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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말씀은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있었던 일입니다. 23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확하게는 다음 날이 유월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당할 일을 아시고, 전날 저녁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유월절 식사를 했습니다. 유월절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30년 동안 노예로 살다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탈출한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애굽의 모든 장자를 죽게 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날 밤 모두 나오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참 놀라운 날이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누룩 없는 빵을 준비하도록 하셨습니다. 그 이유를 출애굽기 12장 39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들이 애굽으로부터 가지고 나온 발교되지 못한 반죽으로 무교병을 구웠으니 이는 그들이 애굽에서 쫓겨나므로 지체할 수 없었음이며
아무 양식도 준비하지 못하였음이었더라.” 아주 급하게 나오는 모습을 그릴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놀라운 일입니다. 어떻게 노예로 살던 민족이 해방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가능하다고 해도, 아마도 수많은 피를 흘리는 과정을 거쳐서 겨우 어느 정도의 해방을 얻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작품이었으며,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애굽에서 나온 후 매년 정월 14일, 애굽에서 나온 날을 기념해서 유월절 절기를 지켰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큰 명절이었습니다. 유월절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해방하신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감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특별한 목적(사명)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모아놓고 유월절 식사를 하는 장면입니다. 이 유월절 식사를 통해 예수님께서 하실 말씀은 바로 애굽으로부터의 해방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구속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먼저 떡을 제자들에게 나누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24절). 그리고 이어서 식사를 하신 후 다시 잔을 나눠주면서 말씀하셨습니다.“이 잔는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25절).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 성만찬 이야기를 전하면서 마지막에 이런 설명을 더 달았습니다.“너희가 이 떡으 먹으며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26절).


성찬식의 오용
이 말씀이 복음서에서가 아니라 바울의 서신서에 나오는 이유는 당시 고린도교회가 이 성만찬을 잘못 오용했기 때문에 그 의미를 바로 잡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성만찬은 초대교회, 고린도교회 안에서 많이 오용되었었습니다. 성찬식이 오용된 이유는 그 내용을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는 성찬과 애찬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성찬식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식사와 함께 성찬식을 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떡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난 후 25절을 보면,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식후에’라는 말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떡을 떼신 것과 함께 식사를 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식사를 모두 마친 후에 잔을 가지시고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초대교회에는 식사와 함께 성찬을 행했는데, 이 때 하는 식사를 흔히 애찬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찬의 의미보다는 먹는 것 자체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특히 초대교회 시대는 아직까지 신분의 차이가 분명하게 있었습니다. 고대시대는 주인과 노예가 함께 공존하던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 들어오면 이런 신분의 차이가 없어졌습니다. 이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사회적인 신분의 차이가 교회 안에서의 나눔에 구별을 갖게 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성찬식의 경우였습니다. 고대시대 주인들은 할 일이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예배 처소에 와서 예배드리는 일이 자유로웠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온 것입니다. 하지만 노예 신분의 성도들은 집안에서 모든 일을 마치고 와야 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항상 늦게 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만찬을 모일 때마다 했었는데, 이렇게 식사를 겸한 주님의 만찬은 늘 먼저 온 사람들이 다 먹고, 노예인 성도들이 왔을 때는 이미 떡이 다 없어진 후였습니다. 때로는 주님의 피를 기념하는 포도주를 너무 많이 마셔서 취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래서 27절 이하에 보면, 사도 바울은 주의 떡과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해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성찬식에 참여할 때는 항상 자신을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마셔야 하며,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과 같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사도 바울은 아주 심각한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굉장히 심각한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공동체나 몸이 아픈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이유로 그럴 수 있습니다. 연세가 드시면서 점차 몸이 쇠약할 수도 있고, 또 여러 가지 자연적인 환경이나 주변 여건들로 인해 몸이 약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 몸이 약한 자가 많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이유를 그들의 주님의 만찬에 잘못된 자세로 참여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당시 상황으로만 볼 때 사도 바울의 해석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이 바른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문제의 심각성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그들의 질병과 죽음에 대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유를 모른채 약하고, 질병으로 고통을 겪었으며, 때로는 죽음에 이른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는 이런 영적 무지가 그들의 삶에 고통과 질병을 가져왔음을 보여줍니다.

물론 이 말씀을 성경에 대한 좀 더 넓은 이해가 있을 때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본문의 말씀 안에서만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성찬의(주님의 만찬에 대한) 남용 문제입니다. 성찬은 우리에게 무한한 유익을 주는 예식입니다. 성찬은 우리에게 주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은혜를 더 잘 알도록 인도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 십자가의 능력을 깨닫게 하고,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무한한 삶의 은총을 누리게 하는 예식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 성찬의 유익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성찬식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은 23-26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성찬식의 본래 의미를 세 가지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 성찬의 목적은 죄 용서의 은총을 누리게 합니다.

24절 말씀입니다.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그렇습니다. 떡을 떼는 것은 우리를 위하여 주님께서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 놓는 것입니다. 성만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미하는 사건입니다. 즉 예수님은 잡히시기 바로 전 제자들과 함께 주의 만찬을 나누시면서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이 죽음이 바로 그들을 위한 것이고,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만찬에 참석할 때마다 우리의 죄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만찬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살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신 주님의 십자가를 기억하게 하고, 또한 그 십자가의 원인이 된 우리의 죄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만찬은 우리를 회개로 이끌어 갑니다. 요한일서 1장 9절 말씀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우리는 주님의 만찬에 참석하면서 우리의 죄를 고백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우리를 위해 살을 찢기신 주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돌아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정결하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한없는 기쁨을 가져옵니다. 죄의 고백과 더불어 갖는 용서의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결단하게 하고, 죄로부터 자유해진 우리 자신으로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이런 은혜를 깨닫고 이 성찬예식이 참여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았든지, 혹은 아직 세례를 받지 않아서 이 예식에 정식으로 참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 예식이 주는 의미를 되새기며 함께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 성찬의 목적은 이 성찬을 통해 주님과 새 언약을 맺는 것입니다.

25절 말씀입니다.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그렇습니다. 주님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새 언약’이라는 말은 대표적으로 예레미야 31장 31-33절에 나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옛 언약은 십계명 돌비에 써서 기록한 말씀이지만, 새 언약이란 성도들의 속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기록한 것입니다. 옛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외적인 행위를 규제하는 율법이지만, 새 언약은 주의 자녀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사랑에 의해 움직이는 역동적인 삶을 가능하게 하는 언약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성만찬을 통해 교회 공동체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움직이는 역동성을 따라 주님을 향해 나아가는 변화된 삶을 의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주님의 말씀을 통한 은혜에 의해 움직이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무엇이든지 억지로 하지 않습니다. 성도는 언제나 기쁨과 자원함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도 기쁨으로 합니다. 때로는 원수조차도 기꺼이 주님의 사랑으로 품어 앉을 수 있는 능력을 갖습니다. 스데반이 청년 사울을 중심한 유대인들에 의해 돌에 맞아 죽을 때 그는 하늘문이 열리는 것을 보면서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아지면서 하늘을 향해 손을 듣고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런 능력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 마음 안에 주시는 새 언약으로 인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들을 동일하게 역사하시고, 우리의 삶 속에 주님께서 주시는 무한한 기쁨과 자원함과 은혜로 주님께 충성스러운 삶을 살아가며 기쁨을 누리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세 번째 성찬의 목적은 이 성찬을 통해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26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주님의 성만찬을 행하는 것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포함해서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그가 다시 오실 때까지’ 전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한 구절 안에 주님의 죽으심과 다시 오심, 즉 재림을 말씀합니다. 이 사이에 부활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활이 없이 다시 오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통해 보여주는 성만찬의 세 번째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그리고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단순한 죽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죽음의 목적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죽음의 목적은 우리를 죄 가운데서 살리시는 것이며, 그분과의 새 언약을 맺고 새로운 삶의 동기로 살아가는 성도의 삶을 증거하며, 그분은 또한 부활하셨고, 결국 다시 오실 것을 선포하고 전하는 예식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성찬예식에 참여할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의 목적을 살펴보아야 하고, 우리의 믿음의 삶에 동기를 점검해야 하며, 또한 다시 오실 주님을 온전히 맞을 준비가 되었는지를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하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며, 우리가 누리는 은혜가 얼마나 특별하고 놀라운 은혜 위에 서 있는지를 보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성례식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고 그 깊은 은혜에 참여한다면 우리는 말할 수 없는 주님의 은혜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죽으심을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해서 기념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는 그의 몸의 실체를 볼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몸의 상징을 기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 대신 그 때는 성만찬 대신에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배설될 것입니다(계19:7-8). 그런 의미에서 성만찬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의 그림자입니다. 그러므로 성만찬은 주의 죽으심에 대한 기념인 동시에 미래의 영원한 축연에 대한 준비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만찬은 복음의 이 영광을 우리에게 확인시켜주며, 동시에 복음의 영광을 아직 모르는 영혼들에게 이를 전파하리라는 의욕과 다짐을 새롭게 불어 넣어주는 예식입니다.


결론: 우리 자신을 살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종려주일을 맞아 주님께서 잡히시던 날 저녁에 제자들과 함께 나눈 성만찬에 참여할 것입니다. 이 성만찬은 우리에게 주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한층 더 깊이 이해하도록 돕는 은혜를 줍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의 많은 성도들처럼 성찬식을 어느 정도 남용하고 의미 없이 받아들인 점이 없지 않습니다. 성찬식의 남용을 피하는 방법은 성찬식의 정확한 의미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찬식은 다소 무게 없이 다루고 참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적당한 흥미로움으로 참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찬식은 주님께서 당신의 몸과 피를 흘리심으로, 즉 당신의 생명을 다 내어주심을 보여주는 예식입니다. 그분에게는 모든 것을 다 주셨다는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런 마음으로 이 성찬식에 참여해야 합니다. 경건함으로 참여해야 하고, 자신의 죄를 돌아보며 죄 용서의 은혜를, 그리고 죄 용서로 인한 기쁨을 나누면서 참여해야 합니다.

또한 주님과의 새 언약을 맺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조금도 억지로나 인색함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언제나 자원함과 기쁨으로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내어 주신 것처럼 우리의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림으로 나아갑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할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죽으심의 사건을 세상에 알리는 것입니다. 이 귀한 복음을 나만 가지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전해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은혜의 사건이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역사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친히 명령하신 성만찬은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이 시간 성찬식에 참여할 때 주님의 은혜가 가득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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