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샬롯츠빌한인교회

주일설교

조회 수 3617 추천 수 21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옆에 있는 사람과 인사합시다. “당신을 통해 주의 은혜가 흐르기 바랍니다.” 진심을 담아서 인사해 봅시다. 우리에게는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교회에는 주님의 은혜가 흘러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도 귀한 것이지만, 그 은혜를 삶에서 고백하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은혜’란 어떤 일이 자동으로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은혜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져 주시는 선물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아들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나이, 건강, 한계를 넘어서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은혜가 있기까지 아브라함에게는 기다림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불가능한 상황 앞에 서 있어야 했습니다. 약속을 받은 후 25년 동안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나아가는 동안 실패와 좌절에 직면하는 과정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룻과 나오미, 그리고 보아스입니다. 나오미에게는 좌절과 절망이 있었습니다. 좌절은 소망이 있을 때 더 커지는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룻이 보아스의 밭에서 보리 한 에바를 주워 왔을 때 나오미는 눈에 커지고,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아스를 통해 자신들을 돕고 계신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순간 나오미는 더 큰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기업의 회복과 대를 잇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룻이 다시 신랑을 만나 결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 있던 꿈, 감히 드러내지 못했던 소망이         다시 꿈틀대며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꿈이 생기는 순간 그는 다시 절망을 경험합니다. 지나온 은혜, 보리 한 에바를 얻는 은혜는 놀라운 사건이었고, 감사한 일이었지만, 그의 마음에 솟아오르는 꿈은 보장할 수 없었습니다. 작은 은혜는 더 큰 꿈을 가지게 했지만, 그 꿈들을 기대하기에는 너무나 넘어서야 할 장애물들이 많다고 느낀 것입니다.

여기서 나오미는 절망을 경험합니다. 이것은 신앙인의 절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얻는 절망감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이런 절망, 즉 소망을 가지게 때문에 생기는 절망을 경험하게 하고 이런 절망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 더 기도하도록 인도합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을 성취하십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나오미가 그런 소망으로 인해 경험하는 절망의 순간에 멈춰서 그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인도하시는지를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추수가 거의 끝마쳐질 때쯤, 나오미가 룻을 보아스에게로 보냅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안식할 곳을 주어야겠다는 말을 합니다. 여기서 안식할 곳이란 가정을 이루어준다는 의미입니다. 나오미는 룻으로 하여금 오늘 밤 타작 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리고 난 후 그곳에서 잠을 잘 보아스를 잘 보고 있다가 다른 사람이 모르게 조용히 그에게 가서 그의 발치에 있는 이불을 들고 들어가라고 명령합니다. 물론 그 전에 목욕을 하고, 기름을 바르고, 깨끗한 의복을 입으라는 말도 잊지 않았습니다.

본문은 문화적으로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이것이 윤리적으로 과연 옳은 것이냐 그른 것이냐를 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은 당시 문화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충분히 납득할만한 상황이었고, 11절에는 여전히 룻이 현숙한 여인으로 인정받고 있음을 보아스가 말하고 있습니다. 나오미와 룻은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나오미는 그들이 기댈만한 법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계대 혼인법이라는 것과 기업 무를 자(고엘)의 법입니다.


첫째는 계대혼인법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형제 중 한 사람이 결혼을 한 후에 죽으면 그의 형제가 형수와 결혼을 해서 형을 대신해서 아들을 낳아주는 법입니다. 신명기 25장에 계대혼인법에 대한 규정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율법이 간접적으로나마 시행된 것은 창세기 38장에 나오는 유다와 다말의 관계입니다. 유다는 자기 며느리 다말을 통해 베레스와 세라를 낳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38장 26절에 보면, 유다는 다말을 향해서 “그가 나보다 더 의롭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말은 마태복음 1장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나와 있습니다.

이 제도는 가문의 대를 잇게 하는 매우 중요한 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대는 오늘날과 같이 여자 혼자 경제적 능력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여자들에게는 하나의 사회보장제도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둘째는 기업 무를 자의 법입니다. 이 법은 레위기 25장에 나오는 규정입니다. 기업 무를 자는 두 가지 일을 합니다. 하나는 자기 친족 중에 가난과 어려운 재난으로 인해 땅을 잃어버릴 경우 가까운 친족이 이 땅을 대신 사 줘서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는 제도입니다.

히브리인들은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믿었습니다. 땅은 임시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맡겨 주신 것이지, 영원히 인간의 소유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려움 때문에 일시적으로 땅을 다른 사람에게 팔았다고 해도 결국은 다시 본래의 주인에게로 돌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50년 마다 한 번씩 희년이라는 것이 있어서 모든 땅을 본래의 주인에게로 돌려주게 되는데, 이러한 희년제도가 시행된 것은 이스라엘 역사가 별로 없어보입니다. 이 일을 50년이 되기 전에도 가까운 친족이 땅을 잃어버린 친족을 위해 대신 사서 돌려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사람을 기업 무르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을 히브리어로 ‘고엘’이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는 친족 중에 가난하여 형제가 종으로 팔려갔을 경우 그를 위해 값을 지불하고 다시 데려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경우를 ‘기업 무른다’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기업 무를 자를 히브리어로 “고엘”이라고 합니다. 고엘은 구속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종으로 팔려간 친족을 구하거나, 가난하여 땅을 잃어버린 자를 위해 땅을 되찾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두 가지 율법이 결정적으로 이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이 법이 그들을 구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더 절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 율법이 시행되기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1) 우선 계대혼인법은 신명기 25장에 보면,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이 말씀에 의하면 계대혼인법은 한 집에 살고 있는 형제들 간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나오미의 가족과 보아스 사이는 그런 관계보다는 훨씬 더 멀어보입니다.


2) 기업 무를 자(고엘)의 법은 부유해야 하고, 유력한 자여야 합니다. 유력하다는 말은 그리고 어느 정도 가까운 친족이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원하는 자여야 합니다. 법적 구속력이 별로 없습니다.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억지로 하게 할 수 없습니다.

이 두 개의 법은 구약 시대에 시행된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희년제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50년마다 모든 토지를 원래의 주인에게로 돌려보내는 제도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기록으로는 그런 적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실 그것이 쉽지 않음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미 자기 권리를 가지고 있는 기득권층들이 그것을 내려놓겠습니까? 거의 가능성이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이런 법이 왜 있는 것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기업 무를 자, 고엘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율법 가운데 놓여 있는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의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당신의 백성들로 하여금 이러한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 시대에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욕심 때문이기도 했고, 또 인간의 죄성이 그런 삶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나오미는 이런 법의 성격을 잘 알았습니다. 이러한 법은 자기들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제도이지만, 그것에 기댈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2장 20절에서 나오미는 룻에게 보아스에 대해 “그는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다”라고 말하지만, 거기서 그칩니다.

3장 1장에 보면, 나오미는 룻을 보아스에게로 보냅니다. 그리고 나오미는 룻에게 보아스가 우리의 기업 무를 자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나오미의 관심은 룻을 결혼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안식할 곳을 마련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룻을 결혼시키고 싶은 마음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계대혼인법을 의지할 수도 있고, 또 아니면 기업 무를 자(고엘)의 법을 통해서 잃어버린 땅이라도 되찾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그것을 쉽게 요구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아무에게도 어떤 것을 요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다(2:20)”라고 말하는 데서 그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냥 룻을 보아스에게 들여 넣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나오미에게 아무런 자격도, 권리도, 힘도 없음을 발견합니다. 연약합니다. 누군가의 자비로운 은혜가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절대적인 은혜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오미의 마음입니다. 그저 다른 것은 몰라도 룻만은 다시 짝을 맺어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 어떤 법이 아니더라도 자기 며느리 룻을 위해 안식할 곳을 마련해 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것만 되면 되겠다는 것입니다. 나오미의 그런 마음이 읽혀집니다.

나오미는 이렇게 마음이 가난해지면서 며느리를 깊이 생각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 간절히 길을 찾습니다. 그의 마음을 오직 자부에게 향합니다. 이런 간절함이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나옵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마음은 룻을 보아스에게 보내는 것으로 이뤄집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를 사모하는 자의 심정입니다. 은혜는 어떤 사람에게 임합니까? 바로 이런 마음을 지닌 자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도 주장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시는 분의 은혜를 기다립니다. 이것이 삶의 원리에서도 그대로 맞습니다.

며칠 전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연령대에 따라 부부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설명한 내용입니다.  

20대에는 행복의 꿈에 부풀어서 신이 나서 살고, 30대에는 서로에 대해 실망을 느끼며 환멸을 참으며 살고, 40대에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마지못해 체념하며 살고, 50대에는 서로 없어서는 안 되니까 의지하는 마음으로 살, 60대에는 서로 안 됐다 생각되어 가엾어서 살고, 70대에는 지금까지 참고 살아준 것만 해도 고마워서 산다.

은혜의 사람은 주장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은혜를 받을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50대의 부부들이 서로 없어서는 안 되니까 의지하고 살듯이 하나님의 사람은 그렇게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불쌍히 여김을 받고, 겸손함으로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사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뭔가 주장할 것이 있고, 아직도 뭔가 할 말이 많은 사람은 은혜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보면서 그분께 나아갑니다. 약속 때문에 절망합니다. 그러나 이 절망에서 다시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은혜를 주시옵소서. 주님!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아무 것도 주님께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주님께서 저희를 불쌍히 여겨주신다면 주님께서는 나의 자부를 세워주실 수 있으십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겸손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런 간절함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이것은 바로 주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기대할 수 없는 것을 기대하기 때문에 절망하지만, 그로 인해 하나님을 더 강하게 붙듭니다. 여기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흐르는 시점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엎드리는 자를 통해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그렇게 겸손히 나가는 자를 세우십니다. 주님 앞에 겸손함으로 간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주 앞에 겸손히 나아가는 은혜의 성도, 그래서 은혜가 강같이 흐르는 삶이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룻을 통해 흐르는 은혜를 보겠습니다.

이제 룻이 보아스에게로 갔습니다. 시어미니가 시키는대로 다 순종했습니다. 자고 있던 보아스는 자기 발치에 누워 있는 룻을 보고는 놀라서 일어났습니다. 룻은 이렇게 말합니다(9절).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기업을 무른다는 것은 나오미의 잃어버린 땅을 회복할 책임이 있는 자라는 말입니다. 여기 룻의 당돌함을 봅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이것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룻은 이것을 마음에 품고 갔습니다. 나오미는 룻을 결혼시키려고 보냈지만, 룻의 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룻은 시어머니를 생각했습니다. 자기 결혼보다 시어머니의 기업을 회복되는 것이 더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보아스에게 당당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룻이 자기 시어머니 나오미를 위해 보아스에게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결혼 문제는 그를 위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의 이런 모습을 보았습니다. 룻의 이런 모습은 룻이 처음 베들레헴에 올 때부터 가졌던 신실함입니다. 보아스는 그의 모습에 감동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1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이제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게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정말 현숙한 여인입니다. 그는 끝까지 자기 시어머니를 돌봅니다.

나오미는 하지 못하는 말을 룻은 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나오미는 당사자였습니다. 기업 무를 자(고엘)의 법에서도 당사자였고, 계대혼인법에서도 당사자였습니다. 기업 무를 자의 법에서도 자기 남편의 땅을 찾는 것이었고, 계대혼인법으로 자부를 결혼하게 하는 것도 사실은 자기의 가문을 이어가기 위한 법이었습니다. 결국 두 가지 법이 모두 나오미에 관련있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랬기 때문에 나오미는 그것을 말하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룻은 달랐습니다. 룻은 담대하게 보아스에게 그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룻은 보아스와 결혼할 마음을 갖고 갔습니다. 보아스는 룻을 통해 또 한번 감동을 받습니다. 바로 기업 무를 자의 법을 통해 시어머니의 땅을 회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당시 상황으로서는 보아스의 눈에 확연히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보아스는 룻의 이런 마음에 다시 한 번 감동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의 일을 어떤 방법으로든지 책임지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우리는 여기 룻을 통해서 그의 담대함을 봅니다. 그는 거침이 없이 담대히 자기 시어머니를 위해 보아스에게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감당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가 주님 앞에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이렇게 담대히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나오미와 룻을 통해 놀라운 사실을 깨닫습니다. 나오미는 오랜 기간 고난 속에서 절망했지만, 이제 하나님께서 룻을 통해 일하시는 것을 보면서 어렵지만, 용기를 내어 룻을 위한 길을 열어가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는 낮아졌습니다. 그는 겸손했습니다. 그는 아무런 가능성도 보이지 않지만, 그러기에 은혜를 구했습니다. 자격 없음을 알았습니다. 아무 것도 구할 수 없었습니다. 율법이 있었지만, 율법을 자신을 위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율법을 근거해서 요구할 수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바라봅니다. 보아스를 통해 룻에게 은혜가 내려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겸손함이 필요합니다. 이런 간절함이 필요합니다. 자격 없음에 대한 철저한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주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현대 사회는 겸손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겸손하기를 원하십니다. 겸손한 자를 통해 일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맛보기를 축원합니다.


한편 룻은 담대하게 보아스에게 기업 무를 자가 되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룻은 당당했습니다. 룻은 시어머니를 위해 보아스에게 결혼하는 것도 결정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시어머니를 위해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이것이 그를 담대하게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룻과 같은 사랑과 긍휼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끝까지 나오미를 생각하고 염려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 살려고 하지 않고,         그를 위해 살고자 작정했습니다. 룻은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자기 인생의 목적은 나오미를 돌보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이 작은 것일지 몰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었고, 자신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마음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에 담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가질 때 우리가 주님의 뜻을 받아 그 뜻대로 살기를 작정할 때 우리는 담대해 질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승리하는 길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능력의 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고엘이시다

성경 속에 기업 무를 자(고엘)의 법과 계대혼인법이 제대로 시행된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율법의 근본 목적은 거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진정한 기업 무를 자(고엘)를 통해 우리의 기업을 회복시켜 주시고, 계대혼인법을 통해 우리의 신랑이 되실 분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주십니다. 이 두 가지의 율법은 궁극적으로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경에 기업 무를 자(고엘)의 법이 시행된 적은 별로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바로 그 은혜의 역사, 기업 무름을 통해 우리의 기업을 회복시키시고, 우리의 신랑이 되셔서 우리의 삶을 회복시키실 주의 은혜는 수없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50장 34절입니다. “그들의 구원자는 강하니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라. 반드시 그들 때문에 싸우시리니 그 땅에 평안함을 주고 바벨론 주민은 불안하게 하리라.” 여기서 ‘구원자’라는 말은 ‘고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여호와는 우리의 고엘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곧 우리의 기업을 무를 자이십니다. 가난과 재난으로 땅을 잃고 형제를 종으로 팔려가야 할 때 가까운 친족 중에 이를 위해 자기 재물을 주어서 땅을 회복시키고, 팔려간 형제를 구원하는 일을 하는데, 바로 그 일을 우리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선언입니다.

이사야 43장 14절에도 역시 비슷한 구절이 있습니다. “너희의 구속자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위하여 내가 바벨론에 사람을 보내어 모든 갈대아 사람에게 자기들이 연락하던 배를 타고 도망하여 내려가게 하리라.” 여기서 말하는 구속자도 역시 ‘기업 무를 자(고엘)’입니다.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놓으시고, 우리의 생명을 구속하신 주님이십니다.

또한 시편 103편 4절입니다. “내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속량)하시고”에서도 ‘기업 무를 자(고엘)’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주님 앞에 우리의 간구를 드리십시오. 겸손히 주님 앞에 엎드리고, 담대히 주님께 간구하십시오. 주님의 목적을 나의 목적으로 삼고, 주님의 뜻을 나의 뜻으로 삼으십시오. 그리고 그분 안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일자 설교 제목 성경
269 시험을 참는 자의 복(약1:2-12) 2012. 1. 15 주일예배
268 오직 믿음으로 구하라(약1:1-8) 2012. 1. 8 주일예배
267 힘써 여호와를 알자 (호5:12-6:6) 2012. 1. 1. 신년 주일 예배
266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11:1-10) 2011. 12. 18 대강절 네 번째 주일
265 내 백성이 내 이름을 알리라 (사52:1-12) 2011. 12. 11 대강절 세 번째 주일
264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마5:1-9) 2011. 12. 4 대강절 두 번째 주일
263 한 아기, 한 아들로 오신 예수 (사9:1-7) 2011. 11. 27 대강절 첫 번째 주일
262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6-18) 2011. 11. 20 추수감사주일
261 신앙의 수동적 역동성 (룻4:1-12) 2011. 11. 6 주일예배
260 그분은 쉬지 않으신다(룻3:14-18) 2011. 10. 30 주일예배
» 은혜가 흐르는 교회(룻3:1-13) 2011. 10. 13 주일예배
258 은혜를 입은 자 (룻2:14-23) 2011. 10. 9 주일예배
257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룻2:8-13) 2011. 10. 2 주일예배
256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히11:1-3) 2011. 9. 25 주일예배 (박유신목사 설교)
255 구약의 복음(룻2:1-7) 2011. 9. 18 주일예배
254 하나님의 인도 (룻1:19-22) 2011. 9. 11 주일예배
253 하나님의 손길 (룻1:6-18) 2011. 9. 4 주일예배
252 하나님의 섭리 (룻1:1-5, 18-22) 2011. 8. 29 주일예배
251 온전한 그리스도인 (히13:20-25) 2011. 8. 21 주일예배
250 신뢰와 기쁨 그리고 유익 (히13:17-19) 2011. 8. 14 주일예배
Board Pagination Prev 1 ...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 41 Next
/ 41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