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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택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실 계획을 세우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유대인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처음 복음의 시작은 유대인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유대인들은 점점 더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는 바울의 심정이 타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전 주에도 말씀드렸듯이 바울은 자기 민족을 위해 큰 근심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유대인의 구원을 미루시는 이유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방인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처음부터 이방인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그를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에게 하나님도 저주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만 복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복이 전달되도록 계획하셨습니다.

12절의 말씀을 먼저 봅니다.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본문에서 저희의 넘어짐과 저희의 실패는 유대인의 실패를 의미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며 자신의 구세주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들을 잡아 옥에 가두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박해를 하고, 결국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당시 한참 복음이 전파되던 때에 예루살렘에 대박해가 일어났습니다. 사실 그 일에 앞장섰던 사람 중에 하나가 바로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일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긴 했지만,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께로 돌아오지 않고, 오히려 핍박하는 일에 앞장섰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예루살렘에 수많은 믿는 유대인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렇게 박해를 받으면서 온 세계로 퍼져간 성도들이 가는 곳마다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전했습니다. 처음에는 이방인은 예수를 믿을 수 없고, 믿을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유대인들은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는데, 오히려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주님 앞으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에서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고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었다는 말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핍박합니다. 이러한 일로 믿는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고, 그 결과 그들이 온 세상에 퍼지면서 복음을 전하게 되는 역사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도 동일한 일이 나타났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 때 쯤 소아시아와 유럽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믿지 않는 것입니다.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핍박을 합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파할 때 그를 핍박했던 대부분의 경우는 모두 유대인들로 인한 박해였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3장 46절에 보면 그는 이제부터는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지 않고 이방인에게로 가서 복음을 전하겠다고 선포합니다.

이로 인해 복음은 소아시아와 유럽, 로마로 그리고 서바나까지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만약 예루살렘에 이런 박해가 없었다면 복음은 예루살렘을 넘어서지 못했을 것입니다. 복음의 본질이 본래 우주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복음이란 본래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는 차별이 없다고 로마서 3장 22절에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하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이방인에게로 가서 복음을 전하겠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이방인이 듣고 주님 앞으로 나오는 것을 보면서 매우 놀랐습니다. 그런 일들을 보고 난 후에서야 그들은 이방인들도 예수를 믿도록 하나님께서 섭리하셨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미친 박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넘어짐으로 인해, 즉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고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함으로 인해 결국 복음은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입니다. 박해가 없었다면 그들은 예루살렘에만 머물렀을 것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유대인들이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은 이제부터는 이방인에게로 가서 복음을 전하겠다고 선포하게 된 것입니다. 박해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방인을 향해 복음의 문을 여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당신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박해와 환란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그것은 정말 피하고 싶은 일이지만, 때로는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나아가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고난은 당장 우리에게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더 선하신 뜻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더 놀라운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결국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성경에 보면 위대한 사람들은 모두 고난의 사람이었습니다. 대부분의 하나님의 사람들은 고향을 떠난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났습니다. 야곱이 타향에서 20년을 보냈습니다.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다가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다니엘이 바벨론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에스더가 바사 나라 왕비가 되었습니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외국 땅에서 고난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지금 CAM 이라는 선교회로부터 건물을 렌트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하나님의 은혜로 CAM을 통해 교회를 건축할 수 있도록 되었습니다. 대지는 바로 Volvo Dealer 뒤편에 있습니다. 4.8에이커나 되는 넓은 땅에 교회당을 짓도록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금 site plan을 승인받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새 교회를 지어 나가게 되면 CAM은 이 건물을 헐고 새로운 선교 센터 건물을 지어서 이곳으로 들어올 예정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나가야 CAM은 들어올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CAM이 들어오려면 우리가 그 전에 나가줘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CAM이 2007년 6월경에 이곳에 새 건물을 지을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습니다. 적어도 내년 6월 이전에 교회건축을 완공해서 입당을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갑자기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한편으로는 조금 복잡한 상황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우리교회를 2007년 6월 이전까지 지어 입당할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는 말씀이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흔히 ‘위기는 위험한 기회’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때로는 긴장과 위기로, 때로는 고난과 아픔의 자리로 인도하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보면 그것 때문에 더 큰 유익을 얻는 경우가 허다히 많이 있습니다. 교회 건축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위기의식과 긴장을 통해 더욱 하나님의 뜻을 아르답게 이루어가도록 하십니다. 그 안에는 놀라운 하나님이 섭리와 약속과 계획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때때로 어려운 일에 봉착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때라도 우리는 이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게 하고,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합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초대교회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동족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박해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저희의 넘어짐으로 오히려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었다고 선포합니다. 이 말을 할 때도 여전히 환난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미 그것이 복이 되는 줄 알았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자리가 고난과 아픔의 자리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삶을 더욱 복되게 하는 자리임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렇게 외치면서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주님께서 정말로 놀라운 복으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이 놀라운 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유대인의 실패는 복음의 거절을 의미합니다. 이로 인해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마음 안에는 여전히 유대인의 구원의 문제에 대한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이 일에 대해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곧 유대인을 시기케 해서 다시 복음으로 돌아오게 한다고 역설합니다. 그 일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믿고 어떻게 사는지를 보여줌으로써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로 하여금 보고 시기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부러워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뭔가 끌리는 데가 있어야 합니다. 매력적이어야 합니다. 에너지가 넘치고, 기쁨이 넘치고, 감사가 생활화되어 있고, 삶의 활력이 있어야 합니다. 매일 장례식에 다녀온 분위기여서는 안 됩니다. 예루살렘에 아직까지는 여전히 남아있던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큰 흉년으로 고난을 겪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상황을 알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가는 곳마다 성도들에게 헌금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그 헌금을 모아서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갑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로 하여금 주변에 있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돕도록 합니다. 그렇게 해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이 일을 위해 생명을 걸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핍박이 너무도 컸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면 틀림없이 큰 어려움을 당할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직감적으로 그런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밀레도라는 도시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모아놓고 그들에게 마지막 설교를 하면서 땅에서는 너희가 더 이상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에베소 성도들이 크게 울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조금 더 가다가 가이사랴에 이르렀습니다. 거기서 아가보라는 선지자를 만났습니다. 그 선지자가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결박을 당할 것이라고 예언을 했습니다. 그 예언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바울로 하여금 예루살렘에 가는 것을 만류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오히려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그리고 정말 그의 고백대로 그는 예루살렘에 가서 체포되고, 꿈에도 그리던 로마를 죄수의 신분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로마 감옥 안에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모습을 보면서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비록 핍박 받는 사람이었고, 죄수의 신분이기도 했지만, 그는 감옥 안에서조차도 복음을 전하고, 그의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영접하는 역사가 수도 없이 일어났습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능력 있게 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사명과 기쁨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분명한 사명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자신의 생애를 불살랐습니다. 또한 그는 감옥 안에서조차도 찬송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환란과 어려움도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기쁨을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그러기를 원합니다. 사도 바울이 가지고 있는 사명을 우리도 가지고 있습니까? 자신의 생애를 불태울만한 삶의 강한 목적을 가지고 습니까? 한명이라도 구원할 수 있다면 목숨을 걸고 달려가는 그런 열정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자신이 결박될 것을 알면서도 그들을 향해 달려가는 그 강한 사명감이 우리에게도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 사명감이 우리의 인생을 행복하게 합니다.

성도의 기쁨이 교회가 세상에 보여주어야 할 모습입니다. 성도는 환난 중에도 기뻐합니다. 기쁨은 외적 환경과 조건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감정을 다스릴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결단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며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때때로 감당할 수 없는 환난 중에도 마음 속 같은 곳에서 잔잔히 찾아오는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어두운 마음이 내 안에 들어오면 찬송해 보십시오. 그러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쁨이 다시 물밀듯 밀려오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같이 찬송해 봅시다(495장).
       1.         내영혼이 은총입어 중한죄짐 벗고보니
        슬픔많은 이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후렴)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모든죄 사함받고
        주예수와 동행하니 그어디나 하늘나라
      2.        주의얼굴 뵙기전에 멀리뵈던 하늘나라
        내맘속에 이뤄지니 날로날로 가깝도다
      3.        높은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예수 모신곳이 그어디나 하늘나라

교회는 세상 앞에 뭔가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회 다니며 예수를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동일하다면 누가 교회를 나와 예수를 믿겠습니까? 교회 나와도 늘 끼리끼리만 지내고, 맘 맞는 사람끼리만 말하고, 맘에 안 들며 눈도 안마주친다면 누가 뭐라고 교회를 나오겠습니까?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그것이 바로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매력입니다.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자신의 적을 친구로 만들 수 있다면 그보다 더 강한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우리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위의 은혜와 능력을 우리 삶 속에서 누리기 위해서는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두려워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그 이유를 참 감람나무와 돌 감람나무의 접붙임으로 비유합니다. 우리는 돌 감람나무였습니다. 야생감람나무라는 뜻입니다. 주인도 없는 감람나무였기 때문에 제멋대로 자라게 되었고, 그래서 열매도 거의 맺지 못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참 감람나무의 주인이 돌 감람나무를 보면서 안타깝게 여기고 그 가지를 꺾어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했습니다. 그래서 돌 감람나무의 가지로 하여금 참 감람나무의 열매를 맺게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 먼저 기억할 것은 바울이 설명하는 접붙임에 대한 것이 현대의 농업기술에 배치된다는 것입니다. 본래 이런 경우는 돌 감람나무에 참 감람나무의 가지를 접붙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돌 감람나무에서 참 감람나무의 열매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지금 자연의 법칙을 반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원예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복음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렇게 비유하는 것입니다. 참 감람나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돌 감람나무는 우리 이방인들입니다. 돌 감람나무인 우리는 참 감람나무이신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참 생명력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과 상관없이 아무리 애를 써 봐도 우리 스스로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삶의 목적과 기쁨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우리에게 선택할 힘이 없다면 그 선택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삶의 목적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힘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참 감람나무이신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지지 않으면 우리는 옛 습성에 매여 계속 살게 됩니다. 화와 정욕과 욕심과 악한 생각과 탐욕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게 됩니다. 작은 일에도 짜증과 악한 생각이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의 노력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아닌 다른 이로부터 이런 것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 힘을 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으로부터 삶의 능력과 생명력을 공급받는 방법은 바로 기도와 말씀입니다. 주님 앞에 지속적이고 일정한 기도의 삶과 주님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듣고 읽고 묵상함으로 우리는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그렇게 되면 정말 주님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저는 기도하는 일과 말씀 묵상하는 일이 목사와 몇 사람에게만 주어진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신앙인의 의무가 아니라 특권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은지 얼마가 되었든 상관없습니다. 지난 해 이맘 때 우리교회는 주일을 제외한 21일간 다니엘 기도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때 한 성도님이 전에는 교회도 거의 다녀보지 않으신 분이셨는데, 자기 딸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딸은 이제 겨우 유치원을 갈 나이였습니다. 미국에 와서 학교를 다녔는데, 스트레스가 심했던 모양입니다. 아이의 머리가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약 30개 이상의 구멍이 났습니다. 전문의 선생님의 말씀에 의하면 10개 정도는 회복이 되지만, 일반적으로 그 이상이 되면 완전회복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그는 조용히 기도했습니다. 끝까지 기도했습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다니엘 기도가 끝날 쯤 무렵 그 아이의 머리가 거의 다 다시 나기 시작했습니다. 갈 때는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놀라워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공급받는 엄청난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합니다. 기도와 말씀은 돌 감람나무 가지로 하여금 참 감람나무 열매를 맺게 하는 영광을 누리게 합니다. 그것이 꼭 기적적인 질병의 치유가 아니라도 상관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 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삶의 문제들이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에는 정말 능력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삶을 우리가 이루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삶의 힘을 공급받을 때 우리에게 참 감람나무로부터의 힘을 공급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축복이 성도님들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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