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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아주 곤궁한 상황에 처한 세 여인을 봅니다. 그들은 모두 남편을 잃은 과부들이었습니다. 지금부터 약 3000년 전 고대 근동 지방에서 과부의 삶은 너무도 비참하고 힘든 삶을 견뎌내야 하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회에서 가장 낮고 어려운 삶의 자리로 내려가야 했습니다.


1. 나오미의 절망적인 기도

본문에 나오는 나오미와 오르바, 그리고 룻, 이렇게 세 고부 간의 대화는 아주 복잡한 그들의 심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특히 나오미의 말과 기도를 통해서 그가 얼마나 그 상황을 힘겹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나오미는 이스라엘 사람이고, 오르바와 룻은 모압 여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압 사람을 이방인으로 취급하고, 그것은 아주 천한 민족, 혹은 상종할 수 없는 사람들로 취급했습니다. 이방인들도 이스라엘 지역에 들어와서 얼마 간 살면, 자손 10대 이상 지나면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예배에 참여할 수도 있었는데, 모압 민족은 영원히 이스라엘의 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 이유에서였는지, 남편도 없는 자기 며느리들을 굳이 이스라엘까지 데리고 갈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그냥 모압에 머물러서 새로 시집을 가고, 새 남편을 만나 잘 살라고 축복을 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돌보시기를 원한다. 너희가 열심히 남편과 시부모들을 섬겼는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너희들의 그 아름다운 섬김을 기억하셔서 좋은 남편을 만나서 복된 삶을 살기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나오미의 복잡한 심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나오미는 자부들을 많이 사랑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여호와를 믿는 믿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며느리들을 이스라엘로 데리고 가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로 간다고 해도 그들에게 삶의 길이 열려지기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8-9절에서 이렇게 자부들에게 권면하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너희는 각각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나오미의 이러한 기도는 모순된 기도입니다. 자부들을 모압에 있게 하면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지키시기를 바라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입니다. 15절에서 나오미를 떠나 모압에 머물기로 한 오르바를 두고 나오미는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갔다”고 표현합니다. 그것은 오르바가 더 이상 여호와를 섬기는 자리에 있지 않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모압에 머물게 하면서 그들을 위해 여호와께 간구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여기에 나오미에게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 고민은 자부들을 이스라엘로 데리고 간다고 한들 그들의 삶에 뚜렷한 대책을 세워주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당시 남편이 없는 여자는 정말 삶의 대책이 없었습니다. 더욱이 자식까지 없는 경우는 더더욱 그랬습니다.


당시 고대 근동 지방에는 이런 사회적 구조를 극복하기 위해 있었던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계대 혼인법이라는 것입니다. 계대 혼인법에 의하면, 남편이 자식 없이 죽었을 경우 남편의 동생이 자기 형을 대신해서 형의 아내를 아내로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을 위해서 대를 이어주는 것입니다(신25:5-6). 사실 이것은 당시 여자 혼자로는 살 수 없는 삶의 구조를 극복하기 위한 보완책이었습니다. 이것은 성경도 인정하는 제도였습니다. 오늘날로서는 이해할 수 없지만, 당시로서는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제도였습니다.

본문 11-13절은 나오미가 계대 혼인법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너희가 나와 함께 이스라엘로 간다고 하지만, 그렇게 나와 함께 간다고 한들 어떻게 살겠다는 것이냐? 생각해 보라. 너희 남편이 될 아들이 나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가 이 나이에 다시 남편을 두어 아들을 낳을 수 있겠느냐? 설령 내가 아들을 낳는다고 한들 너희가 그 아들이 자라기까지 기다릴 수 있겠느냐 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오미의 기도에서 신학적으로는 모순이지만, 그의 기도를 이해할 수 있는 한 측면을 발견합니다. 그는 무어라고 기도했습니까?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한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각기 좋은 남편을 만나게 하셔서 위로 받는 삶을 살기 원하노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이 나오미의 자부들에 대한 사랑이었고, 나오미의 중심이었고, 또한 나오미의 한계였습니다. 나오미는 거기까지 보았습니다. 그 불쌍한 며느리들을 이스라엘까지 데리고 가서 또 다른 고생, 고난을 당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어렵더라도 나머지 생애는 건강한 남편들을 만나서 조금이라도 더 나은 형편으로 살게 해 주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나오미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그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자부들을 이스라엘로 데리고 가서 어떻게 그들을 평생 과부로 만들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 저들을 이곳에 있게 할테니 하나님! 저들을 돌보아 주시옵소서. 하나님은 전능자이시지 않습니까?” 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아니 자부들을 믿음 없는 곳으로 밀어넣으면서 하나님께 그들을 지켜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나오미의 절망을 봅니다. 그의 기도 가운데 담긴 절망스런 아픔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길이 아닌 길을 가겠다고 요구합니다. 하나님께 그들의 장래를 위해 간구하지만, 아무런 길이 없음을 보면서 답답해하는 나오미의 심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나오미의 이런 고민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며느리들의 이런 딱한 처지를 아는 나오미의 심정이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두 며느리의 인생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여호와께서 다스리는 이스라엘로 데리고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길이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을 살릴 길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불신의 세계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기도하지만 될 수 없는 일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자부들을 모압에 남겨놓은 채 여전히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게 할 수 있겠습니까?


룻의 반응

여기서 룻은 아주 멋있는 말을 합니다. 16-17절입니다. “룻이 이르되 어머니, 나를 돌아가라 하지 마세요.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갈 것이고, 어머니께서 사시는 곳에서 저도 살 것입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서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난다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실 것입니다.”

이렇게 멋진 말이 어디 있습니까? 룻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기대하며 나오미와 함께 이스라엘로 간다고 한 것이겠습니까?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단지 그냥 희생하는 마음으로, 헌신하는 마음으로 간 것입니까? 그의 희생, 그의 헌신은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아무 것도 바라볼 수 없는 상황에서 그런 길을 갈 수 있었겠습니까?

나오미를 통해 다시 남편될 이가 태어나는 것을 기대할 수 없었고, 또 다른 어떤 가능성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룻으로 하여금 나오미를 따라가게 한 그 힘, 그 원동력은 무엇이었습니까?
        
룻기는 사사시대를 배경으로 한다고 했습니다. 사사시대는 사람들이 각기 자기 소견대로 살아서 무질서하던 시대였습니다. 그 시대에는 무엇이 옳은 것인지, 무엇이 그른 것인지 잘 분별하기 어려웠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도 잘 느끼기 어려웠습니다.

룻기에 나오는 사람들도 동일한 경험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쉽게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짧은 룻기는 오늘 우리들에게 그 혼란한 시대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음을 보여줍니다. 그렇게 불행한 나오미와 룻의 인생을 붙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일으켜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로 인도하셔서 그들을 위해 예비하신 놀라운 은혜의 자리로 안내하셨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역사 안에서는 그것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일들은 역사 위에서 봐야 보입니다. 성경의 사건, 상황들 속에 들어가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 위에서 성경을 그냥 읽는 입장에서는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삶의 상황으로 들어가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 들어가면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룻은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본 것 같습니다. 룻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역사를 섭리하시는 것을 눈치 챈 것 같습니다. 역사 안에서, 눈 앞에 보이는 장애물과 고난들이 너무 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서 룻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즉 그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보았습니다. 내 인생을 결코 그냥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보고 확신한 것입니다. 그는 이방 여인이었지만, 시어머니 나오미의 믿음을 보면서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아갔습니다. 나오미의 믿음은 때로 약해지기도 했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위탁하지 못했지만, 룻은 나오미를 통해 하나님의 손길이 어떻게 임하는지를 본 것입니다.

룻은 그것이 무엇인지 잘 표현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한 가지 확신이 있었습니다. 우리 시어머니가 믿는 그 하나님, 그리고 시어머니를 통해 내가 믿는 그 하나님, 그 하나님이 참 신이시며, 그 하나님이 역사의 주권자이심을 룻은 내면적 확신으로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이스라엘로 가는 것입니다.


결론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보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확신을 가지고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을 경험하고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어떻게 역사하십니까? 하나님의 손길은 지금 어디에 미치고 있습니까?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사방이 다 막혀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길을 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이 시대 이 상황에서, 아니 내가 지금 곤고한 삶의 자리에서 어떤 길도 없다고 느끼는 그 삶의 자리에서 우리의 다급한 마음만을 말하지 말고, 그런 중에도 조용히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께서 행하시는 손길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도무지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맛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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