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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에 대해 세 번째 말씀을 전하면서, 고민을 했습니다. ‘부활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떻게 와 닿을까?’하고 말입니다. 부활의 믿음이 있지만, 그 부활이 현재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그 부활 신앙이 과연 온전한 것인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봤습니다. 우리는 보통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만, 부활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떤 경우는 부활의 믿음을 사치스럽게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즉 해결해야 할 많은 삶의 문제들을 앞에 놓고 있는데, 죽음 후에 있을 부활의 문제를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여유있는 자의 사유의 놀이쯤으로 비쳐질 것 같은 마음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오늘 본문은 그런 질문을 던져 놓고 보려고 합니다. 부활은 과연 죽음 후에 올 어떤 종류의 소망을 말하는 것입니까?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21-22절을 봅시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다는 말을 다음 절에서는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라고 재차 설명합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말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당연하게 들리는 말이지만, 우리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담이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또 자식을 낳아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인간이 본래 한 생명의 꾸러미 속에 함께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말하지만 온 세계의 사람들은 모두 아담 안에 있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고 범죄했을 때 그 안에 함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죄에 오늘 우리들도 모두 참여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인간은 다 범죄했습니다. 이것을 대표와 연합의 원리라고 말합니다. 이로 인해 모든 인간은 아담의 불순종과 불신앙을 이어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이런 원리는 다시 22절 하반절에서 동일한 원리로 이어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아담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범죄했다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점에서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성경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담 안에서 우리가 죄인이 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인간의 죄를 대신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나를 위한 것으로 믿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죽음에 함께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죄의 값을 지불하게 되고,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을 때 두 가지 변화를 경험합니다. 첫째는 신분의 변화입니다. 사단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본성의 변화를 갖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 안에 흐르므로 그의 생명이 우리 안에 성령으로 거하고, 우리는 새로운 본성의 변화를 이루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 안에 이루어지는 부활을 이런 원리로 설명합니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이 말씀은 바로 그런 점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것은 부활이란 죽은 후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영생을 하고, 부활을 누리는 것이지, 부활이라는 것이 죽은 후에 다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부활의 삶을 삽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미 부활의 삶을 살고 누려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면에서 다소 패배적인 삶을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자기를 포기하고, 부인하며 십자가를 진다는 말씀을 마치 의지도, 소망도, 적극성도, 역동성도 없는 어떤 삶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더 삶을 내려놓지 못하는 자신을 한탄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것이 맞지만, 다른 면에서는 그런 우리의 모습에 부활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잃어버리고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십자가를 지실 것에 대해 매우 안타까워하며 이 잔을 할 수만 있으면 내게서 떠나가게 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하지만 그 기도가 끝난 후 예수님은 매우 담대하게 그 잔을 받을 준비가 되었음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주님은 십자가를 질 준비를 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빌라도 앞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는 기이히 여겼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심문을 받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반응하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 목숨을 구하게 위해 애걸하거나, 혹은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게 위해 자신을 변호하는데 힘을 썼는데,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분이 십자가를 지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할 수 없어, 양보함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기로 결정하시고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부활의 삶은 패배자의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을 향해 담대히 가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삶으로 나타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 다소 적당한 삶을 추구합니다.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소서’ 라고 기도하면서 그 말씀의 본래 의미와는 상관없이 적당한 삶을 유지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성숙함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29-30절에서 바울이 고백하는 말을 보면,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릎쓰리요”라고 하는 말을 보면, 바울은 스스로 위험 가운데 뛰어들어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목적 때문입니다.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갔습니다. 배를 타고 가다가 무려 14일 동안이나 풍랑 속에서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276명의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그는 그 길을 기꺼이 갔습니다. 열심으로 달려갔습니다. 그 고난이 그의 가는 길을 막지 못했고, 그의 의지, 목적을 꺽지 못했습니다. 그의 삶은 결코 패배주의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얻었으며, 복음을 전했고, 영혼을 구원했습니다. 그는 매우 목적 지향적인 삶을 살았고, 그런 삶의 방향에서 조금도 양보하거나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의 믿음이었습니다.

다니엘의 사자굴

다니엘이 다른 신하들의 모함에 의해 사자굴에 들어갔습니다. 30일 동안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닫고 기도했다면 그는 아마도 그런 위험을 피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믿음을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사자굴에 들어가서 죽음의 위기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살아나온 후에 자신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를 드러내었습니다.

우리교회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는 우리교회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교회에 복을 주셔서 오늘까지 잘 자라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저는 늘 행복한 목회를 한다고 생각하며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 앞에 섰을 때 저는 과연 우리교회가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주를 섬기고 있는가를 자문하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부활의 신앙은 마땅히 가야 할 길을 가고, 마땅히 서야 할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가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다니엘이 꼭 창문을 열어놓고 기도해야만 한 것은 아닐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과 동일하게 문을 열고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럴 때 슬그머니 창문을 닫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애써 어려운 상황을 만나지 않으려고 합니다. 무난하고 평안한 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부활의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부활의 신앙은 문안한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마땅한 길을 가는 것입니다. 부활의 신앙은 우리의 생각과 판단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기 때문에 마땅히 갈야 할 길을 가는 것이고, 부활을 믿기 때문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냥 외적으로 평안한 것이 다가 아니라, 교회가 마땅히 서야 할 그 자리에 서 있기 위해 위험을 무릎쓰고 날마다 죽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결론

오늘 말씀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도전이 되길 원합니다. 오늘 우리들은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갑니까? 주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로운 신분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진 새로운 본성을 가진 자로 살아갑니까? 그것을 믿고 갑니까? 그렇게 말씀 안에서 약속하신 주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성취되도록 날마아 자신을 죽음의 자리에 내어놓으며, 위험을 무릎쓰는 삶을 살아갑니까? 부활신앙은 우리가 부활의 믿음으로 살아갈 때만 가능합니다. 이런 부활의 은혜, 부활의 능력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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