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샬롯츠빌한인교회

주일설교

조회 수 12510 추천 수 205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성경은 여러 곳에서 언어에 대해 말씀합니다. 잠언 18장 21절에서는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고 말씀합니다. 말 한 마디에 사람의 생명이 달려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체로 말을 쉽게 생각합니다. 외국어를 공부하는 일에는 열심을 내지만, 우리 말을 연습하는 경우는 좀처럼 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말을 잘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말을 참 잘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로 실수하고 주어담을 수 없는 상황에서 난처해 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말이 단순히 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5장 18절에는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마음으로부터 훈련되지 않으면 말은 좀처럼 다스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본문은 우리들에게 언어에 대한 중요한 말씀들을 주고 있습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첫째 말의 실수를 하지 않으려면 겸손해야 합니다. 말 실수를 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우리의 마음에 겸손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초대교회는 날로 성장하는 교세로 인해 많은 지도자들이 필요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야고보가 많이 선생 되지 말라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히브리어에서 ‘배우다’는 동사의 강조형(피엘형)은 문법상으로는 ‘많이 배우다’는 의미가 되는데, 실제는 ‘가르치다’는 의미가 됩니다. 즉 히브리어에서는 배우는 것과 가르치는 것이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둘은 어떤 의미에서 같다는 것입니다. 즉 배우려는 마음을 잃어버리면 가르칠 수 없고, 가르치는 자는 항상 배우려는 자세로 가르쳐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만약 선생된 자가 배우려는 마음이 없이 가르친다면 그것은 뭔가 영향력을 끼치고 싶어하는 마음만을 가지고 있는 부패한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가르치는 자도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겸손함으로 가르칠 때만이 언어의 실수를 피할 수 있습니다.

2절에는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고 했습니다. 새번역 성경은 이것을 “누구든지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 몸을 다스릴 수 있는 온전한 사람입니다.”고 번역했습니다. 즉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삶의 모든 영역을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우리의 언어를 겸손함으로 잘 다스릴 필요가 있습니다.


말은 창조적 힘이 있습니다.

말은 두 가지 힘이 있습니다. 하나는 긍정적인 힘으로 창조적 능력이고, 또 하나는 부정적인 힘이로 파괴력입니다. 언어의 창조적 능력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제일 먼저 나타납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고치실 때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 진지라”고 말씀합니다.

말은 굉장한 창조적 능력이 있습니다. 이러한 능력은 하나님만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도 그러한 능력을 주셨습니다. 얼마 전 한국의 MBC 방송국의 아나운서들이 실험을 했습니다. 두 개의 병에 잘 된 밥을 담고 뚜껑을 닫은 후 한 쪽 병에는 ‘감사합니다’란 글을 써놓고, 다른 병에는 ‘짜증나’라는 글을 써놓았습니다. 그리고 한 달 동안 ‘감사합니다’라고 표시된 병에는 매일 좋은 말을 들려주는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좋아합니다’ 등입니다. 그리고 다른 또 하나의 병에는 매일 똑 같은 방법으로 나쁜 말을 들려줍니다. ‘싫어해’, ‘미워’, ‘나빠’, ‘못됐어’ 등입니다. 그렇게 약 한 달이 지난 후 보니 긍정적인 말을 한 병의 밥을 하얗고 뽀얀 곰팡이가 피었는데, 부정적인 말을 한 병에는 시커멓고 지저분한 곰팡이가 피고, 밥을 썩어 있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의 창조적 능력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주신 가장 큰 특권 중 하나는 자녀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4절에서는 말의 능력을 큰 배를 움직이는 작은 키로 비유합니다. 키는 작지만, 큰 배의 방향을 주관합니다. 또한 3절에서는 말의 영향력이 극대화되기 위해서는 언어가 적절한 통제를 받아야 함을 말씀합니다. 말(horse)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비유를 통해서 말(horse)이 맘대로 움직이는 것을 통제할 때 말은 가장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마찬가지고 우리의 언어도 적절히 통제될 때 효과적인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것보다 침묵을 지킬 때 더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인간관계가 꼬여서 힘들고 어렵다면, 많은 변명과 논증보다는 무조건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한 마디로 끝을 내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합니다. 그래서 잠언서 10장 19절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말은 창조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 한 마디로 나병환자가 고침을 받기도 합니다. 성도는 이런 창조적 언어의 축복을 누릴 특권이 있습니다. 이런 은혜가 가득하시길 축원합니다.


다른 사람을 축복해야 합니다.

5절 하반절부터 8절에는 언어의 파괴적인 힘에 대해 말씀합니다. 말은 불과 같아서 마치 작은 불씨가 많은 나무를 태우는 것처럼 그렇게 작은 혀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태워버리고, 사람들의 인생을 타들어가게 합니다. 상처를 받아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기억을 별로 없지만, 상처를 받은 기억은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도 좀처럼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지금도 이런 파괴적인 언어로 인해 고통을 받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받은대로 갚아줄 마음을 품고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따지고도 싶고, 언젠가를 다시 되갚아주리라고 다짐을 하는 분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또 조금 믿음이 있다고 하시는 분들은 내가 받은 상처를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아 주실 것이라고 기도하며 확신하는 분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성도의 기도에 쉽게 응답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 이유를 본문 9-12절에서 말씀합니다.

9-10절을 봅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그분의 은혜로 생명을 얻은 자로, 날마다 새롭게 주시는 주의 은총을 누리고 사는 자라면’ 하는 전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다시 정리하면, ‘만약 당신이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며 사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를 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말의 의미를 다시 연장해서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죄 씻음과 용서를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우리의 상처도 주님께서 씻어주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성도는 언제든지 주님으로부터 받는 은혜로 인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비록 다른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아도 회복을 위해서 상처를 준 사람을 찾아갈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치유받기를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좋으념 다 좋고, 내가 불편하면 다 불편하다.’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내게 기쁨이 있으면 다 긍정적으로 좋게 이해되고, 내가 불편하면 다른 사람이 어떤 말을 해도 불편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오늘 정말 예쁘다”고 말해 주면 그냥 ‘감사합니다’라고 하지 못하고, ‘내가 언제는 안 예뻤냐?’고 오히려 반박합니다. 자기 마음의 불편합니다. 누가 그를 위로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참 만족과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11-12절 말씀입니다. 어떻게 한 샘에서 단 물과 쓴 물이 나겠는가? 어떻게 무화과나무에서 감람열매를 맺겠는가? 단 물을 내는 샘은 밖에서 아무리 더러운 말을 많이 부어도 다시 단 물로 돌아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받고, 상처를 받아도 우리를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우리는 다시 회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결론

이런 은혜를 누리기 위해 우리는 다음 세 가지를 힘써야 합니다.
첫째는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다른 방법으로 마음의 상처를 회복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으로 충만한 것밖에는 없습니다.

둘째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예수를 믿은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과거의 습관에 젖어 있습니다. 다리를 절던 사람이 치료를 받은 후에도 여전히 과거의 습관처럼 절고 다니는 것과 같은 이치죠. 그런 경우는 의도적인 훈련 과정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의 언어 생활에서도 구체적인 언어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감사의 언어, 기쁨의 언어, 소망의 언어를 훈련해야 합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창조적 언어의 결과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미안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말했을 때 따라오는 결과에 대한 기대가 있을 때 우리는 기꺼이 겸손함으로 낮아져서 바뀌어진 언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 기대가 곧 믿음이며 하나님을 소망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말의 힘, 그리고 언어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일자 설교 제목 성경
289 성자 예수님의 사역: 구속(엡1:7-12) 2012. 7. 29 주일예배
288 교회의 정체성(엡1:1-2) 2012. 7. 8 주일예배
287 에베소 교회(엡1:1-2) 2012. 7. 1 주일예배
286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 (엡1:1-2) 2012. 6. 24 주일예배
285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약5:13-20) 2012. 6. 17 주일예배
284 믿음의 기도(약5:13-20) 2012. 6. 10 주일예배
283 하나님의 약속을 소망하라(약5:7-12) 2012. 6. 3 주일예배
282 생명보다 귀한 것 (행20:17-27) 2012. 5. 20 주일예배
281 약속 있는 첫 계명(출20;12, 엡6:1-3) 2012. 5. 13 어비이주일
280 몸의 부활 (고전15:35-58) 2012. 4. 29 주일예배
279 부활의 삶(고전 15:20-34) 2012. 4. 22 주일예배
278 부활의 증거 (고전15:1-11) 2012. 4. 8 주일예배
277 성찬의 목적 (고전11:23-26) 2012. 4. 1 주일예배
276 하나님이 부요케 하시는 인생 (약5:1-6) 2012. 3. 25 주일예배
275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약4:13-17) 2012. 3. 18 주일예배
274 하나님의 부요함을 누리라 (약4:1-12) 2012. 3. 11 주일예배
» 말의 힘, 언어의 축복 (약3:1-12) 2012. 2. 26 주일예배
272 믿음의 역동성(약2:14-26) 2012. 2. 12 주일예배
271 자신을 속이지 말라 (약1:19-27) 2012. 1. 29 주일예배
270 유혹에서 승리하는 길(약1:13-18) 2012. 1. 22 주일예배
Board Pagination Prev 1 ...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 41 Next
/ 41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