈을 키우고 있지만, 정작 자신들이 살고 있는 발 밑에서 일어나는 일은 예측하지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재난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인간의 실수로 인한 인재가 있고, 인간의 손을 넘어선 천재지변이 있습니다. 어떤 것이든 그 규모와 파괴력이 갈수록 더 커지고 있습니다. 재난을 당한 이들, 목숨을 잃었거나, 혹은 가족을 잃고, 집을 잃고, 슬픔을 당한 그들에게 위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왜 세상에는 이런 재난이 계속 일어나는 것입니까?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세상에 재난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세상에 재난이 일어날 때 사람들 마음 속에는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두려움은 인간에게 두 가지 반응을 가져옵니다. 하나는 방종이고, 다른 하나는 경건입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재난, 선과 악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닥치는 재난은 인간으로 하여금 사회적, 윤리적 타락을 부추깁니다. 결국 삶의 방향을 잃어버리고 방종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은 허무함을 경험하고, 쾌락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아마도 일본의 지진과 쓰나미가 수습된 후에 사람들의 마음 속에 찾아올 공허함과 무목적성, 열심히 노력해도 하루 아침에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찾아올 두려움과 삶의 방향성 상실을 더 심각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대부분 사람들 마음 속에 종말의식이 자리하면서 더 커지게 됩니다. 어쩌면 이렇게 세상에 종말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이런 재난을 맞을 때 더욱 경건해지기도 합니다. 그들은 인생의 죽음과 위기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진정한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돌아봅니다. 어쩌면 그런 재난이 자신에게 닥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자신의 옷깃을 여미면서 경건에 힘쓰는 것입니다.


이 양자 간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저는 전자를 종말 의식으로 인한 반응이라고 생각하고, 후자를 종말 신앙으로 인한 반응이라고 생각합니다. 종말 의식을 가진 사람은 재앙 자체에 대한 두려움을 갖습니다. 하지만 종말 신앙을 가진 사람은 재앙을 주관하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갖습니다. 이 둘 사이의 차이는 생각보다 훨씬 더 큽니다.

종말 의식을 가진 사람은 죽을까봐 두려워합니다. 더욱이 이유 없는 죽음을 경험할 때 아무 것도 손을 쓸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그들은 더 크게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종말 신앙을 가진 사람은 이런 상황을 만드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갖습니다. 결국 종말 의식을 가진 사람은 삶이 타락하고 방종을 일삼게 되지만 종말 신앙을 가진 사람은 경건함으로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1. 재앙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합니다.

여기에 두려움이라는 문제가 나옵니다. 동일한 두려움이 어떤 사람들을 타락하고 방종하게 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경건에 힘쓰게 합니다. 본문 19절을 보면, 두려움에 대한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여기에 두려움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담력이라는 말을 볼 수 있습니다. ‘성소에 들어갈 담력’ 여기 ‘담력’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서 전체의 배경이 되는 두려움을 이해해야 온전히 알 수 있는 단어입니다.

여기서 담력을 얻었다는 말은 그 이전에 두려움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두려움은 바로 지성소로 들어가는 자의 두려움입니다. 앞서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년에 한 번 대제사장이 들어가는 지성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죄를 회개하지 않은채 지성소에 들어가면 대제사장은 죽어 나왔습니다. 이것은 단지 대제사장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사건을 경험할 때         그것이 곧 자기 백성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았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계명을 받고 내려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겼었습니다. 이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면서 그들을 진멸하고 모세로 하여금 큰 나라가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10절). 이 말씀은 곧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범죄한 이스라엘을 진멸하실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지성소에 대한 두려움은 이런 하나님의 진노에 근거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말씀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지성소의 두려움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상황에서 그 의미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지난 금요일에 일어난 일본의 지진과 쓰나미를 보면서 여러분들은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하나님은 도대체 왜 그러시는거야! 하는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의심을 품고 지나가셨습니까?

오늘 우리가 과연 그런 엄청난 재앙 앞에서 하나님을 여전히 믿고 그분 앞에 나아가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늘 그 답을 가지고 이 자리까지 오셨습니까? 우리가 얻어야 할 가장 중요한 답은 바로 그 사건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제사장이 죽어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과연 정말 하나님은 살아계시구나 하고 깨달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즉 일본의 지진과 쓰나미를 보면서 우리는 자연 재해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연 재해 자체를 두려워하는 마음은 우리의 마음을 공허하게 하고, 갈 방향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는 우리가 더욱 경건에 힘쓰게 되고, 결과적으로 담대함을 갖게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그런 재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까? 왜 하나님은 무차별적인 재앙으로 인류를 곤경에 빠뜨리시는 것입니까? 누가복음 13장 4-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알다가도 모를 것 같은 말씀입니다.

실로암에서 망대, 즉 높은 탑이 무너져서 열 여덟 명이 죽었습니다. 그들이 죽은 것이 그들의 죄가 예루살렘에 거하는 사람들보다 더 많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라.” 그들이 죄가 더 많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예루살렘 사람들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동일하게 망한다고 하십니다. 그들도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로암 망대에서 죽은 이들의 원인은 애매하게 매듭을 짓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하시고자 했던 말씀의 핵심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죄의 유무를 말씀하기 전에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심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 재난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결국 다 죽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선언입니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브리서 9장 27절의 말씀입니다. 결국은 다 죽습니다. 결국 모든 인간이 다 죽는다면 그 죽음의 상황에서 우리에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심판입니다. 죽음이 아니라 심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죽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죽은 후에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어떻게 죽는가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요한만 빼고 모두 순교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순교했고, 어떤 사람은 톱으로 켜서 순교당했고, 또 어떤 사람은 껍질을 모두 벗긴채 순교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죽는 것 중에 가장 좋은 방법은 연세가 들어서 그저 잠자듯이 죽는 것입니다. 모두가 이렇게 죽기를 원합니다. 모두가 그렇게 죽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들은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고통 중에 가장 큰 고통이 죽음의 고통이라고도 말합니다. 누구든지 한 번은 다 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공평함이 있습니다. 더욱이 지진이나 쓰나미 같은 재앙으로 인한 죽음은 누구에게도 차별이 없습니다. 지위고하, 빈부귀천을 불문하고 동일하게 찾아오는 죽음의 세력은 우리 모두를 하나님 앞에 동일하게 서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이 때 자연의 재앙에 대한 두려움에서 그 재앙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으로 바뀝니다.

우리가 세상을 두려워하고 세상의 재난을 두려워하면, 우리는 살아날 방법이 없습니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이번 재난으로 인해 죽었습니다. 그들의 죽음이 안타깝지만, 정말 안타까운 사람들은 그들의 죽음을 보고 두려워 떠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할 대상은 자연의 재앙이 아닙니다. 우리의 두려움은 하나님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바로 나아가게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우리는 죽음을 극복합니다.


2.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성소로 들어갈 담력을 얻게 합니다.

19절을 다시 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예수의 피를 힘입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생 제물이 되셔서 친히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만약 재난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세상을 운행하신다면 오늘 재난 앞에서 우리의 문제는 결국 하나님과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를 징벌하십니다. 인간은 자기 죄를 압니다. 그래서 천둥이 치고 재난이 올 때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당해야 할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 전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서 속죄 제물로 죽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당한 모든 고난과 죽음을 감당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히 속죄의 길을 열어놓으셨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이 죽음은 인간이 담당해야 했던 심판의 죽음이었습니다. 죄의 결과로 얻은 죽음이었습니다. 이 죽음에 두려움이 있었고, 이 죽음에 단절이 있었고, 이 죽음에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음의 두려움을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죽음 앞에서 두려움을 겪으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8절을 보면,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음의 상황으로 몰려가시면서 슬픔과 고통이 엎습해 오는 것을 경험하셨습니다. 이것은 죽음의 두려움이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십자가 죽음에서 하나님과의 단절을 경험하셨습니다.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27:46)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단절을 경험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고개를 돌리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경험하셨습니다. 그분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완전히 탈진하실 때까지 채찍으로 맞으셨고, 자기 힘으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까지 가실 수 없을만큼 탈진하셨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그분은 ‘내가 목마르다’고 외칠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으로 인해 올 수 있는 두려움과 고통, 관계의 단절까지 경험하셨습니다. 예수께서 희생 제물이 되셔서 지성소로 들어가시면서 모든 두려움과 슬픔, 단절됨과 고통을 모두 짊어지고 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셨습니다. 우리가 짊어졌어야 할 죄와 사망의 권세를 예수님께서 친히 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우리에게는 죽음의 두려움이 사라진 것입니다. 심판의 두려움이 사라진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죽음 이후에 찾아올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희생 제물이 되어 주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심판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고통, 두려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의 외면 당하심을 겪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들에게는 심판의 두려움이 사라진 것입니다.


지진과 쓰나미, 그리고 각가지 재난과 사고를 보면서 우리는 두려워하기도 하고, 세상의 종말에 대한 두려움을 갖기도 합니다. 우리 자녀들은 장차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염려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죽음의 두려움과 고통, 공포와 단절을 거둬가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모두 현상적인 것들일 뿐입니다.

사실 그런 재난들은 모두 하나님의 심판의 사인(상징)들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결국 죽고 말망당할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믿은 후 그런 죽음들은 더 이상 우리에게 위협이 되지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미 십자가에서 그 모든 죽음의 세력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상의 재난들은 그 그림자일뿐이요. 그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음을 주관하는 역사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혹 우리에게 그런 죽음이 덮친다고 해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바로 죽음의 세력을 이기신 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죽음을 향해 이렇게 비웃고 조롱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5-58절입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이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우리는 이 말씀들을 보면서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는 죽음의 참혹한 현장을 보면서도 항상 그 이면에는 하나님이 계심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세상의 재난이 심판이 아니라 진짜 심판은 그 후에 있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렇습니다. 세상의 예기치 못한 재앙들은 진짜 심판이 아닙니다. 진짜 심판은 그 후에 있습니다. 그 사람이 편안하게 죽었든, 아니면 정말 못쓸 재앙으로 죽었든 상관없이 진짜 심판은 그 다음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믿습니다. 그분의 하시는 일이 공평함을 믿습니다. 이것을 믿으면 담대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담력을 가지고 지성소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담대함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두려움은 성도의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에 보면 십자가에 죽은 지 삼일만에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세상의 재난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짜 심판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평강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3. 성소로 들어가서 담력을 얻는 자는 믿음, 소망,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삶의 문제가 나옵니다. 각 가지 난리와 지진, 기근의 소식을 들으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하겠습니까? 성경은 세 가지 권면을 우리에게 합니다.

첫째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믿음은 지금까지 말씀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구원의 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성소로 나아갈 담대함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사는 것입니다. 두려움의 근원은 세상의 재앙에 있지 않습니다.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들을 때, 지진과 쓰나미의 소식을 들을 때, 혹은 가까운 친척과 지인들의 고통과 죽음의 소식을 들을 때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저주받은 것도 아니며, 심판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짜 심판은 그 후에 있음을 우리는 믿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을 붙드십시오. 이 진리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소망을 굳게 잡는 것입니다. 23절에 소망을 굳게 잡으라는 말씀 전에 나온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미쁘시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신실하시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약속을 변개치 않는 분이십니다. 민수기 23장 19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지키시는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소망을 굳게 잡을 수 있는 이유는 그분의 신실하심에 있습니다. 당신의 아들을 내어놓으면서도 당신의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는 분께서 우리 개개인을 향한 구원의 역사를 결코 흔들리지 않고 성취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함을 갖습니다. 지성소로 나아가는 담대함을 갖고, 세상의 재난과 어려움에서 담대함을 갖습니다.

셋째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흉흉하고 어려우면 사람들의 인심이 사나워지고 어렵게 됩니다. 내 먹을 것조차 챙기기 어려운 시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법은 더 엄격해지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강퍅해지고, 결국 사랑과 선행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세상의 흉흉한 소식들이 들려오고 재난의 소식을 들을 때 성소로 나아가는 두려움이 우리에게 있을 때 우리는 서로 사랑하기를 힘쓰고, 섬기는 일에 더욱 힘써야 함을 말씀합니다.

사랑하십시오. 성도를 돌보고 힘써 사랑하십시오. 인상 쓰지 말고 즐거움과 기쁨으로 성도를 권면하며 돌보십시오. 성도는 섬기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를 경험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언제 종말이 오든지,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든지, 아니면 우리 개인이 종말을 맞든지 언제든지 항상 기쁨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는 것이 성도의 가장 큰 행복이며 기쁨입니다.

그런 준비가 된 사람만이 진정으로 이 땅에서도 삶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자녀는 낳는 것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다음 세대는 어떻게 살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 땅에서 주님의 나라를 가려면 우리는 어차피 한 번은 죽음의 터널을 건너야 합니다. 하지만 그 죽음은 더 이상 우리에게 두려운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제 주님의 나라를 사모하면서 그 날을 기대함으로 오늘을 열심히 기쁨으로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런 은혜가 충만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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