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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은 한 해의 농사를 지은 후, 하늘에서 비를 내려 주시고, 햇빛을 주시며 농사를 풍성하게 열매 맺도록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본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봄과 가을에 두 번 맥추절과 초막절을 지켰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전에는 이렇게 두 번 감사의 절기를 지켰습니다. 오늘날은 추수감사주일만 지킵니다. 그것은 삶의 변화로 인한 것입니다. 농경사회였을 때는 보리 추수를 마치고 감사의 예배를 드렸고, 가을에는 추수감사주일을 지켰었습니다. 최근부터 한국에서는10월 중순 경에 주로 추수감사주일만을 지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11월 셋째 주일에 추수감사주일로 지킵니다. 이 날은 미국의 추수감사주일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리고 미국의 가장 큰 명절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 의미를 더 살릴 수 있다는 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의미는 11월 마지막 주일에 교회력에 의하면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이기 때문에 더 의미가 있습니다.

추수감사주일이 지나면 바로 대강절이 옵니다. 대강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성탄절을 준비하고 맞이하는 네 주간을 말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추수감사주일은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이 되어서 한 해 동안 우리를 지켜주시고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예배를 드리는 주일입니다. 이렇게 추수감사주일은 그 시대마다 상황에 따라 달리 드려졌지만, 변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한 해를 돌아보며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립니다. 성도님들은 해를 보낼 때마다 어떻게 어떤 마음으로 보내십니까? 감사합니까? 후회합니까? 아니면 아쉬움으로 보냅니까? 감사한다면 무엇을 감사하십니까? 집을 사셨습니까? 자동차를 사셨습니까? 아니면 돈을 많이 버셨습니까? 혹은 직장에서 승진을 하셨습니까? 혹 복권에 당첨되지는 않으셨습니까?


저는 올 하 반기에 세 번의 큰 복통을 앓았습니다. 복통은 항상 한 밤중에 시작해서 꼬박 세 시간을 지속했습니다. 처음에는 잠이 깰 정도로 아프다가, 서서히 심해져가고, 아직 죽어보지 않았지만, 정말 거짓말 안 보태고 죽기보다 더 고통스럽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일 마지막 통증은 지난 수요일 새벽이었습니다. 특별새벽기도회가 있었는데, 새벽녁까지 세 시간을 꽉 채우는 통증을 겪어야 했습니다. 통증이 겨우 멈추고 겨우 나와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아플 때는 그냥 다 포기하고 강단에 올라옵니다. 그런데 제 아내가 그날 설교에 제일 은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목사가 아프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목사가 겪는 가장 힘든 일중에 하나입니다. 하다하다 안 되어서 내려놓으면 그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아무튼 저는 이 일로 인해 제 건강에 대한 분명한 문제를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이제 건강을 신경 쓸 때라고 충고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신경을 써야하는지 몰랐는데,         이제 무엇을 해야할 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감사했습니다.

지난 주간에도 샬롯츠빌에 나이 많지 않은 분이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암의 가장 큰 문제는 심각해질 때까지 통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죽을만큼 힘들었지만, 통증을 아주 분명하게 느꼈고, 아픔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아플 때 정말 좋은 것은 제 아내가 저에게 훨씬 더 잘해 준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어느 성도님이 사진을 찍어주셨습니다. 빨간 옷을 입고 찍었는데, 아주 잘 나왔습니다. 저는 제가 그렇게 잘 생겼는지는 정말 몰랐었습니다. 그래서 facebook 대문 사진으로 올려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보인다고, 젊어보인다고 하는 칭찬을 해 주었습니다.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나이가 들지 않은 사람에게 무슨 젊어 보인다는 말을 하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말을 해 주셨습니다. 빨간 티가 어울린다는 것은 나이가 들어가고 있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 이야기도 좋았습니다. 저는 왠지 아직도 나이가 들어가는 것이 그리 기분 나쁘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왠지 해야할 일들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감사했습니다.


1. 감사는 상황의 변화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관점의 변화로부터 옵니다.

성도님들은 무엇으로 인해 감사합니까?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모든 상황에서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깊이 봐야 합니다. 이 말씀은 분명 평범한 말씀은 아닙니다. 모든 상황에서 감사하라고 말합니다. 도대체 그것이 가능한 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왜 모든 상황에서 감사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감사란 상황의 변화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어떤 일들이 잘 될 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감사는 관점의 변화로부터 옵니다. 감사는 우리의 생각이 변할 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상황이 변하면 우리가 더 감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이 잘 되고, 자녀들이 좋은 대학에 가며, 사업에 성공하면 감사하는 마음이 더 커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맞을 수 있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니요. 사실 대부분 상황의 변화로부터 감사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어느 치과병원 대기실에서 두 할머니들이 대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분들은 귀가 잘 들리지 않아 서로 크게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한 할머니가 다른 할머니에게 남편이 죽은 후 몇 년 동안 자신의 삶이 얼마나 외로웠는지를 말했습니다. 수입은 고정되어 있었고, 그로 인해 제한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할머니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부유한 신사 할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값비싼 모피 코트를 사 주었습니다. 운전수와 함께 리무진 승용차를 보내어 이 할머니를 만찬에 초대하기도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관심이 있었음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할머니에게 근심거리가 생겼습니다. 이 할머니는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아마도 자신이 이동식 주택에서 사는 것을 안다면 그 신사가 여전히 자신을 좋아할까?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남의 말을 잘 알아 듣지도 못하고, 더구나 관절염까지 앓고 있다는 것을 알면 아마도 그 신사는 자신을 더 이상 만나주지 않을 것이라고 염려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할머니는 그 신사의 사랑과 관심, 배려와 우정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까? 아니면 잘 들을 수 없어서 그 신사와 더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없을 것이고, 그로 인해 더 이상 만남이 지속될 수 없다는 염려에 대해 유감스러워하며 근심해야 하겠습니까? 이 할머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옆에서 보면 우리는 충분히 이 할머니의 입장에서 감사할 것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만큼 관심을 받은 것만으로도 감사하지!’ 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사자가 되면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나 아쉽겠습니까? 조금만 더 젊었더라면, 조금만 더 예뻤더라면, 조금만 더 귀가 잘 들렸더라면, 조금만 더 키가 컸었더라면, 조금만 더 공부를 잘 했었더라면, 조금만 더 돈이 많았더라면, 얼마나 조금만 조금만 하면서 아쉬워합니까? 이것은 그 할머니의 모습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감사는 상황의 변화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 할머니는 한 노 신사의 관심이라는 커다란 상황의 변화가 있었지만, 그로 인해 그는 더 아쉬워하고, 더 유감스러워하고 있습니다. 감사는 관점의 변화로부터 옵니다. 어디서부터 보느냐가 감사 여부를 결정합니다.


2. 감사는 명령입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그냥 감사는 뭐든지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된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을 다시 보십시다. “범사에 감사하라.” 여기서 말씀하는 감사는 약속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 감사할 일들이 많아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예수를 믿으면 모든 상황에서 감사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 명령에 순종함으로 감사하게 됩니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은 치료하는 한 정신과 의사가 6주간 사용할 간단한 치료법을 처방했습니다. 이 의사는 우울증 환자를 치료할 때마다 이런 처방을 주었습니다. “앞으로 누군가가 당신에게 호의를 베풀 때마다 미소를 머금고 “감사합니다.”라고 힘주어 말하세요.”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의 환자들은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선생님, 나를 위해 무엇이든 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때 이 의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바로 그것이 당신의 병입니다. 감사할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 말입니다.” 이것은 무조건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감사할 조건을 찾으라는 명령입니다. 그런 일은 당신이 감사할 조건을 찾기 전에는 결코 저절로 당신에게 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감사하라는 말을 계속 했습니다. 골3:15,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엡5: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빌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와 빌립보서, 골로새서에서 연속적으로 감사할 것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서신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 편지들은 모두 사도 바울이 감옥 안에서 쓴 편지들입니다. 바울은 감옥 안에 있으면서 감사하라고 성도들에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떻게 이런 감사가 가능하겠습니까? 아니 감사할 조건을 주어야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여기 우리 가운데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아니! 내 형편이 되어 보라고’ ‘그러면 감사하라는 말이 안 나올 거야.’ ‘감사하라는 말은 아직 정말 힘든 일을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혹은 이런 생각을 하는 분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아니! 그렇게 억지로 감사하면 삶이 얼마나 고달플까? 감사가 안 나오고, 불평이 나오면 그냥 한 번 아무나 붙들고 풀어야지, 그것을 참으면 병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이 그런 방향으로 말합니다. 사람이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정적으로 격해 있으면, ‘나 지금 짜증나 있어’라고 말하라는 것이죠. 그 말이 맞는 면도 있습니다. 자기 마음을 잘 표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맞습니다. 저도 오래 전에 그런 책들을 보면서 그렇게 해 보았습니다. 주변이 사람들이 점점 저를 멀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 마음도 거칠어졌습니다. 마음이 아주 황폐하게 되어 버립니다.

이것을 인위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그런 분들은 아직 감사를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순종을 원하십니다. 순종은 본래 납득되지 않는 것에 대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말씀했으니 그대로 감사해 보십시오. 어느 순간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기쁨과 감사의 마음들이 회복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왜 감사가 명령형입니까? 감사는 상황의 변화로 인해 나오는 자동적인 감성적 반응이 아닙니다. 감사는 감성적으로 나오는 자연발생적인 반응이 아닙니다. 감사는 인격적으로 의지적인 순종의 행위입니다. 여기에 감사가 명령형으로 선포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 감사를 명령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감사가 바로 우리의 삶을 회복시키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명령도 수없이 많이 나옵니다. 찬양하라,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호흡이 있는 자들마다 다 여호와를 찬양하라. 할렐루야”(시150:1). ‘호흡이 있는 자들아!’가 아닙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라고 말씀합니다. 코에 호흡을 하는 모든 자에게 찬양을 명령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찬양과 불평을 함께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감사와 원망을 함께 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합니다. 감사와 불평은 함께 나올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감사하면 불평은 자연히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찬양할 마음이 있어야 찬양을 하지’라고 말하는 사람은 평생 찬양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감사의 이유가 있습니다. 여기에 찬양의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은 감사하라고 명령하시고는 그 명령에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순종하면서 주님을 따라올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진정한 감사의 능력을 맛보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찬양할 때 소리내어 따라해 보십시오. 잘 몰라도 가사라도 따라서 해 보십시오. 하니님 앞에서 뭐를 주저합니까? 적극적인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감사는 명령입니다. 생각이 정리되기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제가 좀 그런 스타일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좀처럼 잘 따라가지 못하는 면이 있습니다. 제가 이해하기에는 여기 앉아계신 분들 대부분이 그런 경향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범사에 감사하라.” 이 말이 명령형으로 되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3. 감사의 약속(결과)은 진정한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감사의 명령에 순종할 때 그 결과(약속)는 진정한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감사의 절정은 예배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다소 소홀히 여기는 경향이 많습니다. 예배는 우리의 중심을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입니다. 아니 예배는 우리의 중심만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서 그분을 대면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우리의 가장 깊은 곳을 주님 앞에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 중에 그분과 가장 깊은 대화가 나누고, 가장 친밀한 관계를 경험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예배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도, 감사도, 기쁨도, 만나고 싶은 마음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만나면 악수를 하듯이, 그리고 악수는 서로 반갑다는 마음을 주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그런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물론 예배에서 어떤 감정적인 느낌을 추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우리가 무미건조하게 예배자로 서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영적 상태는 바로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감사는 예배 안에서 표현되어야 합니다. 찬양으로, 기도로, 시선으로, 자세로, 마음가짐으로, 그리고 우리의 언어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 자신의 모습에서 예배에 대해 지나치게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모습을 봅니다. 아무 느낌도 없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20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우리의 삶에서 성취되기 때문에 그 말씀을 들을 때 ‘아멘’하라는 것입니다.

아멘이 무엇입니까? 아멘은 ‘진실로 그렇습니다’하는 뜻입니다. 진실로 그것이 맞습니다. 진실로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진실로 그 말씀을 믿습니다 하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아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반응할 때 가장 빈번하게 해야할 표현입니다. 뭐 아멘을 군인들의 구호처럼 외치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이런 점에서는 많이 부족합니다. 기도를 해도 아무 소리도 없고, 찬송을 하면 조금 소리 나고, 설교를 해도 그렇고 그렇습니다.


자녀를 키우시다가 이런 경험 한 번씩 해 본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사춘기가 되면, 부모님이 뭘 말해도 대답도 없고,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그러면 엄마가 소리를 칩니다. ‘도대체 들은 거냐 못들은 거냐?’ 그러면 대개 아들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다 듣고 있어.’

이것이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우리가 마치 그렇게 예배한다면 그 예배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받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감각이 없으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훨씬 더 예민하게 느끼시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의 감성까지도 만드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심으로 그분께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감사는 예배를 통해 올바른 반응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찬송과 기도, 그리고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아멘하여 우리의 마음을 그분께 드려야 합니다.

모든 것은 표현되어야 합니다. 언젠가 말씀을 따로 전할 계획입니다만 요즘은 묵상 기도에 대해 많이 강조합니다. 침묵 기도입니다. 내년에 오실 부흥회 강사 목사님도 그런 면을 강조하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한 가지 점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께 소리를 내서 기도해야 하느냐고 반문합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이미 다 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 대화를 원하십니다. 대화라는 것은 지적인 정보만을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감성과 의지까지도 함께 전해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듣지 못하실까를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으로 솔직히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표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모르실까봐가 아닙니다. 그런 솔직한 표현이 우리의 모습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기도와 찬송, 말씀에 대한 반응에서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들들은 보통 무뚝뚝하게 사랑을 표현합니다. ‘엄마 사랑해.’ 그정도 하면 다행입니다. 그러나 딸들을 보통 가까이 와서 볼을 비벼대고, 아빠 일찍 주무세요. 하면서 잔소리를 해 댈 때 그것에 사랑입니다. 그거 모르는 것 아니지만, 그런 충분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인간에게 꼭 필요한 일입니다.

그것을 누가 만드셨습니까? 그것을 바로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물론 침묵 기도가 필요하지만, 그리고 우리는 어떤 면에서 침묵기도도 훈련할 필요가 있지만,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우리의 감성과 의지, 지식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예배입니다. 감사는 수동적일 수 없습니다. 감사는 소극적일 수 없습니다. 감사는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라는 명령에 순종할 때 우리는 그 안에서 놀라운 주님의 은혜와 사랑, 능력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은혜가 가득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모두 삶이 곤고하고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는 명령입니다. 감사의 명령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회복시키십니다. 감사는 적극적인 것입니다. 감사는 반응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의 마음에 감사가 넘치게 하소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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