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샬롯츠빌한인교회

주일설교

조회 수 4348 추천 수 209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성경 학자들은 룻기를 가리켜 “가장 사랑스럽고 완전한 작품”(괴퇴, J.W.Goethe), 혹은 “세상의 어느 작가도 이보다 아름다운 단편소설을 쓸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메길로트’라 부르는 두루마리 책이 있는데, 그들은 이 책을 절기 때마다 읽었습니다. 메길로트에는 룻기를 포함해서 아가, 애가, 에스더, 전도서가 있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룻기를 사랑했고 많이 읽었습니다.


룻기 이야기

룻기는 불과 4장 85절로 되어있는 아주 짧은 말씀입니다.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었을 때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자기 부인 나오미와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데리고 모압 나라로 갔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아버지 엘리멜렉이 죽고, 두 아들을 장가보냈지만, 두 아들 역시 아버지의 뒤를 따라 죽었습니다.

결국 시어머니 나오미와 두 자부 오르바와 룻만 남았습니다. 세 여자만 남은 것입니다. 고대 시대에 여자만 남았다는 것은 거의 삶의 대책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대시대에는 여자로서는 생계를 이어갈만한 대책이 거의 전무했습니다. 성경에서 과부에 대한 특별한 배려를 계속해서 권면하는 것은 이런 당시 시대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즉 과부는 그 시대에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오미는 고국인 이스라엘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이 때 두 자부도 함께 따라오겠다고 하다가 그들은 모압 여인들이었기 때문인지 시어머니 나오미는 극구 따라오지 말라고 만류했습니다. 결국 오르바라는 며느리는 모압에 그냥 남아 있기로 했지만,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를 따라 왔습니다.


그리고 그가 베들레헴으로 와서 보아스의 부인이 되었습니다. 이 과정이 아주 아름답습니다. 직접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후에 그는 다윗의 증조 힐머니가 되었습니다. 이 말은 즉 룻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들어갔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아주 특별한 것입니다. 룻기 4장 마지막 18-22절을 보면, 룻의 족보가 나옵니다. 룻과 더불어 룻의 시어머니는 여리고 성의 라합이었습니다. 이방 여인들이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는 사건입니다. 본문을 깊이 보면 이것은 하나님의 의도적 개입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룻기의 배경

본문 1절을 보면,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 이 말은 룻기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매우 중요한 배경을 제공합니다.

시대적 배경은 사사시대입니다. 사사시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 40년의 방황을 거쳐 가나안까지 들어와서 처음 350년 정도의 기간을 말합니다. 이 때 이스라엘 민족들은 왕이 없었고, 그 대신 사사라는 사람들이 간헐적으로 나타나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사사라는 말은 다른 성경에는 ‘판관’이라고 번역되어 있고, 영어 성경은 judge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재판관들입니다. 평소에는 백성들을 재판해 주는 역할을 했고, 전쟁이 일어나면 군사를 모집해서 전쟁을 하는 장수들이었습니다. 사사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 가지 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정치적 혼란이었고, 둘째는 문화적 혼란이었습니다.

정치적 혼란

정치적 혼란이라는 말은 사사들이 간헐적으로 나타나서 백성들을 다스리고 도왔기 때문에 백성들은 안정된 사회에서 살 수 없었습니다. 많은 기간 이웃 나라에 의해 피지배 민족으로 살아야 했었습니다. 주변에는 끊임없이 이웃 나라들에 의해 침략을 당해야 했습니다. 여부스 족속, 모압 족속, 가나안 족속, 미디안, 암몬, 블레셋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을 계속해서 괴롭히던 민족들입니다.

사실 바꿔 생각해 보면, 가나안 땅에 잘 살고 있던 가나안 민족들에게 있어서 이스라엘 민족은 그야말로 갑자기 들어와서 자기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 안에 이런 갈등이 없을 수가 없었습니다.


문화적 혼란

두 번째는 문화적 혼란이었습니다. 문화적 혼란은 정치적 혼란보다 더 심각한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정치도 중요하지만, 문화가 얼마나 중요한 지 모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본래 유목민들이었습니다. 목축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도 목축업을 했고, 이런 유목민은 계속 이동 생활을 했습니다. 양과 염소, 짐승들에게 풀을 다 먹이고 나면 그들은 다시 풀이 많은 곳을 찾아 옮겨다녀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들 중에 하나는 천막을 치고 걷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40년 간 방황할 때도 그들를 매번 텐트를 치고 걷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그들은 한 곳에 정착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이동 생활을 하면서 늘 예기치 않은 상황을 맞아야 했고, 또한 주변 민족들과 전쟁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애굽 군사를 피해 홍해를 건너야 했고, 반석에서 물이 나와야 살 수 있었고, 아말렉 민족과 싸울 때는 모세가 손을 들면 자기편이 이기고 모세가 손을 내리면 지는 신비로운 전쟁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삶의 패턴이었고, 문화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왔습니다. 가나안 지역은 농사를 주된 업으로 삼는 지역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제는 한 곳에 정착해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들도 가나안이라는 땅에 정착해서 살려고 하다보니 농사를 지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농사라고는 한 번도 지어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한 것이라고는 텐트를 치고 걷는 것밖에는 없었습니다.

아니면 전쟁하는 것밖에는 없었습니다. 모세가 손을 높이 들면 함성을 지르면서 상대방을 향해 뛰어가서 죽이는 것만 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날마나 외쳤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전쟁에 능하신 신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나안에 들어와 보니 전쟁으로 살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남의 것을 빼앗을 수도 없었습니다. 저들은 우리가 살던 세계와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지식을 가지고 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홍해를 다시 가른다고 농사가 되는 것도 아니었고, 함성을 지르고 칼을 휘두른다고 농사가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야말로 광야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만 먹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는 것도 없고, 지식도 없고, 세상의 문물에는 아주 문외한이었습니다. 히브리 민족의 세계는 가나안이라는 당시 잘 나가는 세계인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따라갈 수 없는 후진적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본래 농경사회가 목축업 사회보다 더 발전된 사회였습니다. 목축업은 끊임없이 이동생활을 했지만, 농경 사회에 살던 사람은 농사를 지으면서 잉여 생산이 가능했습니다. 잉여 생산은 저장을 필요로 했고, 저장의 필요는 토기를 만들게 했고, 잉여 생산으로 인해 오는 여유 있는 시간은 그들에게 문화를 발전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가나안 족속들의 문화와 문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들에게 배워야 했고, 기웃거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문화란 항상 그들의 종교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점입니다. 가나안 지역은 농경 사회였기 때문에 다산과 풍요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들이 섬기는 가장 대표적인 바알과 아세라 신은 바로 풍요의 신이었습니다.

가슴에 유방이 수십개가 달린 여자 신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섬겼습니다. 세상의 모든 자연의 번식은 성적 결합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지극히 자연적인 원리를 통해 그들은 그들이 섬기는 신전에서 성적 행위를 일삼았습니다. 그들의 땅에 번식과 생산을 풍성하게 하는 기운을 북돋운다는 의미에서였을 것입니다.


이런 행위들은 결국 성적 타락을 가져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미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통해 간음하지 말라는 명령을 하셨고, 민수기와 신명기에서 여러 종류의 비정상적인 성적 행위를 금지하셨습니다. 그런 자들은 죽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지만 뛰어난 문화와 문물, 발전된 기술 앞에 히브리인들은 항상 감탄과 감동을 연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체성의 혼란을 겪어야 했고, 신앙적 혼란을 피해갈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가는 것과 가나안 땅에서 생존하기 위해 따라야 하는 그곳에 존재하는 사회질서, 농부들의 삶의 패턴과 기술들 사이에서 오는 미묘한 긴장감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의 주변에는 온통 바알 종교로 둘러 쌓였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부인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신앙은 이제 거의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믿음은 전쟁 때나 필요했고, 또는 반석에서 물을 내어야 할 때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아도 되었고, 반석에서 물이 나와야 할 필요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서서히 그들의 신앙 한 구석으로 몰아내고, 바울 숭배자들이 가르쳐 주는, 어떤 면에서는 더 자연스런 종교 의식 속에 자신들을 맡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군사 문제나 통치, 보호의 문제는 여호와 하나님께로 가져가고, 농사를 어떻게 하면 잘 지을 수 있는지 하는 것에 대해서는 바알 신을 찾아갔습니다. 이렇듯 사사시대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가나안 종교에 의해 위협을 받았습니다.


룻기는 바로 이런 배경 안에서 일어난 한 작은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가나안이라는 어마어마한 세속적 흐름, 발전된 문물 가운데서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여전히 옳은 것이며,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어떻게? 왜?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인지를 이 한 가정의 모습에서 볼 수 있겠습니까?

이 한 가정이 이런 큰 흐름의 역사를 어떻게 거스릴 수 있겠습니까? 약 350년의 사사시대 동안 흘러갔던 이런 큰 흐름을 어떻게 이 작은 한 가정을 통해 극복하겠습니까? 우리의 믿음이 정말로 이런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라고 확신하십니까? 우리의 믿음이 참으로 이런 세상의 엄청난 흐름을 끊고 승리의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라고 믿습니까?


나오미의 가정의 불행

오늘 본문을 보면 이 가정도 사사시대의 영적으로 혼탁한 상황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모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가정 안에도 사사시대의 끝없는 실패와 절망의 사건들이 계속 되어 가고 있습니다.

사사기를 통해 보여주는 사사시대의 특징은 계속적인 악순환의 연속이라는 점입니다. 사사기를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계속 실패를 반복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죄를 범했다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계하시고 심판하면 다시 회개하고 돌아섰다가 또 다시 죄를 범하는 써클을 돕니다.

범죄 – 하나님의 징계 – 회개 – 구원 – 다시 범죄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이 가정도 비슷한 패턴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엘리멜렉이라는 가장과 나오미, 그리고 말론과 기룐이라는 두 아들, 그래서 전체 4명의 가족이 있는 한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흉년을 피해가려고 모압 땅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아마도 그곳에는 흉년이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곳에 가서 얼마 안 있어 엘리멜렉이 죽었습니다. 실패한 것입니다. 소망을 가지고 갔는데, 절망이 닥쳤습니다. 얼마나 암담했겠습니까?

엘리멜렉의 부인 나오미는 남편은 죽었지만, 힘을 내서 두 아들을 장가보냈습니다. 모압 여인 오르바와 룻을 짝으로 맺어주었습니다. 이제는 완전히 모압에 정착할 마음을 가졌을런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두 아들이 죽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남은 일은 나오미와 두 자부, 오르바와 룻만 남았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이다 못해 완전히 극한적인 상황까지 몰려갔습니다. 사사시대의 완전한 절망과 고통은 나오미의 가정에도 동일하게 찾아왔습니다.

룻기는 하나님께서 이런 불행한 시대에 불행한 한 가정을 어떻게 세우시는지를 보여줍니다. 룻은 자기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가나안 땅에 와서 시어머니의 족보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의 친척 보아스를 만나 오벳이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 오면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들어갑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이것이 마태복음 1장 1절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섭리를 봅니다. 하나님께서 의도를 가지고 한 여인, 한 가정을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세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 사건은 전혀 자격 없는 이방 여인 룻에게 부어주신 은혜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건을 확률로 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확률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사시대의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이 한 가정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그런 은혜를 받았다면, 과연 그 은혜가 나에게 올 확률이 있겠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이런 시각이 항상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보는 눈을 가로 막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을 알려줍니다. 먼저 이 가정은 전혀 하나님의 그런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가정입니다. 왜냐하면 이 가정은 이미 조국을 등지고 떠난 가정입니다. 그렇다고 가나안에 남아있던 사람들이 더 나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나오미(엘리멜렉)의 가정은 더 문제가 많은 가정이었습니다. 아주 자격없는 가정이었습니다.

거기에 이방 여인 룻이 그 가문에 들어왔습니다. 인간적으로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조금의 가능성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적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정에 집중하셔서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그것은 그 한 가정만을 집중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마치 그렇게 한 가정, 한 개인에게 집중하시 듯이 우리 개개인에게 찾아오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그 마음, 그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두 번째, 룻은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물론 룻은 당대에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조상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그런 은혜의 줄기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그런 하나님의 어마어마한 은혜의 세계를 이미 경험했습니다. 그곳에서 보아스라는 유력한 사람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증손자가 다윗이었으니 아마도 증손자를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는 것은 보지 못했겠지만, 룻은 항상 은혜에 젖어 살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룻은 항상 자식들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나는 이방 여인이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복을 받았노라.” 다윗은 후에 “주 여호와여 내가 누구관대, 내 집이 무엇이기에 나로 여기에 이르게 하셨나이까?”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아마도 증조 할머니로부터 배운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세 번째는, 은혜의 보편성입니다.

이 은혜가 룻 한 가정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룻은 이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올라갔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 우리의 이름을 하나님의 생명책에 올려놓고, 그분의 자녀가 되는 룻과 동일한 은혜를 누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룻이 누린 사건은 룻 자신에게만 머문 사건이 아니라 오늘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게 임하는 은혜의 사건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은혜의 보편성입니다. 룻기는 하나님이 한 가정에 집중해서 찾아오심은 그 한 가정만을 살피셨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한 가정을 세밀히 살피시듯이 우리 한 가정, 한 가정, 한 개인 개인을 향해 동일한 사랑, 동일한 은혜로 다가오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 믿기 힘든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의 문화가 우리를 압도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문화는 인간의 필요를 너무도 잘 파악하고, 또 매우 자연적으로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살펴보면 지금부터 3000년 전에도 하나님을 믿는 것이 힘든 일이었습니다. 세상의 흐름은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협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살리시고 회복시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장벽을 뚫고 당신의 백성을 붙드시고, 세상을 이기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거인과 같은 가나안의 세력 앞에 초조해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골리앗 앞에 섰을 때 담대히 맞섰던 것처럼 우리는 세상 앞에 그런 담대함으로 맞서야 합니다.

모압 여인 룻, 힘 없고 연약한 여인, 바람 앞에 촛불처럼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여인,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연약한 여인을 통해 하나님의 거대하고 도도한 역사를 이어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통해 여전히 동일하게 일하십니다. 그것은 말씀 속에서 주님의 섭리와 능력을 보는 사람에게 주어진 은혜입니다. 가나안의 위협 앞에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을 새롭게 세우고 주의 은혜와 능력을 맛보는 역사를 체험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일자 설교 제목 성경
269 시험을 참는 자의 복(약1:2-12) 2012. 1. 15 주일예배
268 오직 믿음으로 구하라(약1:1-8) 2012. 1. 8 주일예배
267 힘써 여호와를 알자 (호5:12-6:6) 2012. 1. 1. 신년 주일 예배
266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11:1-10) 2011. 12. 18 대강절 네 번째 주일
265 내 백성이 내 이름을 알리라 (사52:1-12) 2011. 12. 11 대강절 세 번째 주일
264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마5:1-9) 2011. 12. 4 대강절 두 번째 주일
263 한 아기, 한 아들로 오신 예수 (사9:1-7) 2011. 11. 27 대강절 첫 번째 주일
262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6-18) 2011. 11. 20 추수감사주일
261 신앙의 수동적 역동성 (룻4:1-12) 2011. 11. 6 주일예배
260 그분은 쉬지 않으신다(룻3:14-18) 2011. 10. 30 주일예배
259 은혜가 흐르는 교회(룻3:1-13) 2011. 10. 13 주일예배
258 은혜를 입은 자 (룻2:14-23) 2011. 10. 9 주일예배
257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룻2:8-13) 2011. 10. 2 주일예배
256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히11:1-3) 2011. 9. 25 주일예배 (박유신목사 설교)
255 구약의 복음(룻2:1-7) 2011. 9. 18 주일예배
254 하나님의 인도 (룻1:19-22) 2011. 9. 11 주일예배
253 하나님의 손길 (룻1:6-18) 2011. 9. 4 주일예배
» 하나님의 섭리 (룻1:1-5, 18-22) 2011. 8. 29 주일예배
251 온전한 그리스도인 (히13:20-25) 2011. 8. 21 주일예배
250 신뢰와 기쁨 그리고 유익 (히13:17-19) 2011. 8. 14 주일예배
Board Pagination Prev 1 ...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 41 Next
/ 41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