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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개인적으로 성경 말씀 중에서 특별하게 은혜를 받는 말씀 중에 하나는 출애굽기 14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해서 홍해를 건너는 장면입니다. 홍해 앞에 선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애굽에서 나와서 모든 것이 해방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못가서 홍해를 만나고, 그 앞에서 더 이상 나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뒤에서는 애굽의 왕 바로가 군대를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당황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하면서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다’고 하면서 불평했습니다.

이 때 모세가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14:13-14) 저는 이 말씀을 볼 때마다 흥분합니다. 너무 놀랍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신비로움입니다.

이런 위기 속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권면하는 것은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모세는 두 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는 ‘신앙의 수동적 역동성’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아니 아무 것도 해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도 갈 수 없고, 뒤로도 갈 수 없습니다. 그곳에 그냥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포자기가 아니라, 실패의 늪에 빠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기대하는 소망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즉 표면적으로는 수동적으로 서 있지만, 그 수동성은 하나님의 역동적인 역사를 기대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기를 기대하는 믿음의 자세입니다.

이런 모습은 성경에 수없이 나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불 속에 들어가면서도 소망을 잃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실을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수동적으로 그 상황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있으셨지만, 십자가의 고난을 그대로 담당하셨습니다. 그것은 그 수동성 안에 하나님의 적극적인, 역동적인 구원 계획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수동적 모습 안에서 엄청난,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러한 놀라운 비밀을 발견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 내용

본문은 보아스가 룻의 요청을 받아서 나오미와 룻의 기업 무를 일을 처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오미의 기업을 무른다는 것은 전에 나오미와 그의 남편 엘리멜렉이 베들레헴을 떠나기 전에 가지고 있던 땅에 대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백성들이 다 자기 땅을 소유하게 되어 있었고, 혹 중간에 어떤 일로 가난해져서 땅을 팔게 되더라도 50년이 지나면 다시 원주인에게로 돌려주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나오미에게 이 땅은 어떤 상태였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습니다. 나오미가 전에 베들레헴을 떠나기 전에 이 땅을 팔고 갔었다면 자기의 기업 무를 자가 이 땅을 대신 사서 나오미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오미의 땅이 여전히 남아 있는데, 나오미의 삶이 궁핍해서 땅을 팔아서라도 생계를 이어가야 할 상황이었다면 그 땅을 기업 무를 자가 사 주고, 그 돈으로 나오미와 룻이 생계를 이어가도록 돕는 과정이었습니다.
        
여기서 기업 무를 자는 가장 가까운 친족들이 감당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나오미의 기업 무를 자는 두 사람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보아스였고, 다른 한 사람은 이름은 밝혀지지 않는데, 본문 1절에 ‘아무개’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나 ‘아무개’가 보아스보다 나오미의 더 가까운 친족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우선권이 있었습니다. 보아스는 이 일을 위해서 성문 앞으로 갔습니다. 성문은 당시 재판 장소로 종종 사용되었습니다. 보아스는 성읍의 대표들인 열 명의 장로들을 불렀고, 또 ‘아무개’도 불렀습니다.


그리고 장로들이 듣는 가운데 ‘아무개’에게 나오미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나오미에게 기업 무를 자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녀를 위해 기업 무르는 일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당신과 나 두 사람밖에 없다. 당신이 기업을 무르게 되면 좋고, 만약 그렇지 않으면 아니라고 말해 주라. 그러면 내가 나오미의 기업을 무르겠다’고 말합니다.

아무개가 선듯 나오미의 기업을 무르겠다고 대답을 합니다. 아마도 보아스가 조금 당황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다시 한 가지 조건을 덧붙입니다. ‘그런데 당신이 나오미의 기업을 무를 때 그의 자부 룻과 결혼을 해서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을 통해 나오미의 남편의 이름을 잇게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아무개는 기업을 무르겠다고 하던 약속을 취소합니다. 그 이유는 자기에게 손해가 있을까 염려해서라고 자기 입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개는 아마도 나오미의 기업을 무를 경우 나오미는 결국 자식이 없이 죽을 것이고, 그러면 기업을 무렀지만, 결국 땅은 자기 것이 될 것을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룻과 결혼을 해서 그를 통해 낳는 자식에게 땅을 상속하게 되면 그것이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이것이 본문 앞 부분의 내용입니다. 이 내용에서 보아스의 처신에 대해 한 가지 불만스런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보아스의 일 처리하는 방식입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보아온대로 보아스는 룻에게 매우 친절했습니다. 많은 것들을 도와주었고, 지난 밤에는 룻이 찾아와서 시어머니의 기업 무를 자가 되어주고, 자신과 결혼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자신을 찾아온 룻을 보면서 보아스는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분명 룻의 청혼을 간접적으로 수락한다는 표현이었습니다. 물론 그는 자신이 나오미의 첫 번째 기업 무를 자가 아니기 때문에 자기 임의로 결정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룻의 의향을 알았고, 룻을 도울 마음이 있음을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보아스의 자세는 전혀 적극적이라고 보기에는 뭔가 부족해 보입니다. 그는 모든 결정권을 ‘아무개’에게 완전히 위임해 버립니다. 그로 하여금 먼저 결정하게 합니다. 남자가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보아스의 수동성

여기서 우리가 고민하는 문제는 무엇입니까? 만약 이 사건이, 아니 보아스가 룻의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우리가 살아가는 믿음의 삶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믿음은 너무도 약한 기반 위에 세워졌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무슨 말입니까? 보아스가 이 일의 결정을 아무개에게 맡긴 것은 그리고 아무개의 결정에 의해서 룻의 인생이 좌우되도록 하게 맡기는 것은 너무 무책임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게 아무에게나 의해서 좌우되어도 되는 것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주관하신다고 믿는데, 이렇게 책임 없는 사람의 손에 의해 내 인생이 결정될 수 있는 것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보아스의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리더십을 안타까워하게 됩니다. 뭔가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문제에 접근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상대방의 의사에 의해 룻의 운명을 맡기고 결정되도록 방치한 느낌입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보아스가 모든 것을 다 아무개의 결정에 맡긴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전제 자체를 깨는 전혀 다른 믿음의 관점을 가지고 이 사건을 처리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1. 보아스는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그가 룻을 위해 사용한 방법은 정공법입니다. 보아스는 법정에서 기업을 무르고 룻과의 결혼을 추진함에 있어서 정당한 절차를 밟고 있습니다. 말씀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만약 아무개가 기업 무르는 일을 하겠다고 하고, 룻과의 결혼을 수락한다면 보아스의 의도는 좌절되고 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아스는 이런 정당한 절차를 통해서 일을 해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수동적인 자세같지만, 사실은 매우 정확한 율법의 방법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때때로 사역에 어려움을 겪을 때, 관계가 꼬이고, 오해가 생기고, 상처로 인해 아픔을 겪을 때, 도무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모를 때 조용히 묵상하며 가장 바른 길, 가장 성경적인 길을 찾게 됩니다.ㅏ

오늘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가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말씀이 제시하는 길을 가야 합니다. 삶이 혼란스러워지고, 가정에 어려움이 닥쳐 올 때, 자녀들이 방황하고 어려워할 때, 직장과 사업이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는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말씀에의 순종입니다. 철저하게 말씀을 따라 사는 것만이 위기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길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아스가 이러한 결정을 한 것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전략이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다른 방법을 사용하지 못해서 할 수 없이 대처하는 수동적 자세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전략이며, 지략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율법에의 길을 따른 것입니다.


물론 이 하나로만 본문을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말씀에의 순종은 그 순종이 길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때조차도 그 말씀을 좇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뢰를 보여줄 가장 중요한 순간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순간이 찾아온다는 것은 참 괴로운 시간일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들은 우리의 경험과 지혜로는 그 일의 미래를 가늠할 수 없는 상황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잠언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잠3:11-13). “내가 지혜로운 길을 네가 가르쳤으며 정직한 첩경으로 너를 인도하였은즉 다닐 때에 네 걸음이 곤고하지 아니하겠고, 달려갈 대에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훈계를 굳게 잡아 놓치지 말고 지키라. 이것이 네 생명이니라.”

주의 말씀은 우리가 어두운 길을 갈 때에 우리  발에 등불이 되어 주시고, 우리 길에 빛이 되어주십니다. 주의 말씀은 우리에게 지혜를 주셔서 삶의 혼돈 가운데 빠졌을 때 우리로 하여금 올곧은 길을, 승리의 길을 가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보아스를 통해서 주의 길을 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배워야 합니다. 주의 말씀은 우리를 첩경으로 인도합니다. 보아스의 어리석어 보이는 행위를 통해 우리는 그의 깊은 믿음과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으로 주의 길을 따라 승리하시길 축원합니다.



2. 보아스는 말씀의 핵심을 알았습니다.

두 번째로 보아스의 이해하지 못할 행동, 즉 대책없이 룻의 운명을 ‘아무개’에게 맡기는 그의 결단 안에는 율법의 문자에 매이지 않고, 율법의 중심(본래성)을 붙드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보아스가 아무개에게 나오미의 기업을 무를 것을 요청했을 때 아무개는 쉽게 수락했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에 바로 보아스는 아무개에게 나오미의 기업을 무르는 일과 함께 나오미의 며느리 룻과 결혼을 해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이것은 비겁한 전략이 아닙니다.

이것은 보아스가 아무개에게 두 가지 율법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즉 기업 무를 자가 되는 것, 즉 나오미의 고엘이 되어 주는 것과 또 한편으로는 계대수혼법에 의한 룻과의 결혼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만으로도 버거울 수 있는데, 보아스는 아무개에게 이 두 가지를 아무런 거리낌없이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율법의 본래 의도를 생각하면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나오는 기업 무르는 제도와 계대수혼법은 그 시대에 가장 어려운 상황에 몰린 사람을 돕는 제도입니다. 이것은 자기의 가장 가까운 친족을 돕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로지 고난 당하는 그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법이 동시에 지켜져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율법의 이런 중심 의도를 볼 때, 나오미와 룻에게 이 두 가지 법이 동시에 시행되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보아스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보아스의 의도는 바로 룻의 회복이었습니다. 룻을 살게 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룻은 여기서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이용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보아스가 아무개에게 룻과의 결혼을 요구한 것은 그런 면에서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아무개는 보아스의 정당한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는 자기 실체를 드러냅니다. 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그는 ‘무르지 못하겠다’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합니다.

아무개는 처음부터 나오미와 룻의 어려운 처지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기업 무르는 일을 통해 자신에게 어떤 이익이 오기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한다고 하면서 실은 남의 것을 취하고 싶은 악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보아스가 나오미와 룻을 살리는 이 상황에서 불들었던 것은 율법의 본래적 성취였습니다. 율법이 율법으로서의 역할을 온전히 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의 본래적 의미 그대로 그 시대에 드러나고, 빛을 비추게 하면 자연스럽게 악한 것, 어둠의 세력들이 드러나고, 그 정체는 밝혀지게 됩니다. 이것은 억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찾아서 색출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아스가 룻을 위한 율법의 계명을 바르게 적용할 때 아무개가 가지고 있던 옳지 못한 의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 사회가 부패했고 교회가 타락했다고 말하지만, 정말 심각하게 생각할 것은 우리 자신의 부패함입니다. 우리가 말씀 안에 거하면, 내 안에 있는 말씀의 빛이 자연스럽게 상대방의 불의를 드러냅니다. 보아스가 아무개에게 룻과의 결혼을 요구한 것은 그런 면에서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방법입니다. 보아스가 인간적인 방법으로 룻을 도와주려고 전략을 세웠다면 상처도 컸을 것이고,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아스가 오직 말씀 그 자체를 드러내려는 시도, 율법이 율법의 목적 그 자체를 드러내어 적용되어야 한다는 마음, 그것이 룻의 인생을 살리는 힘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말씀 아닌 것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교회를 얼마나 어지럽히는지 모릅니다. 이로 인해 교회는 한없는 혼란과 어려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말씀의 진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지에 대해 들어야 합니다. 진리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비진리가 교회를 뒤업고, 비진리가 사회를 혼란 가운데 빠지게 할 때 진리의 음성을 듣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진리의 음성을 듣게 되면, 주의 말씀을 듣게 되면, 교회는 회복되고, 사회는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교회를 위해 염려하고 안타까워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걱정할 일은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진리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드러나면 비진리는 무너지고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다. 주의 말씀이 우리를 회복합니다. 말씀을 붙들면 우리는 조금도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말씀 안에 힘이 있고, 말씀 안에 길이 있고, 말씀 안에 회복이 있습니다.



3. 보아스는 결과로부터 자유로웠습니다.

며칠 전 한 밤 중에 룻이 보아스를 찾아왔습니다. 룻은 표면적으로는 나오미의 기업 무를 책임을 감당할 것을 보아스에게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룻의 요청은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한밤 중에 다가온 룻을 보고 놀란 보아스에게 룻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것을 결혼을 통해 자신을 거두워달라는 청혼입니다.

보아스의 말을 보면, 룻은 보아스와는 나이 차이가 꽤 나는 젊은 여성이었습니다. 보아스의 마음도 룻에게 많이 가 있었음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이 일이 어떻게 결정되든지 그것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으로부터 자유했습니다.

이것은 나오미와 룻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난 주에 보았듯이 나오미와 룻은 앉아서 보아스를 통해 올 대답을 기다렸습니다.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알기까기 앉아 있으라”고 나오미가 룻에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사건의 결말을 결론내리지 않았습니다. 어디로 인도하든,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든 그들은 그것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보아스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은 룻이 잘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보아스의 가장 큰 관심은 룻을 아내로 취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룻이 기쁘게 살도록 삶이 회복되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이 허용하는대로 하나님께서 룻에게 허락한 은혜를 누리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룻기를 읽으면서 룻과 보아스가 결혼할 것을 전제하고 읽습니다. 그리고 그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보아스와 룻, 그리고 나오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우리는 룻과 보아스의 결혼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우리만의 생각일 뿐이었습니다. 아무개에게 모든 일을 일임하고 가슴 조이고 불안해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몫이었고, 보아스, 룻 그리고 나오미는 그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이 위기의 상황을 슬기롭고 편안하게 기다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와 함께 결혼하게 되면 더 없이 행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룻이 보아스와 결혼해야만 행복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것은 고집입니다. 그것은 욕망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물론 그렇게 되면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만약 룻이 잘 되는 일이 꼭 보아스와의 결혼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보아스는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사랑은 확실이 이타적인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이것은 부부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성간에 끌리는 마음은 결코 사랑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다른 대상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엄청 어려운 일이었지만, 사랑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인간이 죄로부터 해방되어 구원의 길을 열어 놓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기꺼이 감당하신 것입니다.

보아스는 지금 룻의 삶의 회복을 원했지, 자신과의 결혼에 초점을 두지 않았습니다. 보아스와의 결혼은 룻이 삶을 회복하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예리한 분별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자기가 사랑한다고 하는 여자들이 반드시 자기에게 와야만 행복할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저는 젊은이들이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를 놓치는 것도 어리석은 남자라고 생각하지만, 자기에게 와야만 그 사람이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대단한 착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에 실패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내가 그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패하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아무개로 하여금 그가 선택할 수 있게 했습니다. 다만 율법의 그 본래적 의미대로 아무개가 룻과 결혼할 수 있다면 말입니다. 그랬더니 룻은 보아스와 결혼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것이 지금 본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그 분이 길이십니다. 그 분이 진리이십니다. 그 분이 생명이십니다.



결론

우리는 보아스가 룻을 위해 일을 추진하면서 세 가지 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첫째는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그는 다른 어떤 방법보다, 비록 불확실한 것 같지만,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불안해 보일 수 있지만, 말씀의 방법을 따랐습니다. 율법이 제시하는대로 성문 앞에서 정식 재판의 과정을 밟았습니다.

둘째는 말씀의 핵심을 알았습니다. 보아스는 말씀의 진리가 결국 인간의 삶을 회복할 것을 알았습니다. 진리가 드러나면 비진리는 숨을 수밖에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무개에게 진리를 요구했습니다. 율법의 본래 정신을 기억하고 그대로 행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셋째는 결과로부터 자유했습니다. 결과는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이 일이 어찌될지 앉아서 기다리라는 나오미의 말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좇아야 할 명령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과에 붙들여 있고, 그 결과를 움직이는 과정에 대해 무관심합니다. 우리는 결과로부터 자유해야 합니다.


이 모든 원리를 하나로 정리한다면 그것을 ‘신앙의 수동적 역동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눈에 보기에 보아스의 행위는 매우 수동적이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하는 엄청난 역동성이 있습니다. 그러한 표면적으로 보이는 신앙의 수동성은 하나님의 사건을 역동적으로 세워가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비밀입니다. 이런 믿음의 비밀을 기억하고, 삶의 자리에서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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