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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룻기를 통해 아주 아름다운 한 인생의 이야기를 보는 기쁨을 얻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말했듯이 ‘룻기는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는, 한 편의 가장 사랑스럽고 완전한 작품’입니다. 이방 여인 룻이 자기 시어머니 나오미를 향한 연민과 사랑으로 베들레헴에 와서 고난과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런 중에도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은혜로 복을 받고 그의 삶이 전환되는 장면은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특히 이런 일들이 그렇게 될 수 없는 상황들 속에서 그렇게 되는 것이 너무 놀랍습니다. 성경은 이런 일들이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과정을 깊이 있게 살펴보는 것은 성도들에게 주어진 특권이고 기쁨입니다. 또한 우리도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하신 것이 룻기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1. 영적으로 혼탁한 사사시대

먼저 우리는 룻의 삶에 다가온 놀라운 은혜가 사실은 전혀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 일어난 일임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상황은 룻이 살던 시대가 사사시대였다는 점입니다. 사사시대는 영적인 암흑기였습니다. 사사시대 백성들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를 거치고, 가나안까지 들어온 후 한 세대 이상 지나가면서 광야에서와 가나안 정복의 과정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거의 사라져 갔습니다. 결국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이방 민족들의 우상 숭배와 그와 함께 얽힌 이방 문화의 영향에 완전히 노출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사기 17장 6절과 21장 25절에 의하면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고 말씀합니다. 아무렇게나 살았다는 말입니다. 율법은 지켜지지 않았고, 백성들은 대부분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없었습니다. 때에 따라 주변 민족의 침략을 받아서 땅과 곡식을 빼앗기고, 주권을 빼앗기고 나면 그들은 그제서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아 다시 하나님을 떠나곤 했었습니다.


2. 풍년을 맞았지만, 영적으로는 피폐함

룻이 살던 시대의 또 하나의 특징은 오랜만의 풍년을 경험했다는 점입니다. 나오미와 룻은 1장 6절 말씀대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올 때는 보리 추수를 시작하던 시기, 즉 대략 4월 초였습니다.

하지만 오랜 기간 흉년으로 고난을 겪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여전히 좁아진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그들은 적어도 십년 이상 흉년으로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오는 모처럼의 풍년이었기 때문에 여전히 그들은 가난과 굶주림에 대한 아픔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보통 오랜 기간 가난 가운데 살던 사람은 재물을 얻은 후에도 여전히 가난했을 때의 삶의 패턴을 버리지 못합니다. 좀 더 여유로워질 수 있지만, 그러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그럴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여전히 인색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룻기 4장에 나오미를 위해 기업 무를 자가 나옵니다. 기업 무를 자란 자기 친족 중에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땅을 팔거나 자식을 종으로 팔아야 할 경우 그 값을 대신 지불하고 자기 친척을 구속하는 자를 말합니다. 물론 이 일은 의무적으로 꼭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의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만들어 놓으신 제도입니다.

나오미에게는 친척이 둘 있었습니다. 그중 한 친척은 보아스이고, 다른 한 친척은 이름이 나오지 않는, 4장에 나오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친척, 즉 기업 무를 자는 나오미의 기업을 무르는 일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 기업에 손해가 있을 것에 대한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느 정도 나름대로 풍족한 친척으로 보여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조금의 손해도 보지 않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풍년이 왔지만, 그렇다고 영적인 면에서도 풍성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영적으로는 궁색하고, 나눔과 베품이 없는 강박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보아스의 배려

그런데 바로 그런 시대적 상황에서 일어난 한 사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본문에는 보아스라는 사람이 룻에게 베푸는 엄청난 배려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룻기의 이야기는 아주 특별합니다. 보아스라는 사람의 풍성한 배려가 룻에게 가고 있는데, 이것은 결코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14절부터 17절까지는 보아스가 룻에게 얼마나 놀랍게 배려하는지를 보여줍니다. 14절을 보면, 보아스는 룻을 그들의 식탁에 초대합니다. 물론 이 식탁은 밭에서 농사하다가 점심을 먹는 시간이지만, 이방 여인이었던 룻에게 있어서 이러한 보아스의 배려는 특별한 것입니다.

15절에 보면, 식사 후 일꾼들은 보리를 베기 위해 나가고 룻은 보리 이삭을 주우러 나갑니다. 이 때 보아스는 일꾼들에게 룻으로 하여금 곡식 단 사이에서도 이삭을 주울 수 있도록 하라고 명령합니다. 이것은 특별한 배려입니다.

율법에도 가난한 자들을 위해 이삭을 줍도록 하고 있지만, 그래도 곡식 단 사이를 헤집고 다닐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의도적으로 곡식 단을 떨어서 이삭을 주울 수 있고, 그것은 주인에게 상당한 손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룻에게 곡식 단 사이에서도 이삭을 줍게 했습니다.

16절에는 일꾼들로 하여금 곡식 다발에서 이삭을 조금씩 뽑아서 땅에 떨어뜨리고, 그것을 룻이 줍도록 하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는 보아스의 배려와 사랑은 더 이상 가늠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보아스를 통해 베풀어지는 배려와 사랑은 당시 사사시대의 상황으로도, 그리고 오랜만에 풍년을 맞은 상황으로도 쉽게, 아니 결코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17절에서는 보리 이삭 한 에바를 주워서 집으로 가는 룻의 모습을 그려줍니다. 한 에바는 보통 5 갤런이라고 합니다. 쌀 20kg 짜리 한 부대이고, 보름치 식량입니다. 이러한 배려는 후에 보아스와 룻의 결혼까지 이어집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인지 모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특징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특징

첫째, 하나님의 사랑은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습니다.

사사기를 통해서 우리는 룻과 같은 인생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룻기 1장 1절에는 분명히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라고 시작합니다. 이런 시대에 룻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시대가 어렵다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모압 여인 룻에게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선언입니다. 사사시대와 같이 영적으로 암울한 시대에도 하나님은 베들레헴이라고 하는 한 작은 도시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역사하신다는 선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어둠 가운데 있을 때 베들레헴에 보아스와 룻을 향해 빛이 비취고 있었습니다. 마치 애굽에 재앙이 임할 때 고센 땅만 밝아졌던 것처럼 말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들의 인색함도 넘어섭니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섬길 수 있도록 주신 것입니다. 또한 율법은 그들을 광야의 위험에서 지켜주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난과 어려움, 때로는 가난한 자들을 부자들의 횡포로부터 막아주기 위한 장치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율법은 사사시대를 비롯해서 많은 시대에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많은 경우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떠나 이방 신을 섬기고, 타락하고,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룻기는 사사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보아스를 통해 룻이라는 이방 여인을 향해 은혜를 쏟아붓는 감동적인 모습을 보여 줍니다. 즉 보아스는 율법의 규정을 넘어섰습니다. 룻에 대한 보아스의 배려와 은혜는 복음 그 자체였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보아스를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십니다. 바로 보아스가 룻을 사랑하듯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룻의 과거를 묻지도 않았습니다. 보아스는 룻을 이방 여인이라고 따로 앉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보아스는 룻을 조금도 차별하지 않고 오히려 율법적 규정을 넘어서서 자원적으로 그에게 최대의 배려를 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보아스는 룻으로 하여금 최대의 사랑을 누리게 했습니다.

이처럼 놀라운 일이 어디있겠습니까? 이런 사랑을 받아보셨습니까? 이런 은혜가 우리 인생 가운데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너희들도 바로 이렇게 사랑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룻 개인의 인생이 아닙니다. 이것은 룻의 인생을 보여주면서 우리로 하여금 시샘하게 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본문은 바로 우리의 인생도 룻의 인생처럼 복된 인생임을 알려주십니다.

‘내가 너희도 이렇게 사랑한다.’ 이것이 룻기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이러한 룻의 은혜를 누리기 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은 구약 시대 한 사건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면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그림처럼, 이야기로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룻과 같은 은혜를 누리기 원하시지만, 모든 성도가 다 그런 은혜를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룻이 누렸던 그런 사랑을 우리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놀랍게 사랑하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데 실패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잘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려고 애를 쓰는 것보다 먼저 하나님의 다함이 없는 사랑을 이해하고 깨닫고 알게 되면 우리도 모르게 그분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룻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룻에 대해 기본적으로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사시대 룻을 전혀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룻은 모압 여인으로, 결코 호감가는 여인은 아니었습니다. 이 여인은 자기들과는 생김새부터 뭔가 조금 달랐고, 말도 서툴렀고, 여러 가지로 어색한 모습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압 사람을 천하게 여겼기 때문에 룻도 역시 천한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룻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가난하고 연약한 여인, 이스라엘 지역에서는 멸시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이방 여인을 그대로 두지 않으시고 그의 인생에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즉 자격 없는 여인에게 은혜를 부어주신 것입니다. 룻이라는 여인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도대체 왜 이런 여인을 이토록 사랑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는 사실 그분의 사랑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실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룻이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룻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습니다.

룻기 1장 16절을 보십시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고” 룻은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어떻게 알았을까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와 근 10년을 살았습니다. 나오미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서는 부족함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떠나 모압으로 온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룻은 그런 시어머니를 통해서도 간간히 그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았습니다. 룻이 발견한 나오미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을까요? 시어머니가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셨습니다. 나오미는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길에 베들레헴 사람들을 만나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룻1:20)

아마도 룻은 시어머니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했다가 아브라함이 이삭을 향해 칼을 내리치려는 순간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 손을 이삭에게 대지 말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시어머니의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셨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룻이 섬기는 민족 신인 모압 신 그모스는 사람을 잡아 바치는 신입니다. 그들의 신은 전혀 인격적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그 사랑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사랑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와 길이를 알아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사랑하기 전에 그분의 사랑을 먼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룻이 누렸던 그런 사랑을 누리려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야 룻이 누렸던 사랑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는 지레 겁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그분의 성품을 닮아갈 수 있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18절을 보면, 룻은 보아스의 밭에서 주운 한 에바쯤 되는 보리를 가지고 집으로 가서 그것을 몽땅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줍니다. 그리고 그가 보아스의 식탁에서 먹던 볶은 곡식도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모두 드렸습니다. 룻은 자기 것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그거야 당연하지 않나?’ 하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나라에 와서 시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밖에서 보리를 줍고, 음식을 먹고 남았으면 시모에게 갔다 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더욱이 룻의 나눔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룻기 4장에 가면 룻은 보아스와 결혼을 하는데, 보아스를 통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자기 아들이라 하지 않고 나오미의 아들이라 부르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룻기 4장 16-17절입니다.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그는 자신이 낳은 아들도 나오미가 낳았다고 말해집니다. 물론 그것은 하나의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표현입니다. 나오미의 인생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룻은 어디서 이것을 배웠습니까? 보아스를 통해 배웠습니다. 룻은 14절부터 17절까지 이르는 분에 넘치는 사랑을 보아스로부터 받았습니다. 율법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렸습니다. 보아스를 통해 보여준 그 놀라운 나눔은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었습니다. 아무튼 룻은 모든 것을 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다시 다 받았습니다. 이것이 룻의 모습이었습니다. 다 주었고, 다시 다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룻은 다윗의 족보에 올라갑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나누는 사람을 통해 일어납니다. 그가 비록 가난했거나, 아니면 이방 여인이었더라도 나눔이 있는 사람, 모든 것을 다 주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이 전해지게 하십니다.

여기서 주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그런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래 아낌없이 당신 자신을 다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그 생명까지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완전히 다 내려놓으신 것입니다. 완전히 죽기까지 희생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면서 나오는 자연스런 모습일 뿐입니다. 이것은 보아스가 룻에게 베풀었던 율법적 조건을 넘어서는 무조건적인 배려처럼 룻에게서도 그런 성품으로부터 나오는 배려이며 사랑이며 희생이며 나눔이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부요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모습처럼 그렇게 나누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더 큰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고, 하나님께서는 그러는 중에 더 크신 당신의 풍성함을 나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어디선가 이 나눔이 끊어지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그 풍성한 은혜도 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먼저 풍성해지면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먼저 넉넉해지면, 그래서 평생토록 먹을 걱정을 하지 않을 정도가 되면 그 때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느 정도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룻은 보아스의 밭에서 무려 보름치의 보리 이삭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또한 룻은 보름치밖에 줍지 못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지요? 보름은 길수도 있지만, 짧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보름치나 될 수도 있지만, 그러나 보름치 밖에 안 되는 양식일 수도 있습니다.

나눔은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우리가 나눌 때 하나님은 우리의 빈 창고를 다시 채워주십니다. 나누십시오. 아낌없이 나누는 훈련을 하십시오. 내 창고가 비어있을 때까지,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 은혜와 복이 필요할 때까지 나누십시오.

내 아내에게 모든 것을 다 주십시오. 내 남편에게 모든 것을 다 내어놓으십시오. 두 주머니를 갖지 마시고, 이중 장부를 갖지 마시고, 있는 그대로 당신을 위해 산다고 고백하십시오. 성경은 내일 일에 대한 염려를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주님께 모든 것을 다 되돌려 드립시다. 그러면 주님께서 다시 더 크고 놀라운 은혜로 채우실 것입니다. 룻이 자기 자식을 나오미의 아들이라 불릴 때도 그대로 기뻐하며 기꺼이 그것을 인정했을 때 결국 나오미는 자기 아들의 양육자가 되었고, 족보에는 이방 여인인 자기 이름이 자랑스럽게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조금도 인색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그 주님의 나눔처럼 우리도 함께 나눌 때 더 큰 은혜와 풍성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룻이 누렸던 그런 사랑을 누리려면 하나님께 붙어있어야 합니다.

룻은 집으로 와서 시어머니에게 자기가 이삭을 주운 곳은 보아스의 밭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나오미는 룻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 딸아 너는 그의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22절). 그리고 이어서 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에 룻이 보아스의 소녀들에게 가까이 있어서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 그의 시어머니와 함께 거주하니라.”

룻은보리 추수가 끝날 때까지, 그리고 밀 추수가 끝날 때까지 보아스의 소녀들과 함께 이삭을 주웠고, 그의 시어머니와 함께 거주했다고 말씀합니다. 보통 보리 추수는 4월에 있었고, 밀 추수는 6월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4월 초부터 6월 말까지 하면 약 3개월 정도 그 일을 계속했습니다. 다른 밭에 가지 않고, 보아스의 소녀들과 함께 이삭 줍는 일에 전념한 것입니다.

그리고 룻은 결국 보아스의 아내가 되는 영광을 누렸으며, 더 나아가서는 다윗의 증조 할머니로,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그리스도의 족보에 드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즉 그는 보아스에게 붙어 있음으로 인해 일시적인 관계가 영원한 관계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사람들은 너무 눈치가 빠릅니다. 뭐 하다가 아닌 것 같으면 빨리 접어버립니다. 룻은 보아스의 은혜를 받은 후 다른 데 가도 그렇게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또 다른 더 가까운 친척도 있었습니다. 그는 더 가까운 친척이기 때문에 더 많은 배려와 사랑을 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룻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도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룻과 같이 사랑하시고, 룻과 같은 삶을 누리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룻에 베푸신 은혜가 우리에게도 함께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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