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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는 서신서들 중에가 가장 사랑받는 서신서입니다. 학자들은 에베소서를 “바울 서신의 백미’, ‘사람이 쓴 가장 신적인 저술,’ ‘서신서의 여왕’ 등으로 찬사했습니다. 그만큼 에베소서를 사랑했고 은혜를 받았음을 말해줍니다. 에베소서의 주제는 1장 9-10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0).” 모든 만물을 하나로 모은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만물과 정치, 경제, 사회, 인간의 운명, 가치, 존재의 목적 등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이해한다는 놀라운 통찰력을 줍니다.

에베소서 2장 11-22절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다는 점을 말씀함으로 위의 주제를 뒷받침하고 있고, 에베소서 4장 3-6절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이 한 분이시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5장과 6장에서는 아내와 남편의 하나 됨, 자녀와 부모의 하나 됨, 종과 상전의 하나 됨을 통해 에베소서의 전체 주제를 지탱합니다. 이런 맥락을 간단히 이해하고 오늘 본문을 함께 보려고 합니다.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이 말씀은 바울이 자신을 사도로 소개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종으로 소개하기도 하고, 사도와 종으로 함께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보통 사도로 소개하는 경우는 자신의 사도성 강조가 필요한 경우였습니다. 예를 들어 고린도교회는 바울의 사도성에 대해 시비를 걸었습니다. “바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에베소교회의 경우는 바울과 그렇게 불편한 관계를 갖지는 않았습니다. 에베소서는 회람서신입니다. 즉 에베소교회만을 위해 편지를 쓴 것이 아니라, 여러 교회가 서로 돌아보며 읽도록 쓴 편지입니다. 그래서 부득이 바울은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드러내야만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에서 바울이 자신을 사도로 소개할 수밖에 업었던 이유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에베소서가 기록될 때는 주후 61-62년이었습니다. 이 때는 대부분의 사도들이 살아 있었습니다. 반면에 기록된 신약 성경은 별로 없었고, 있었더라도 초대교회들 가운데서 성경의 권위를 가지고 읽혀지기 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당시는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씀하는 기록된 성경이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또 한편으로는 당시는 유랑 전도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한 교회를 잘 세워놓아도 뒤를 이어 오는 다른 전도자가 이전에 받은 말씀을 무시하고 세속적인 사조를 따르는 말씀을 전하면 교회가 한 순간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부득이 편지를 쓰면서 자신의 사도성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자신의 사도 됨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말씀이 갈라디아서 1장 1절 말씀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그의 사도성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는 매우 중요한 두 가지 표현입니다.

1. 사도란 사람들에게서 난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사도란 사람이 노력하거나 자신의 의지와 결정으로 사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신학교를 다니고 목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신학생들은 도전을 많이 받습니다. 대부분의 신학생들이 한 번씩은 심각한 고민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정말로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 동기들 중에서도 그런 고민 끝에 다른 길을 간 이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역은 하나님의 부름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도는, 그리고 목회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또 사도가 선포하는 말씀은 세상의 사상과는 다름을 분명하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당시 세계에서는 가장 유행하고 지식인들에게 매력적인 사상 중에 하나가 바로 영지주의라는 것이었습니다. 영지주의는 성경을 해석하는데 매우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오늘날 성경을 해석하는데 영향을 많이 미치는 것은 아마도 심리학과 성공주의적 처세술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설교들이 자기 치유와 성공을 향한 방법론으로써 성경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는 그런 일을 위해 부름받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단순히 그런 것을 선포하는 책이 아닙니다. 마치 심장 마사지를 하듯이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선포하고 위로하는 것은 성경이 말씀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우리에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그 안에서 구원을 얻어 누리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음을 말합니다. 여기에 인간의 죄를 고발하는 말씀이 있고, 심판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합니다. 믿음으로 인한 변화가 일어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놀라운 선언이 말씀 안에 일어납니다. 사도는 바로 이런 말씀을 전하는 자이며, 그 말씀의 선포만이 진정한 사도의 자리입니다. 이런 말씀을 선포하는 목사, 그런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2. 사도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사도란 교회의 지도자들이 인정해서 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바울은 자신의 사도성을 인정받기 위해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고, 또한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사도가 되기 위해 다른 사도들에 의해 임명을 받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도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적으로 가르침을 받은 사람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저는 1996년 5월 6일 서울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저는 저에게 안수를 준 목사님이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안수를 받아 하나님께서 저를 목사로 세우신 것을 분명히 믿고 확신합니다. 저는 2004년 8월에 우리교회에 부임했습니다. 제가 부임하기 전에 우리교회 제직회에서 청빙할 목사를 결정하는 회의가 있었습니다. 그런 교우들의 결정과정을 통해 저는 우리교회의 담임목사로 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저를 우리교회의 담임목사로 보내신 분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믿습니다. 만약 이 확인이 없다면 저는 우리교회에서 사역을 지속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목사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다니는 학교와 직장, 사업 등은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길입니다. 만약 우리가 샬롯츠빌에 살면서도 ‘내가 잘못 판단해서 이곳에 와서 산다’고 생각한다면 불행한 삶이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내가 다니는 학교, 내가 출석하는 교회, 내가 함께 사는 나의 배우자는 모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고백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고백을 가질 때 우리는 다음 두 가지 큰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A. 목적이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위와 같은 고백을 가지고 살 때 우리는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삶의 목적이 있으면 세상의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러한 목적은 우리의 삶에 굉장한 역동성을 불어 넣어줍니다. 바로 이 목적이 있는 삶을 사는 것은 바울과 같은 고백을 하는 사람에게 주는 은헤입니다.

B.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성도는 반드시 행복해야 합니다. 성도에게 주어지는 삶의 기쁨은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을 바르게 붙들고 살아가는 성도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내 삶의 자리가 사람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고, 다른 사람의 도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하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삶의 행복은 성도의 의무이면서 권리입니다. 이런 은혜가 성도들 가운데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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