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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가지고 갔던 모압 땅에서 10년 만에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나오미는 남의 나라에서 얻은 며느리 룻을 데리고 베들레헴까지 왔습니다. 나오미의 발걸음은 한 없이 무겁고 외롭고 처량했습니다. 10년 전 의기양양하게 고향을 떠나던 생각이 머리에 떠오를 때마다 그의 마음에 솟아오르는 회한과 슬픔 그리고 고통은 이루 형용할 수 없었습니다.

21절에서 그가 고백하는 것처럼 그는 풍족하게 나갔다가 비어 돌아오고 있습니다. 나갈 때도 그는 어렵다고 생각하며 베들레헴을 떠났었습니다. 그러나 돌아올 때는 더 어려웠습니다. 떠날 때는 이것이 어려움의 끝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돌아올 때는 그보다 더 어렵고 비참한했고, 더 깊은 고난과 절망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오미는 모압에서 사랑하던 모든 가족을 다 잃어버리고, 룻이라는 남편 없는 자부만 달랑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룻의 존재가 참으로 묘한 위치에 있습니다. 고향으로 처량하게 돌아오는 나오미에게 아마도 이 긴 여행길, 슬픔과 낙심 가운데 돌아오는 나오미의 귀향길에 룻은 매우 소중한 동무가 되었을 것입니다. 룻이 없었다면 나오미의 귀향길이 얼마나 더 쓸쓸했겠습니까?

하지만 룻은 나오미에게는 달가운 존재만은 아닙니다. 룻은 이방인이었습니다. 아무래도 그의 얼굴 모양과 생김새에서 이방인 냄새가 물씬 풍겼습니다. 나오미가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룻은 나오미의 모압 생활 10년이 어떠했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광고판과 같습니다. 나오미의 귀향길에 룻이 없었다면 고향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나오미가 모압에서 어떻게 살았었는지 쉽게 짐작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룻을 보면, 나오미의 모압 생활의 거의 80% 이상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습니다.

나오미는 모압에 가서 두 아들을 이방 여인과 결혼시켰습니다. 남편 엘리멜렉과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은 모두 죽었습니다. 이것은 누가 보아도 그들이 여호와 신앙을 버린 것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가혹한 형벌로 이해하기에 충분한 상황이었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룻과 같은 존재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먼 고향길, 낙심과 절망의 귀향길에 동무 같은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는 나의 실패의 흔적이고, 상처를 돌아보게 하는 자일 수 있습니다. 그는 언제나 나로 하여금 불편한 과거를 돌이켜 보게 합니다. 부끄러운 자아상을 그대로 노출하게 합니다. 그가 나의 신분을 하락시키는 것 같고, 나를 더 부끄럽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럴 때조차도 우리는 룻이 나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룻과 그를 붙여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원망하며, 부끄러워하며, 차라리 없었으면 더 좋았겠다고 생각하시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과연 나오미가 자신과 함께 가고 있는 룻,         그리고 룻을 통해 비춰지는 자신의 과거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나오미가 자기 인생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해석하는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할 것인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나오미가 베들레헴에 도착하자 베들레헴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맞이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나오미를 보면서 반갑게 인사합니다. “이이가 나오미가 아니냐?” 그것은 반가움의 소리며, 환영하는 음성이었습니다. 나오미라는 말은 본래 ‘희락’, ‘즐거움’, ‘기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오미를 보며 모두들 즐거움의 여인, 기쁨의 여인 나오미가 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오미는 무심코 들려지는 자기 이름 나오미라는 이름이 이처럼 불편하고 가식적이고 고통스럽게 느껴질 수가 없었습니다. 나오미는 나오미라 불리워지는 자기 이름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쓴 괴로움’이라는 뜻을 가진 마라라 부르라”(20상절)

이 고백은 나오미가 지나간 자기 인생 10년의 세월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고백은 매우 솔직한 고백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가식도 없습니다. 하지만 매우 아프고 쓰린 고백이며, 자기 인생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깊게 깔린 고백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은 나오미의 이런 고백을 보면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나오미의 고백은 과연 긍정적입니까? 아니면 부정적입니까? 나오미의 고백은 믿는 자의 고백입니까? 아니면 불신자의 고백처럼 보이십니까? 나오미의 고백을 보면, 그의 마음, 아니 그의 믿음의 한 편을 보게 하는 단면을 발견하게 됩니다.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이 표현입니다. 나오미는 전능자가 나를 이렇게 괴로움의 구덩이로 빠지게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그는 아마도 자기의 현재의 고난, 고통의 원인이 바로 흉년 중에 베들레헴을 떠난 데서 왔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의 고통스런 마음을 어떻게 직설적으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듯한 고통을 되뇌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표현은 아주 미묘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전능자’ 혹은 ‘전능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부를 때 그렇게 부른 자들의 형편이 어떠했는지,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살펴보면 나오미가 어떤 마음으로 이런 고백을 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7장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리라는 약속을 하시는 내용입니다. 1절을 보면,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창17:6)고 하시면서 아들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99세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말씀을 듣고는 웃었습니다. 그는 웃으면서 마음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며 말했습니다. “나이 백 세된 사람이 어떻게 자식을 낳겠는가?”

아브라함은 인간적으로 모든 가능성을 잃어버린 때였습니다. 어떤 면에서도 소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지나온 25년 동안 하나님께서 여러 번 약속하셨지만,         그것은 그나마 나이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의 이야기지, 지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 가장 절망적인 상황이 하나님께서는 최고의 일을 행하시려고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바로 이런 시점에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전능자라고 표현하십니다.


하나 더 보겠습니다. 이번에는 인간의 편에서 하나님을 전능자로 고백하는 순간입니다. 창세기 43장 14절입니다.
요셉이 애굽에 팔려가서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있던 야곱의 자식들, 즉 요셉의 형제들이 애굽에 한 번 내려가서 요셉에게 양식을 구해 온 후였습니다. 그 때까지 요셉의 형들은 자신들이 만난 애굽의 총리가 자기 동생 요셉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거기서 엉겁결에 남은 동생 베냐민이 하나 더 있다는 말을 해 버렸습니다. 그 말 끝에 요셉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음에 올 때는 그 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와서 양식을 주겠다고 말합니다.

이 일 때문에 야곱의 집에서 다시 애굽에 내려가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야곱은 가장 사랑하던 요셉도 잃어버렸는데, 그나마 베냐민까지 보냈다가 그마저 잃어버리게 되면 자신은 너무 슬플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보내지 못하겠다고 하는데, 아들들이 베냐민을 데리고 가지 않으면 애굽의 총리가 양식을 더 이상 주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에 그냥은 내려갈 수 없다고 버텼습니다.

이 때 야곱이 고민고민하다가 할 수 없이 베냐민을 내어 주면서 하는 고백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네 아우(베냐민)를 데리고 그 사람에게로 가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 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창43:13-14).  

이 상황은 야곱에게 가장 쓰리고 아픈 상황입니다. 식량을 구하기 위해 애굽으로 가야 하는데, 그곳에 베냐민도 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곱에게는 가장 사랑하는 부인 라헬을 통해 낳은 두 아들, 요셉과 베냐민, 둘 다를 잃어버릴 상황에 직면한 것입니다. 식량을 구하기 위해 산 자식을 죽음으로 몰아갈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허약한 아버지가 어디 있습니까? 머리 큰 다른 자식들의 요구에 대항할 힘이 없습니다. 여기서 아버지로서의 무력함을 느낍니다.

바로 그 시점에서 그는 전능한 하나님을 찾습니다.

“네 아우(베냐민)를 데리고 그 사람에게로 가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 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창43:13-14).  

야곱으로서는 가장 힘든 순간입니다. 야곱에게는 가장 힘들고 어려운, 최악의 상황입니다. 그 때 야곱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정말 그 때는 전능한 하나님밖에는 의지할 이가 없는 순간입니다. 인간의 모든 방법, 전략, 수단을 사용할 수 없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기억할 일이 있습니다. 인간의 최악의 상황에서 하나님은 최선을 행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가장 힘든 상황을 겪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최고의 역사를 이루신다는 점입니다.

본문에서 나오미의 고백은 그런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물론 나오미가 그런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간섭하심을 얼마나 기대했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나오미가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다”고 할 때 그의 마음에는 이 일은 전능하신 하나님밖에는 할 수 없는 일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양면이 있는 고백입니다. 인간적으로는 가장 깊은 고난과 고통의 순간입니다. 아주 어려운 상황에 직면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이 아들 낳기를 포기한 것처럼, 야곱이 요셉에 이어 베냐민을 포기할만큼 그렇게 다급하고 어렵고 힘든 순간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 그들 자신은 잘 모르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주 강하게 붙들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전능자라고 고백하는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 스스로 믿은 것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느낌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갖게 한 이조차도 하나님이심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오미가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였다”고 하는 순간 나오미는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다가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보십시오. 나오미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깊은 절망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나오미의 이 순간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 시작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다만 나오미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뿐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이런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어우러져 행해지는 역사를 마치 수예(tapestry)와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수예로 뜬 그림이나 작품들을 보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뒷면을 보면, 그것이 우리는 뒷면만 보고는 그 그림이 무슨 그림인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완전히 뒤엉켜 있는 수예의 뒷면은 그것이 무슨 그림인지 전혀 상상할 수 없게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인생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우리의 인생의 수예의 그 뒷면만 볼 때는 그것이 무엇을 만들기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수예는 보통 뒤집어서 작업을 합니다. 그런데 수예품을 다시 뒤집어서 앞을 보면 온전한 그림이 나옵니다. 그것은 너무 아름답고, 멋있는 그림입니다.

오늘 본문의 나오미의 사건은 마치 그렇다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어렵고 힘든 상태로, 완전한 실패자로, 그리고 너무도 부끄러운 모습으로 베들레헴에 도착했습니다. 며느리 룻의 동행이 반갑기도 했지만, 베들레헴 동네 사람들과 대화할 때면 룻의 존재가 그나마 더 거추장스럽고, 자신을 부끄럽게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뒤집어 보면 룻은 나오미에게 너무도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그나마 룻이 없었다면 나오미는 얼마나 쓸쓸하고 외롭고 힘들었겠습니까? 더욱이 2장 이하를 보면 하나님께서 나오미를 회복케 하시는 역사는 전적으로 룻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룻이 없이 나오미는 있을 수 없었습니다. 룻이 없이 나오미의 회복은 결코 일어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수예(tapestry)의 역설이며, 은혜였습니다.


이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아주 흥미로운 일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흥미로운 사인은 22절 말씀에 나오는 두 가지 사건입니다. 하나는 룻이 함께 동행해서 베들레헴까지 왔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 때 마침 보리 추수를 시작할 때였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그 상황에서는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합니다. 그저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룻이 때때로 나오미의 대화의 벗이 되어 주고, 그로 인해 힘들 때도 있지만, 위로자가 되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후에 나오미의 인생은 룻을 통해 복을 누리게 됩니다.

룻은 복의 통로였습니다. 그는 이방 여인이었지만, 나오미와 그의 가문에, 그리고 보아스에게,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이스라엘에 주시는 하나님의 복의 통로였습니다.

또한 이 때 베들레헴에는 보리 추수하는 시기였다고 말합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행하시는 역사의 단초가 됩니다. 보리 추수를 통해 룻은 보아스를 만나고, 보아스를 통해 룻은 새롭게 결혼을 하며 그것은 룻의 인생이 바뀔뿐만 아니라 나오미의 명예를 회복했고, 그를 통해 다윗의 왕조가 열리고, 이스라엘에 또한 놀라운 복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나오미는 이것을 보았습니다. 언제 보았을까요? 아마도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길에 보았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았을까요? 터벅터벅 며느리 룻과 걸어오면서 보았을 것입니다. 다 잃어버리고, 다 포기해 버리고, 다 내려 놓은 상태에서 고향을 향해 걸어오면서 룻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대화 속에서 지나온 시간들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어디서 문제가 시작된 것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룻과 대화하면서 힘들고 어려웠던 이야기를 하면서는 함께 울었습니다. 누가 보는 사람도 없고, 여러 해 함께 한솥밥을 먹은 룻 앞에서는 부끄러운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와 걸어오면서 신세한탄을 하면서 울었습니다. 또 어떤 대화 중에는 재미 있었던 일들, 자기 남편, 룻의 남편 흉을 보면서 한 없이 쓴 웃음이지만, 남편들을 생각하면 웃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대화 속에서 나오미는 무엇인가를 발견하기 시작합니다. 나를 여기로 몰아가신 분이 전능자이심을 알기 시작합니다. 아직은 그분의 몰아가심이 어떤 소망을 갖게 하지는 않지만, 무엇인가 그분의 손길이 구체적으로 있었음을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주의 자녀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하나님이 마치 우리에게 룻과 같은 존재로 다가오시기도 하십니다. 고난의 길을 걸으면서 나의 아픔을 그냥 넉두리처럼 나눌 수 있는 그런 분 말입니다. 우리의 가장 깊은 고통, 아픔까지도 이해해 줄 수 있는 그런 분입니다. 어떤 경우는 마치 며느리와도 같아서 우리는 그분을 너무도 쉽게 대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그분께 아무런 말을 해도 상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분은 우리에게 불편함을 주기도 합니다. 때로는 우리 곁에서 잠시 자리를 피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확실히 우리의 아픔을 이해해 주시고, 우리의 상처를 싸매주시는 참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마치 며느리처럼 우리보다 더 낮은 자리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그분께 나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그분을 만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전히 지금도 그분을 그렇게도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여기십니까? 이 시간 조용히 그분 앞에 나아갑시다. 그리고 그분께 우리의 넉두리를 아뢰어 봅시다. 우리의 아픔을 때로는 눈물로, 때로는 웃으면서 하나씩 하나씩 아뢰어 보십시오. 주님의 위로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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