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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로 부활에 대한 4번의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던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점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어느 정도 비슷한 면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우리는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부활이 우리의 삶에서 지금 당장 그렇게 절실하지 않게 생각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부활은 왠지 우리에게 피상적이고 단지 미래의 사건으로만 인식하고 있습니다.

지난 세 번에 걸친 부활에 대한 말씀에서 첫 번째는 예수님의 부활의 근거를 살펴보았고, 두 번째는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인간의 부활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영적인 근거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아담 안에서 죽은 것처럼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그 다음 단계로, 성경은 죽은 자의 몸의 부활에 대해 말씀합니다. 앞의 본문에서는 우리가 부활할 수 있는 영적인 근거로써,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부활할 수 있는지를 아담 안에서 우리가 죽었던 것에 유추해서 영적인 근거를 생각했는데, 오늘의 본문은 부활이 물리적인 이 세상에서 어떻게 가능한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35절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이런 질문을 하게 된 동기는 자연의 순환 원리를 보면서 사람들이 갖게 되는 질문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죽으면 자연으로 돌아가서 자연의 일부가 됩니다. 바다에서 죽으면 물고기의 밥이 되기도 하고, 죽어서 땅에 묻히면 부패되어 자연의 일부로 돌아갑니다. 때로는 식물을 자라는 거름이 되기도 하고, 동물의 먹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그렇게 순환하다가 결국 다른 사람의 몸의 일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자연 속에 산화되었던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모아지고 살아난다고 해도, 자연의 순환 세계 속에서 섞여져 버린 인간의 몸이 어떻게 온전한 몸으로 살아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 사도 바울은 “어리석은 자여”(36절)라고 답변을 시작합니다. 이런 질문은 다소 유치한 질문이라는 식의 느낌을 갖게 합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이런 질문은 ‘낮은 수준의 부활 논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이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 꽤 길게 논증을 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본문을 통해 매우 큰 도전과 격려를 받았습니다.

36-38절 말씀을 봅니다.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가 아니고, 단지 알갱이나 씨를 뿌리는데, 거기서 자라는 것은 온전한 형체를 가진 나무와 열매를 얻게 됩니다.

농사를 지어보신 분들은 아시지만, 감자를 순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잘라서, 그것을 땅에 심으면 감자 줄기와 잎이 땅 위로 자라고, 감자 열매는 땅 속에 맺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작은 씨 감자를 심으면, 그것이 새로운 감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있는 순이 땅에서 썩는 감자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아 새로운, 더 많은 감자를 열매맺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몸의 부활도 마치 그와 같은 이치로 이루어진다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몸은 땅에 묻혀서 썩어지고, 없어지지만, 하나님은 그 몸으로부터 새로운 생명, 새로운 몸을 지어 입히셔서 부활케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2절과 4절에서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한다’고 말했습니다. 즉 그는 인간이 죽었을 때 그것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새로운 옷으로 덧입혀 주시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43-44절에서는 이렇게 다시 말씀했습니다.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것으로 심고 신령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한 영의 몸도 있느니라.” 우리의 몸은 다시 더 강한 것으로, 더 영광스러운 것으로 덧입혀질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이 땅에 묻히는 것은 결코 부활의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죽을 때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날이 되면 더 온전한 몸, 더 영광스러운 몸을 입을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고 멋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 때는 성형수술을 하느라고 돈을 드린 사람들은 후회할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점점 더 나아들어가고, 늙어갑니다. 그래서 소망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부활의 소망을 확신하고 바라볼 때 나이가 더 많은 사람일수록 더 큰 소망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많은 고난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끊임없이 기뻐하라고 성도들에게 권면했습니다. 자신이 기뻐하지 않고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기뻐하라고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수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세번 태장, 한 번 돌에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일동안 깊은 바다에서 지냈었고, 옥에 갇히기도 했고, 매도 수 없이 맞았고, 여러 번 죽을 뻔했고, 또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그는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었겠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에 보면 바울은 성도의 삶을 경주하는 자에 비유합니다. 경주자는 경기를 하느라고 힘들어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짜증을 내거나, 분노하지는 않습니다. 바울이 그런 숱한 고난을 당하는 상황에서 그는 단지 육체적인 고난만을 당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게 고난을 주는 가해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런 가해자들, 박해자들에 대한 분노와 고통, 관계의 깨짐에 대한 마음의 깊은 상처가 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바울의 서신서 어디에도 그런 분노의 말을 남긴 것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는 단지 육체적 고통만을 언급합니다.

왜,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그가 자신의 인생을 경주자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경주자는 결코 자신의 삶에 대해 짜증을 내지 않습니다. 마라톤을 하면서 40킬로미터가 넘는 엄청난 거리를 뛰면서 내가 왜 이런 달리기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 원망하지 않습니다. 삶의 길을 열심히 달려가느나록 힘쓰는 것과 삶의 기쁨이 없어서 짜증을 내고 분노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온갖 어려움과 고난을 당하면서도 기뻐했고, 또 기뻐하라고 명령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해도 기뻐야 합니다. 어제와 오늘 교회의 여러 행사들이 있어서 주방에서 계속 섬기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너무들 많이 수고하셔서 어제는 그분들을 격려하기 위해 잠시 주방에 들렸습니다. 그런데 모두들 즐겁게 일하고 있었습니다. 웃음과 즐거운 대화가 오가고 있었습니다. 목사가 더 이상 격려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격려를 받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주방에 들어가면 찬바람이 부는 것 같을 때도 있습니다. 싸운 것도 아닌데 말이죠.

우리는 부활을 믿고, 부활의 삶을 살아갈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누릴 그 영광스런 삶을 기대하며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달려가는 경주자입니다. 물론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경기하는 자와 같이 골인 지점을 바라보며 그곳에 이르렀을 때의 영광과 기쁨을 기대하며 달려가는 삶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냥 생각하는 인생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또 하나의 말씀을 보려고 합니다. 53절을 보면, “이 썩을 것이 받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에는 사망이 생명을 이기는 것같아 보입니다. 우리 몸에 암세포가 생기면 사람들은 결국 그 사망의 세력에 생명이 삼킴을 당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생명이 죽음을 삼킬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생명이 죽음을 정복합니다. 이런 일이 궁극적으로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55절에는 사망을 비웃고 조롱합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이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이제 네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사망이 쏘는 죄와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다 해결되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와 율법의 사슬에 매여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의 능력을 받아 경주자로서 승리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이런 부활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마지막 58절의 말씀으로 권면하면서 마무리합니다. 우리도 이 말씀을 의지하여 부활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아멘


List of Artic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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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9 성자 예수님의 사역: 구속(엡1:7-12) 2012. 7. 29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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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7 에베소 교회(엡1:1-2) 2012. 7. 1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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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1 약속 있는 첫 계명(출20;12, 엡6:1-3) 2012. 5. 13 어비이주일
» 몸의 부활 (고전15:35-58) 2012. 4. 29 주일예배
279 부활의 삶(고전 15:20-34) 2012. 4. 22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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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7 성찬의 목적 (고전11:23-26) 2012. 4. 1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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