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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겸손의 표현입니다. 히브리서를 쓰면서 강한 경고의 말을 하기도 했고, 어떤 경우는 협박처럼 들릴만한 말씀을 하기도 했고, 그들을 무시하는 것처럼 쓴 것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전한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고 말씀합니다. 잘 받아들이라는 겸손한 권고입니다.

저도 오늘로서 히브리서를 마무리합니다. 지난 해 9월 12일부터 거의 1년 동안 히브리서를 함께 보았습니다. 저로서는 히브리서를 공부하면서 참 많은 유익을 얻었습니다. 두려움과 염려로 시작했지만, 말씀이 너무 좋았고, 저에게 격려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성도님들에게는 듣기 거북한 말씀이 있었을지도 모르고, 또 때로는 말씀의 의미를 더 깊이 드러내지 못해 아쉽고 안타까웠던 적도 적지 않았었습니다. 그렇더라도 늘 진지하게 말씀을 듣는 성도님들로 인해 더욱 힘있게 말씀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고 하고는 이어서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니 지금 히브리서를 두고 간단히 썼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편지를 이렇게 길게 쓰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할 말 다 해놓고는 간단히 썼다고 말하는 히브리서 기자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히브리서 기자가 간단히 썼다고 하는 말의 의미는 주제의 단순함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히브리서를 쓰면서 오직 하나의 진리만이 그의 머리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 분만이 진리이시며, 우리의 구원자이시고, 참 소망임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외에 아무 것도 그에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강조하면서 더불어 여러 가지 말씀을 하셨지만, 항상 그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있었습니다. 모세를 이야기한 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기 위함이었고, 천사에 대해 말씀한 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을 받을 것이며, 오해받는 일이 있어도 인내함으로 참고 기다리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분의 사랑에 눈물이 젖어서 감동에 젖은 기자의 모습을 느낄 수도 있었습니다.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을 생각하며 쓴 히브리서이기에 그는 이 마지막에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 멋있는 양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중에 천국에 가면 히브리서를 쓴 사람이 누군지 확인해 보고 그 때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썼는지 웃으며 함께 대화할 날이 올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마음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분처럼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분을 많이 닮고 싶었습니다. 오직 그분만을 따라 자기 생명을 내어놓아도 될만큼 사랑하고 믿고 신뢰하며 따라갔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곧 삶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기자는 성도들의 마음에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기억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오직 그분만을 바라보며 그분만을 닮아가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말씀을 그렇게 받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21절 앞부분에 보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에 히브리서의 마지막 관심이 나옵니다. 그것은 성도의 온전함입니다.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카타르티조(katartidzo)’

여기서 말씀하는 ‘카타르티조’라는 말을 의사가 사용할 때는 환자의 부러진 다리를 다시 붙여서 온전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을 어부가 사용할 때는 찢어진 그물을 기어서, 바다의 고기를 제대로 올릴 수 있게 하는 것을 의미하고, 이 말을 항해하는 선원들이 사용할 때는 배가 풍랑에 부숴지지 않도록 견고하게 수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 말을 군인들이 사용할 때는 강한 훈련을 통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용사로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오늘 본문에서 성도를 온전하게 한다는 말의 의미는 성도가 하나님의 군사로 훈련되어서 세상의 어떤 풍랑도 이기고, 부러지고 굴절된 인간의 삶을 고추 세우며, 인생의 풍랑을 이기는 군인처럼 훈련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동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하나의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온전함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이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별다른 의미 없이 그냥 고개를 끄덕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는 온전함이란 무엇입니까?

좀 더 착한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까? 좀 더 능력있게 사는 것을 말합니까? 지금보다 조금 더 낫게 살아갈 수 있는 기술이나 재력, 탁월함을 갖추는 것입니까?

본문이 말씀하는 온전함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조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대해 두 가지 견해를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창조론적 인간 이해이고, 다른 하나는 진화론적 인간 이해입니다. 또 다른 말로 표현하면 생리적 인간 이해와 병리적 인간 이해로 나눌 수 있습니다.


진화론적 인간 이해

진화론적 인간 이해, 혹은 생리적 인간 이해란 본래 인간이란 그렇게 살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진화론이란 이 땅의 모든 생명체들이 아메바라는 단세포 생물에서 출발해서 진화했다는 이론입니다. 즉 현재의 인간은 아주 작은 생명체로부터 점점 진화해서 자연스럽게 원숭이까지 진화하고, 또 다시 인간으로 진화되었다는 주장입니다.

이런 주장이 의미하는 바는 현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모습과 기질, 성향은 모두 자연스럽게 취득된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리적 인간 이해입니다. 인간은 본래 그렇게 살도록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사랑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더 나아가서는 전쟁을 하고, 남의 땅을 빼앗고, 맘에 들지 않으면 죽이는 인류 역사의 잔혹한 모습들까지도 모두 다 저절로 취득된 인간의 본성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이론적 근거에서 동성애도 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동성애자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동성에게 사랑을 느끼게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도 그렇게 해석합니다. 시편 133편 1편에 다윗의 시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동성애를 옳다고 주장하는 신학자들은 이 말씀이 다윗이 요나단을 동성애자로 사랑하면서 지은 시라고 주장합니다. 다윗과 요나단이 친하지 않았습니까? 이 둘의 관계는 정말 강한 신뢰와 우정으로 맺어졌는데, 이것을 동성애로 해석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식의 해석을 수없이 하며 살고 있습니다. 요즘 성범죄가 많아지면서 논쟁거리가 되는 것 중에 하나가 여성들이 성범죄를 촉발시킨다는 주장입니다. 물론 일면 전혀 일리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주장하게 되면 결국 에덴 동산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것도 그들의 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책임을 져야 하는 문제가 되어버립니다.

진화론적 사고에는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동성애자도 그렇고, 인간의 범죄도 그렇고, 모든 것이 다 저절로 된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도록 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죄의 개념이 없어져 버립니다. 인간을 죄로부터 자유하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진화론적 개념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구원을 부정합니다. 구원의 필요성을 부정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다 그렇게 되게 되어 온 것인데, 거기에 무슨 구원이 필요하겠습니까? 구원이란 뭔가 잃어버린 것이 있을 때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잃은 게 없는 진화론자들에게는 구원의 필요성 자체가 상실되어져 버립니다.

그리고 더 놀랄만한 것은 진화론적 세계관에는 소망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모든 것이 다 그렇게 될만해서 되어진 것인데, 그리고 오늘날 인간이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다 그럴만해서 그렇게 사는 것이고, 오늘의 삶에서 있어서도 인간의 본래성이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산다면 여기에 무슨 구원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으며, 여기에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온전함의 의미

그래서 본문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 온전함이라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만일 이 온전함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물들어 버린 진화론적 사고에서 보는 온전함이라면 그 온전함은 단지 모든 것이 그렇게 되어가는 중에 단지 조금 더 나아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히브리서의 결론으로서 주시는 이 말씀, 오직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하심과 같이 우리도 온전하게 하신다는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들어야 하겠습니까? 그냥 단지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삶을 간구하는 것이겠습니까? 직장에서 조금 더 월급이 올라가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고, 비즈니스가 좀 더 나아져서 조금 더 삶이 윤택해져 가고, 학교에서 학위의 과정을 잘 마쳐서 안정된 직장을 잡는 것이 우리의 삶이 온전해지는 것입니까?

이것은 진화론적 사고의 한계 안에서의 온전함입니다.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모르고도, 기도하지 않고도 이미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고,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 류의 온전함은 오늘 성경이 말씀하는 온전함이 아닙니다.


창조적 인간 이해

그러면 창조적 인간 이해는 무엇입니까?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병리적 인간 이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화론적 인간 이해는 인간의 모든 현상, 미움과 시기, 전쟁과 살인, 동성애와 같은 모든 인간의 살을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말하지만, 창조적 인간 이해는 그런 모든 것들을 병적으로 갖게 된 현상이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본래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병리적 현상입니다. 본래 처음 창조될 때는 그렇게 창조되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삶을 자연스러운 삶이 아니라 죄로 인해 불행해진 것입니다. 이것은 회복되어야 할 절망적 삶이지, 결코 그대로 놔두고 그대로 순응하면서 살아갈 삶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진화론적 세계관이 인간에 대해 더 긍정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진화론은 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죄로 인해 인간이 불행해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인간을 아주 긍정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창조적 세계관이 인간을 훨씬 더 긍정합니다. 창조적 인간 이해는 인간에게 돌아갈 고향이 있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돌아갈, 회복해야 할 본래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원래의 모습, 원초적 인격, 인간의 마음 속에 흐르고 있는 창조주 하나님의 어떤 성품이 우리 안에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그 씨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아주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절망에 빠진 인간은 현재의 삶에 절대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절망에 빠진 사람은 상대적으로 아주 높은수준의, 매우 큰 기쁨과 만족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고 살아갑니다. 죄로 인해 그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기쁨과 만족은 단지 어떤 좋은 직장을 얻었거나 혹은 비즈니스가 번창한다고 회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기쁨은 그보다 훨씬 더 높은 차원의 기쁨입니다. 그 기쁨은 그 어떤 세상적인 조건에 의해서 얻거나 잃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말씀하는 온전함이란 바로 그런 것을 말합니다. 히브리서는 히브리 성도들에게 바로 그런 온전함을 이루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고난과 박해 중에 믿음을 잃어버릴 상황에 처했을 때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바라는 것은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소망과 온전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두 가지 절망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절망은 하고 싶은 일이 잘 안 되어서 갖는 절망입니다. 우리도 다 그런 절망을 경험했습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부분적으로 아직도 우리에게 그런 절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진짜 절망은 아주 높은 수준의 기쁨과 만족, 소망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바라보면서 가지는 절망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것은 절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비록 절망 가운데 있더라도 그 절망이 바로 이런 소망 때문에 갖는 절망이라면 그 절망은 또 다른 면에서 소망입니다.


저는 우리교회에서 이제 만 7년째 사역을 넘어서 8년째 들어섰습니다. 저는 우리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기도하면서 제 마음에 많이 생각했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교회란 무엇입니까? 사역을 하면서 어렵다고 느낄 때마다 교회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생각했습니다.

그러는 중에 제 마음에 꽉 차게 들어온 교회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제 마음에 그려진 교회는 대도시의 큰 교회들처럼 성장을 향해 나가는 교회의 그림도 아니고, 혹은 목사의 이름을 드러내는 교회도 아닙니다. 그 교회는 주님의 교회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하늘의 별과 같이 조용히 빛내는 교회입니다. 아주 아름다운 빛을 드러냅니다. 깨끗하고 순수하고 고결한 교회, 주님의 신부로서 자기를 단장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교회의 이미지가 제 마음에 강하게 그려지면 질수록 제 마음에는 절망이 더 커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교회의 이미지가         제 마음에 강하고 깊이 그려질수록 제 마음은 현실의 교회가 그것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 때문에 절망하고 안타까워하고 아파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절망은 아프지만, 사실은 ‘반대로’ 아주 아름다운 교회, 성경에서 말씀하는 본래적인 교회, 그런 교회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점에서 절망하는 것입니다. 아니 그런 점에서 절망해야 합니다.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여기서 말씀하는 온전함이란 바로 그런 눈으로 볼 때의 온전함입니다. 그런 눈을 가지고 그런 교회를 보고, 그런 그리스도를 보면서 그런 그리스도와 같아지기를 원하는 소원을 가지고 절망할 때 그 절망과 동시에 보고 있는 모습이 바로 온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도 그런 모습으로 볼 수 있어야 하고, 우리의 자녀를 볼 때도 그렇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단지 세상적으로 공부잘하고, 좋은 학교에 가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일단 좋은 학교에 들어가면 다른 문제는 그 다음에 생각하면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목사의 마음에 교회에 대한 그림이 먼저 그려져야 목사의 사역이 바른 방향, 온전한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자녀에 대한 올바른 그림이 그려져야 자녀를 위해 올바른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녀를 위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자녀를 망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가정에 대해서도 그런 그럼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가정에 대해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의도의 모습을 마음으로 그릴 수 없는 사람은 결코 아름다운 가정을 만들 수 없습니다. 이것은 창조적 인간 이해가 필요합니다. 병리적 인간 이해가 필요합니다. 내 아내가, 내 남편이 저렇게 하는 것은 저 인간이 본래 저런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창조하신 그 모습을 남편과 아내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온전함에 대해 성경은 여러 번 반복해서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그런 온전함을 이루는 삶을 살도록 여러 번 여러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권면하십니다. 그 중 몇 가지 점을 간단히 나누려고 합니다.


1.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온전하게 하십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17절 말씀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라.”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의 영향을 계속 받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믿음의 사고를 하는 것 같아도 우리의 속을 들여다 보면 우리가 얼마나 세속적인 사고에 깊이 빠져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여간해서 그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우리는 세상이 들려주는 소리를 결코 외면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함을 이루려면 먼저 주님의 말씀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그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나눠야 합니다. 주의 말씀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리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하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말씀을 읽고 공부하십시오. 이제 9월부터 다시 제자훈련을 합니다. 말씀을 붙들고 놓치 않아야 합니다. 그 말씀을 붙들고 씨름해야 합니다. 그 말씀을 붙들고 우리 자신의 삶의 문제를 치열하게 고민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 앞에서, 말씀 안에서 우리 자신에 대해 절망할 때까지, 그리고 참된 우리의 모습, 마땅히 주의 은혜 안에서 세워질 참된 모습을 볼 때까지 그렇게 나아가야 합니다.


2. 기도를 통해서 우리를 온전하게 하십니다.

시편 51편의 다윗의 기도를 보면 그가 얼마나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 간절히 나아가는지 보여줍니다. 그가 범죄한 후에 그는 잃어버린 삶의 회복을 위해서 몸부림칩니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다윗이 즐길만한 것이 없었겠습니까? 유흥할만한 꺼리들이 부족했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하나님 앞에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는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인생을 보고 아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절망하는 사람은 진짜 기쁨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절망하는 사람은 그분만이 채울 수 있는 삶의 기쁨과 감사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 은혜를 맛보기 원합니다. 그 은혜를 누리기 위해 기도로 나아가는 성도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3. 교회의 지도자와 성도를 통해 우리를 온전하게 하십니다.

에베소서 4장 11-12절 말씀입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저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교회의 지도자를 통해서 성도를 온전하게 하십니다.

또한 갈라디아서 6장 1절에는 신령한 성도들이 온유한 마음으로 범죄한 성도들을 바로 잡아주고, 또 자신도 자기를 살펴 시험을 받지 않도록 하라고 권면합니다. 교회의 지도자와 성도가 서로를 온전하게 도우라고 권면합니다.

교회 안에서 선한 일을 권면하는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서로 흠을 보고 말을 옮기는 일에 열중할 것이 아니라         그런 일들을 정중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서로 바로 잡아주고,         온전한 교회, 온전한 성도의 삶을 바라봄으로 온전하게 됩니다.


4.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성도를 온전하게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11절입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베드로전서 5장 10절에는 “고난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라고 말씀했습니다.

고난이 우리를 온전하게 합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우리의 연약한 본성을 봅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세상의 악함을 봅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자신과 세상에 대해 절망하기도 합니다. 그런 절망의 자리에서 우리는 온전하게 하시는 주님을 경험합니다. 고난의 자리에서 우리를 연단하여 정금과 같이 만드십니다. 아주 깊은 고난과 슬픔 속에서도 주님께서 주시는 내적 평안과 은혜를 맛보기도 합니다.

만약 목사가 마음에 불편함이 있다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불평을 한다면 교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만약 남편이 가정에서 불만이 있다고 소리소리 지른다면 가정이 어떻게 평안하겠습니까?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를 연단하시고, 온전하게 만드십니다. 이것은 고난을 통해 주시는 엄청난 은혜입니다. 고난은 힘들고 어려운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바르고 올곧게 세워갑니다.



하나님은 히브리서를 마무리하면서 당신의 자녀들을 온전하게 하십니다. 이 온전함은 절망을 통해 만드시는 온전함입니다. 인간에 대한 막연한 긍정은 결코 우리를 온전하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주님이 보여주시는 놀라운 은혜, 기쁨, 감사를 바라볼 때 상대적으로 오늘의 삶에 대해 신앙적 절망을 갖습니다.

하지만 그 절망은 우리를 주님 앞에 바르게 세웁니다. 그런 절망은 정말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기쁨, 참된 은혜를 볼 때 갖는 절망입니다. 물론 어느 기간 동안 우리는 세상적인 절망을 갖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는 주님 안에서 참된 것을 보는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은혜의 대열에서 낙오되서는 안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직해야 합니다. 주님을 바르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의 은혜 안에서 온전함을 이루는 성도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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