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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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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다음 주일은 그동안 하던 에베소서 설교를 잠시 중단하고 교회의 목적과 우리교회의 비전에 대해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교회의 목적이란 무엇입니까? 교회의 존재 목적은 교회를 세우신 분이 세우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직접 목적을 가지고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목적 없이 교회를 세우지는 않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목적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의 비전은 우리가 세우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교회를 세우셨는데, 그 목적이 합당한 교회로 나가기 위해 우리교회는 무엇을 어떤 생각, 무슨 그림을 보면서 나가야 하는가 하는 것이 비전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성경에서 교회의 목적을 찾습니다.

오늘은 온 세상에 세워진 모든 교회에 주신 목적을 성경 안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교회의 목적은 보통 다음 다섯 가지로 말합니다. 그것은 예배, 교제, 훈련, 사역, 전도입니다. 오늘은 그 중에 예배와 훈련과 전도에 대해서만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교회의 목적은 예배입니다.

어제 전교인 야유회를 했습니다. 오후 1시부터 비가 온다고 예고되어 있었지만, 강행했습니다. 점심 시간을 줄이고 서둘러 프로그램을 진행해서, 오후 4시에 끝나기로 예정된 것을 3시 이전에 마쳤습니다. 그리고 마무리하고 돌아오려고 하는데, 3시 30분부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웠는지 모릅니다.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실감하게 하는 순간이었고, 많은 성도들이 정말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고 고백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에스더서 4장을 보면 에스더가 자기 민족을 위해 아하수에로 왕 앞에 나아가는데, 사실 절대 부르기 전에 먼저 갈 수 없도록 되어 있는 페르시아의 법을 어기고 나갔습니다. 그냥 가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에스더의 방문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아하수에로 왕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장면입니다.

우리교회의 교회당 건축의 상황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가 계획하지 않은 여러 가지 일들을 통해 교회당 건축이 오늘까지 온 것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런 구체적인 역사가 없었다면 우리는 오늘까지 이렇게 놀랍게 건축을 진행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든 일들을 전부 다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우리는 너무 놀라운 사건들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건을 만날 때마다 기쁨과 놀라움뿐만 아니라, 경외감과 두려움을 갖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부정할 수 없는 마음의 확신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고백으로 주님 앞에 나아와 예배합니다. 바로 그런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오는 것, 바로 그것이 예배자의 마음입니다. 예배는 그렇게 드리는 것입니다.

교회의 첫 번째 목적은 바로 예배입니다. 교회는 예배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고, 그분의 구원의 역사를 체험하면서, 부정할 수 없는 그분의 사랑과 섭리, 인도하심 앞에서 엎드려 굴복하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그분의 인도를 받아 살겠다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예배자의 마음입니다.

오늘 본문 46절에는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고 말씀합니다. 교회는 예배를 위해 세워진 것입니다. 주의 자녀는 예배에 힘써야 합니다. 주님의 임재와 간섭하심을 통해 그분의 존재를 경험하고, 또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함께 하실 것을 믿고 나아가는 것이 예배자의 자세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주님 앞에 예배하는 성도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두 번째 교회의 목적은 훈련입니다.

교회는 훈련을 위해 존재합니다. 교회는 믿음의 훈련소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훈련하고, 증진하며, 세우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교회라는 훈련소를 통해 철저히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훈련 받지 않은 성도는 결코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를 누릴 수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철저히 훈련을 통해 세워졌습니다. 그 훈련은 어떤 면에서 아주 혹독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생사를 넘나드는 위기와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져 갔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25년의 훈련이 필요했고, 모세에게는 40년의 훈련이 있었습니다. 다윗에게는 십 수년이 필요했고, 요셉에게는 13년의 훈련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3년의 제자훈련이 있었고, 바울은 14년의 시간을 그의 고향 다소에서 묵묵히 훈련에 전념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인생을 더 쉽게 가기 위해 우리 자신이 선택한 길이 아닙니다. 믿음은 혹독하게 하나님으로부터 당신의 사람이 되기 위해 혹독하게 훈련을 받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철저히 홀로 서도록 인도하십니다. 모든 상황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이끄십니다. 그 훈련은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자신의 삶의 문제, 죽음의 문제, 삶의 목적과 목표를 전체적으로 점검하게 합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고, 택하셨고, 함께 하시는가 하는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 자리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를 다시 세우십니다.

신앙의 성장은 결코 지적인 이해만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지적인 면에서의 신앙의 성장은 그를 망하게 합니다. 아기 예수의 출생을 알고 경배하러 온 동방박사들로 인해 예루살렘에 그리스도(메시야)가 태어났다고 하는 소문이 파다하게 났습니다. 당시 유대 지역을 다스리던 대헤롯 왕이 자기 말고 또 다른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소문)에 바짝 긴장을 하고 유대의 성경학자들, 즉 서기관들을 불러 놓고 그리스도가 어디서 난다고 예언되어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 때 서기관들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고 예언되어 있음을 알려주었습니다(미5;2).

이 소리를 들은 헤롯은 아기 예수를 잡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베들레헴과 그 주변 도시에서 태어난지 두 살 이내의 모든 아이들을 다 죽였습니다. 그만큼 헤롯은 이 사실로 인해 두려워했고, 경계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서기관들은 그리스도의 탄생 예언에 대해, 그리고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려고 온 동방박사들의 방문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식은 결코 우리를 움직이게 하지 못합니다. 지식은 우리를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지식은 반드시 훈련과 함께 와야 합니다. 훈련은 반복된 과정을 통해 우리의 몸에 익히는 것입니다. 새벽 6시가 되면 자동으로 눈이 떠져야 하고, 혹시 늦은 밤에 잠에 들었더라도 그 시간은 기도하는 시간임을 깨닫고 어떤 상태에서라도 일어나서 기도의 무릎을 꿇을 수 있도록 자신을 단련하고 세우는 것이 훈련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훈련에 관심이 없습니다. 훈련을 자존심 상하는 일로 생각합니다. 무관심합니다. 믿기만 하면 돼지, 믿고 천국만 가면 돼지 하고 생각합니다. 오늘부터 제자훈련이 시작됩니다. 제자훈련에 대해 무관심한 것처럼 느낄 때 사실 마음이 너무 아픈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특별한 사정 때문에 그런 것을 압니다. 그러나 혹 그것이 우리 마음 안에 있는 훈련에 대한 무관심 때문이라면 그것은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혹시 훈련에 대한 무관심이나, 난 그런 것쯤은 필요없다고 여기는 마음 때문이라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훈련을 방해하는 많은 것들이 우리의 훈련을 방해합니다. 신앙성장에 대한 조급증이 우리의 훈련을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배우려는 마음을 잃어버리고 가르치고 싶어하는 마음이 훈련의 마음을 잃어버리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 속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이 우리의 눈에 보기에는 필요 이상의 훈련의 기간을 보낸 것이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오랜 세월의 훈련이 그들의 인생을 축복으로 이끌었습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교회의 목적인 훈련의 이유를 알고, 우리 자신을 주님의 강한 군사로 세워지도록 주님께 우리 자신을 훈련으로 맡길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는 훈련소입니다. 말씀의 훈련, 신앙의 훈련, 삶의 훈련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 훈련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정금 같은 하나님의 군사로 세워지기를 축원합니다.


세 번째 교회의 목적은 전도(영혼구원)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교회의 최종적인 목적입니다. 교회가 함께 예배하고, 교제하고, 훈련을 받고, 섬김의 삶을 살아갈 때 그 결과로 나타나는 마지막 열매는 생명을 구하는 전도입니다. 생명을 생명을 낳게 되어 있습니다. 그가 살아 있다는 가장 큰 증거는 바로 생명을 낳는데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적인 면에서 우리가 살아 있다는 가장 큰 증거는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의 네 번째 존재의 목적인 전도를 생각할 때 기억할 것은 전도는 우리 믿음의 열매이자 주님께서 주신 사명(명령)이라는 점입니다. 전도, 즉 생명을 구원하는 일,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연스러운 열매입니다. 과실나무가 건강하게 자라면 열매를 맺게 됩니다. 열매를 맺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나무는 건강해 보이는데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무에 뭔가 문제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우리 믿음을 측정하는 기준이 됩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을 때, 그리고 그 믿음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릴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게 됩니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47절입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백성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을 섬기고, 그들과 교제하고, 그들을 사랑하고, 자기 삶을 나눌 때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초대교회에서 전도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에서 이런 힘은 거의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교회를 보면서 오늘의 교회가 어디쯤 와 있는지를 냉정하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교회로 오는 것을 극히 부담스러워합니다. 왜 언제부터 교회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오늘 우리교회는 과연 이와 같은 현대 교회의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까?

더 안타까운 것은 전도는 우리 믿음의 열매라는 사실입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맺어져야 하는 열매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우리가 지금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있지 않음을 의미하고, 그 말은 우리의 삶이 믿음과는 별개로 살아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을 주님 앞에 인도하지 못하는데 심각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온전한 믿음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데 심각성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전도는 열매이면서 또한 사명입니다. 전도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변화된 삶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주님 앞에 오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은혜가 너무도 크기에 내 이웃, 내 형제, 내 가족을 주님께로 인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정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이 바로 전도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전도는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정말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믿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오늘 우리는 교회의 존재 목적 다섯 가지 중 세 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예배와 훈련과 전도입니다. 이 세 가지는 교회가 존재하는 매우 중요한 목적입니다. 이 세 가지가 우리교회 안에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는 우리가 좋아하는대로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이러한 목적을 향해 지속적으로 가야 합니다. 이 목적을 잃어버렸을 때 교회는 더 이상 존재의 의미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세월이 갈 수록 교회는 자칫 이 목적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35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교회는 이점에 있어서 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교회는 교회의 존재 목적을 바르게 기억하고, 지켜 나가야 합니다. 우리를 즐겁게 하는 교회가 아니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는 교회로서의 바른 사명을 감당하게 되고, 또한 주께서 교회 위에 놀라운 은혜와 복을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목적에 합당한 교회가 되고, 주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는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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