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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5장에 보면 이스라엘의 이웃 나라였던 아람 나라의 장수 나아만이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의 도움을 나병을 치유받는 말씀이 나옵니다. 한 나라의 장수가 나병이 걸렸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었겠습니까? 왕의 친서를 들고 와서 자기 병을 고쳐달라고 해서 엘리사 선지자에게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나아만 장군을 나와서 영접도 하지 않은채 사환에게 시켜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번 씻으라. 그리하면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나아만이 화가 머리 끝까지 났습니다. 한 나라의 장수가 왕의 친서까지 들고 와서 치료를 받으려고 하는데, 그렇다면 선지자가 나와서 ‘오시느라고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냐?’고, ‘어디가 어떤지 좀 보자!’고 하면서 여기저기 보고, 좀 신령한 종교적 행위를 하면서 고칠까 싶었는데, 이것은 아예 나와보지도 않고, 시킨다는 것이 요단 강에서 몸을 일곱 번이나 씻으라고 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발대발하며 아람에는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이 있으니 몸을 씻으려면 그곳에 가서 씻겠다고 말하면서 그냥 떠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때 그를 따라온 부하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장군이시여! 만약 선지자가 장군에게 더 큰 일을 시킨들 하지 않았겠습니까? 요단 강에서 몸을 씻으라는데 그것이 무엇이 힘든 일이라고 이리 역정을 내시는 것입니까?”라고 말했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맞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선지자가 시킨 대로 요단 강에 들어가서 몸을 일곱 번 씻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몸의 나병이 치료되고, 그의 몸이 어린아이의 살과 같이 회복되어 깨끗해졌습니다.

여기서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가 나와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의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쳐주기를 기대했었습니다. 즉 그는 어떤 방법이나 기술에 의존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치유는 방법이나 기술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관계에 있었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의 말을 믿고 신뢰했을 때 그의 나병이 치유된 것입니다.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에 7번 몸을 씻음으로 병이 나았다고 해서 다른 나병 환자가 7번 동일하게 요단 강에서 몸을 씻는다고 낫는 것은 아닙니다. 즉 방법이 그를 치유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신뢰가 있었습니다. 엘리사 선지자에 대한 신뢰,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가 그의 몸을 깨끗하게 한 것입니다. 믿음이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믿음은 방법이나 기술이 아닙니다. 믿음은 신뢰입니다. 믿음은 인격 대 인격 간의 무한한 신뢰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이 성장하기를 원하면서 어떤 기술이나 방법을 터득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은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무한한 신뢰입니다. 이런 믿음은 세상에서는 여간해서 잘 경험할 수 없었던 일들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점점 세속화되면서 이런 믿음의 원리들이 점차 사라져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잘못은 믿음을 어떤 기술이나 방법론으로 이해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병이 걸리면 며칠 간 금식하면 낫는다고 한다든이 혹은 누구에게 가서 기도를 받으면 낫는다든지 하는 것을 옳지 않습니다. 나아만 장군의 치유는 방법에 있지 않고 믿음과 순종에 있었습니다. 믿음의 길은 참으로 놀라운 길입니다. 예수를 믿을수록, 성경을 배우고 공부할수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믿음의 길이 얼마나 놀라울까를 기대하게 됩니다.

그러면 믿음의 길이란 어떤 길입니까?



1. 믿음의 길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가는 길입니다.

8절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지역의 우르라는 도시에 살던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새로운 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천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12:1-2). 정작 갈 목적지를 알려주시지 않고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목적지를 알고 출발한 것이 아니라 부르신 자를 보고 출발했습니다. 믿음이란 갈 바, 즉 목적지를 알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목적지보다 그 목적지로 부르신 분을 보고 가는 것입니다.

나아만 장군이 치유 행위, 치유 방법을 보고 치유 받으려고 했지만, 그가 후에 깨달은 것은 엘리사 선지자와 그의 배후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이 무엇을 하라고 하시든, 그 요구에 순종하는 것이 나아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어려운 것도 아니고, 할 수 없는 것을 시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문제는 나아만이 방법에 더 매달려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런 그의 선입견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력을 맛볼 수 없도록 했습니다.


본문 말씀을 잘 보면서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사건을 살펴봅시다. 우리는 성경을 볼 때 아브라함이 어디로 인도받을 것인지 잘 압니다. 그가 갈 곳은 가나안이라는 땅이며 이미 가나안 7 족속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는 땅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유목민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지금 어디로 가는지 모른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갑니다. 그는 그가 갈 곳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이 지금 단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그곳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모르는 것을 알고, 그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며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여 순종하여 갔는가 하는 점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나님을 믿었으며 그의 종교적 행위는 어떤 것이었으며, 그는 평소 어떻게 하나님과 대화하며 지냈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다만 성경에 몇 가지 단편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어느 날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 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고 하면서 바로 이어서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은 하나님이셨고, 다른 두 사람은 천사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그 사람이 여호와이신 것을 알았을까요? 창세기 18장 후반부로 가면 이 세 사람들 중 두 사람이 소돔과 고모라 성으로 내려갑니다. 그곳에서 롯의 집에 들어갔는데, 사람들이 이 사람을 잡아 끌어내라고 소동을 쳤습니다. 그들은 주의 천사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가 갈 곳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곳 이름이 무엇인지, 그곳이 어떤 곳인지, 그곳에서는 무엇을 하며 살게 될 것인지 일체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안 것이 있습니다. 그는 그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분과 교제하는 법을 알았고,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으나 그분을 알아보는 영적인 눈을 가졌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분을 알고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습니까? 여호와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오셔서 말씀하실 때 아브라함은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장막 문에 달려나가 영접하고 몸을 따에 굽혀 그냥 자기 집을 지나가지 마시기를 요청하면서 음식을 준비하고, 대접하면서, 그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얼마나 깊이 알았는지 모릅니다. 히브리서 11장 19절을 보면, 자기 자식 이삭을 하나님께 바칠 때 그는 하나님께서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을 믿었다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마음을 꿰뚫어본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 것입니다.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안 것입니다. 결코 약속을 변개치 못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아브라함을 알았기 때문에 그분에게 자기 아들 이삭을 바칠 수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민수기 23장 19절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그가 갈 곳을 굳이 구체적으로 알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냥 따라가면 된 것입니다. 염려도 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든지, 어디든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대로 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은 갈 바(목적지)를 알지 못하지만, 다만 그분을 신뢰하고 믿기에 그분을 좇아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걱정하지 않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하지 않습니까? “보여주시옵소서.” 보여주지 않으면 답답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뭔가 우리 손에 쥐어주어야 시원해 합니다. 그것이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잡고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어야 그것이 믿음이 있는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갈 바를 알지 못하지만, 그분의 명령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것이 얼마나 평안하고 아름다운 삶이겠습니까? 현대인들이 스트레스와 온갖 정신적인 질병에 시달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장래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장래가 불투명할 때 우리는 불안해하고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장래가 환히 보일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여전히 장래는 불투명합니다.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장래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고 순종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하고 순종하여 갈 때 무한한 평안과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2. 믿음의 길은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길입니다.

10절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경영(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아브라함은 자신이 가야 할 곳이 어떤 곳인지, 이름이 무엇인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는 몰랐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알았고, 그분과 교제했습니다. 그리고 그 땅은 분명 그분이 직접 경영하시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지배하심이 있는 곳입니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기초를 놓으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한 성을 예비하시는 곳이었습니다.

여기에 ‘성’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본래 아브라함이 살던 고향 갈대아의 우르는 아주 번성한 도시였습니다. 이곳은 지금 우리가 아는대로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 강이 있는 문명지역이었습니다. 그곳은 문명이 발달했고, 성읍이 있어서 치안이 발달한 곳입니다. 왠만한 외부의 침입 정도는 넉넉히 막아낼 수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 사는 한 그들의 삶은 수백년을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아브라함이 오는 곳은 가나안 땅입니다. 가나안은 그런 곳이 아닙니다. 이곳은 이미 다른 사람들이 거하고 있었습니다. 9절 말씀대로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 그리고 손자 야곱은 그곳에서 대를 이어 장막에 거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와서 목축업을 하면서 방랑 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유목 생활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항상 불완전한 삶을 살았고, 한 곳에 정착생활을 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은 항상 떠돌이로서, 외국인과 나그네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고 살았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성은 궁극적으로 후에 나오는 영원한 본향을 말합니다. 하지만 일시적으로 그 본향은 바로 가나안입니다. 가나안은 그렇게 성읍이 있는 지역도 아니고, 성읍이 있다고 하더라도 아브라함이 그런 성읍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길을 간 것입니다. 그는 비록 황량한 허허벌판 가나안에 들어왔지만 하나님의 도성에 보호를 받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가나안에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도성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외적으로는 황량하고 유리방황하는 유목민의 삶을 살아가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곳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더 분명하고 놀라운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설적이지만, 사실입니다. 어려운 삶의 상황이 아니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고난의 삶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임재와 이끄심을 분명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가나안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있어서 그런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한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삶의 장소였습니다. 세상적으로는 항상 부족한 곳이었습니다. 자신이 태어난 곳도 아니었고, 자신을 보호해 주고 도와줄 천척이나 조상들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무엇인가 위로부터 능력과 보호하심이 아니면 살 수 없는 그런 곳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이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헤를 경험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생각이 고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어떠해야만 우리의 인생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재정적으로 여유롭지 못하면 마음의 평안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면에 높이 쌓아놓은 성벽이 없으면 우리의 생명이 안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꼭 이런 조건들이 갖춰져야만 행복하도’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은 삶의 다른 면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은헤를 경험할 수 없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성벽이 없는 허허벌판으로 인도하셨는데, 그곳에서 아브라함은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성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실제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우리도 잠시도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그런 존재들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참으로 간절히 필요한 상황에서 살아갑니다. 내일을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런 암담한 상황을 살아갑니다. 정말 내일을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런 곳이 바로 가나안 땅입니다. 가나안은 아브라함에게 마치 그런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나안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지으실 도성을 바라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바라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을 도성삼아, 하나님을 산성으로 믿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유산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최고의 의지는 하나님이셨고, 그에게 있어서 최고의 소망도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에 바로 그런 곳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렇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아갑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우리는 한 순간도 살 수 없습니다. 이런 은혜, 이런 소망을 오늘도 붙들어야 합니다.



3. 믿음의 길은 막혔던 문을 여는 것입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줄 앎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75세일 때에 그와 사라를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25년이 지나갔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세가 되었고, 사라는 90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나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아이를 주십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막힌 문을 다시 여시는 것입니다.

전혀 불가능한 상황까지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아기를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씨가 태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통해 하나님의 약속, 수천대에 이르는 언약을 시행하십니다. 그 자손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납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목적하신 일을 성취하는 길입니다. 여기에 상황도 문제가 되지 않고, 나이도 상관 없고, 재정적인 형편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막힌 문을 열고, 닫혔던 길을 열고 새로운 길을 열어가시는 주님의 역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광야에 물을 내시고, 사막에 강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로 마시게 할 것이라는 말씀 그대로 그렇게 당신의 백성들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믿음은 나이를 상관하지 않습니다. 나이를 세지 마십시오. 나이 드는 것 때문에 안타까워서 나이를 안 세는 것이 아니라 나이가 굳이 상관없기 때문에 세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상황을 말하지 않습니다. 상황은 주님의 역사를 결코 가로막지 못합니다. 주님은 믿는 자들을 위해 광야에 물을 내시고 사막에 강을 내시는 분이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홍해 바다에 길을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길을 걷는 자들에게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다 보면 이미 때는 늦어버리고, 모든 소망들이 사라져 버리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그런 길에서도 믿음의 길을 걷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을 복주시고, 은혜로 함께 하십니다. 믿음의 길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가는 길이었고, 광야의 황량한 들판에 내던져진 인생 같지만,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길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길은 결국은 막혔던 문을 열고 들어갑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예비하신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길은 첫 번째와 두 번째 믿음의 길을 따라 갈 때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즉 갈 바를 알지 못하지만, 순종과 위탁을 가지고 그분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를 바라보고 가는 성도의 삶에 나타날 하나님의 위대한 사건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통해 이런 일을 오늘도 여전히 하십니다. 우리는 그 길을 따라가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그 길은 우리가 보통 가는 길이 아닙니다. 그 길은 무한한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신뢰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듯이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할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타락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점점 멀리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갑니다. 이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바로 그 길을 되돌아 가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어머니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듯이 우리도 동일하게 하나님께 무한한 신뢰를 보내며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의 삶이며 이렇게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위대한 일을 행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그런 신뢰를 드렸을 때 우리에게 오는 평안과 은혜, 능력과 탁월함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그러므로 하나님과 동행하십시오. 믿음의 길은 위대한 길입니다. 믿음의 길은 우리 혼자 걷는 길이 아닙니다. 믿음의 길은 결코 외로운 길도 아니며 믿음의 길은 결코 손해보는 길도 아닙니다. 다만 믿음의 길은 세상의 길과는 다릅니다. 그 길은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의 삶 가운데 오셔서 개입하시고 함께 하시는 길입니다. 고난과 어려움이 있는 것 같지만 결국은 승리의 길을 약속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죽은 자와 방불한 자, 죽은 자와 같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 새롭게 생명의 싹이 트고, 이삭이라는 소중한 생명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 민족이 탄생했다는 생각을 해 보십시오. 이것이 얼마나 위대한 사건이겠습니까? 이런 은혜, 이런 약속을 기대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입니까? 불확실한 시대 속에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가는 길을 걷고 있지만, 그 안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은혜의 길을 체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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