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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나라의 드라마가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런 드라마에서 작가들이 많이 사용하는 장치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기억상실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날 교통사고나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을 받으면서 주인공은 기억을 상실하게 됩니다. 지난 날 사랑하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오는 안타까움을 소재로 해서 드라마를 풀어갑니다. ‘봄날’, ‘열여덟 스물아홉’, ‘겨울연가’,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천국의 계단’, 이런 드라마들이 바로 기억상실을 주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또한 영화에서도 ‘내 머리 속의 지우개’, ‘노트북’, ‘하나와 앨리스’, ‘포가튼’과 같은 영화들이 기억상실을 활용한 영화들입니다.

겨울연가라는 드라마는 이런 이야기입니다. 준상(배용준)이가 유진(최지우)를 사랑합니다. 서로는 정말 사랑하는 사이였는데, 그만 준상이가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유진이는 준상이를 잃고 슬픔을 어느 정도 이기면서 상혁이라는 남자친구를 사귀게 되고, 드디어 결혼까지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때 준상이와 꼭 닮은 민형이라는 청년을 만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유진이는 민형이와 다시 가까워집니다. 사실 준상이는 교통사고로 죽은 것이 아니고, 준상이의 어머니가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데려갔다가 새로운 삶을 살도록 돕기 위해 이름을 고쳤던 것입니다. 여기서 민형이로 다시 나타나는 준상이는 기억상실로 전에 사귀던 유진이를 기억하지 못하고, 유진이는 10년이 지난 후 준상이를 만나면서 전에 만났던 준상이를 추억하면서 끌리는 마음으로 만나기는 하지만, 그가 바로 전에 그렇게 사랑하던 준상인줄은 모르고 사귀게 된 것입니다.

듣기만 해도 얼마나 재미있었을 것 같습니다. 사실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일본과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매우 큰 인기를 끌던 드라마였습니다. 본인들은 서로의 관계를 모르지만 작가는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본래 서로 사랑하던 사이였고, 또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여전히 그런 사랑으로 만나야만 하는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본인들은 자신들의 인생이 어떻게 여기까지 온 것을 모르기 때문에 서로 아픈 적도 있고, 상처를 준적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떨어지지 못하고 관계를 지속하다가 결국 마지막에 가서 서로를 알게 되지만, 결혼을 하게 되지는 못한 모양입니다.

‘기억상실’이라는 것이 드라마에서는 나름대로 흥미를 갖게 하지만, 실제의 삶에서 기억상실증이 걸리면 상당히 불행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아내가 갑자기 기억상실에 걸려서 남편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이것은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모든 것을 다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래서 본인이 기억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면 문제는 좀 간단해 질 것입니다. 하지만 남편만 기억하지 못하고, 자식들과 다른 사람들을 다 기억한다면 아마도 남편이 집을 나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런 일을 겪은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자기를 닮은 모양으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얼마나 사랑스럽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람들을 정말 엄청나게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본래부터 하나님은 없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결국 사람들 가운데 계실 자리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말씀하셔도 인간들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점점 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갔습니다.

창세기(6-8장)에 보면 노아의 홍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홍수를 준비하기 위해 방주를 지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120년 동안 방주를 짓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방주 짓는 일이 마쳐지자, 40일 동안 비를 내리십니다. 온 세상이 다 물로 덮였습니다. 방주에 탄 8명의 노아 가족들과 방주에 들어온 동물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노아의 홍수에 죽었습니다.

성경에서는 노아 홍수 이전의 사람들은 최소 300년에서 많게는 900년 이상도 살았습니다. 그 중에 가장 오래 산 사람은 므두셀라라는 사람인데, 므두셀라는 라멕을 낳았고, 라멕은 노아를 낳았습니다. 그러니 므두셀라는 노아의 할아버지입니다. 그리고 노아가 600세 되던 해, 즉 홍수가 났던 그 해에 므두셀라가 죽었습니다. 므두셀라가 노아의 홍수로 죽었는지, 아니면 자연사했는지는 모르지만, 성경은 그 안에서 매우 정확한 기록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고대 근동지방(이스라엘 주변 지역)에도 홍수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지금까지 보존되어오는 비문들을 해독해보면 노아의 홍수 이야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들 중에는 아주 오랜 옛날에 홍수가 있었고, 그 때는 사람들이 10만년 이상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고대근동지방뿐만 아니라 문명이 있었던 곳은 대부분 이와 비슷한 홍수에 대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런 홍수 이야기가 여러 곳에서 전해지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하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홍수 이야기는 어디나 있는 그저 고대에 보편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매우 분명한 것을 하나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오랜 옛날 홍수라는 것이 분명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 있었던 홍수는 우리가 보통 겪는 그런 홍수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남아있지 않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의 깊은 기억 속에서 그 홍수를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홍수가 어떤 것이었는데, 얼마나 큰 규모였는지, 그것이 왜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 홍수를 통해 막연한 신의 진노를 생각했었고, 그 홍수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홍수전에 살던 사람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오래 살았다는 것도 막연하나마 기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막연한 기억뿐이라는 것입니다. 엄청난 홍수사건의 기억은 있지만, 그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정작 창조주 하나님, 홍수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태초에 일어난 일을 향해 원초적 기억을 찾아갑니다. 뭔가 있었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왜 이 땅에 존재하는지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철학으로 인간의 존재의 목적을 끊임없이 탐구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존재의 목적은 원래부터 없었던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잊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의학을 통해 끊임없이 건강을 추구합니다. 질병을 극복해보려고 합니다. 그 이면에는 죽음을 넘어서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굳이 불로초를 구하러 온 세상을 찾아다니던 진시황을 언급하지 않는다고 해도 사람들의 마음에는 누구나 영생을 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성경은 전도서 3장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본래 하나님은 인간을 영원히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래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인간은 끊임없이 영원을 추구합니다. 유전자 공학이 더 발달하면 인간은 영생할 것을 기대합니다.

또한 사람들은 법을 만들어 이 세상을 통치합니다. 법을 통해 보여주는 인간의 깊은 심연의 마음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의로움입니다. 인간은 의로워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법은 사람들 사이에 공평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다른 사람에게 의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자신의 의에 대한 강한 요구를 느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증거들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에 의해 피조된 흔적만 경험할 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한 답을 간단하게 제시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영생하도록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며 살도록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건강하게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의롭게 살도록 하셨습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를 느끼면서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창조주이심을 거부하려고 합니다. 설령 하나님을 거부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습은 여전히 우리 안에 계속 되고 있습니다. 영생을 구하고, 의롭기를 원하고, 사랑을 구하는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드라마 안에서 유진이는 준상이의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유진이의 마음 안에 준상이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준상이는 죽지는 않았지만, 교통사고로 전의 기억을 잃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유진이가 준상이를 만났을 때 그들은 서로 무언가 서로를 향한 사랑의 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고민하고 방황합니다. 자기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냥 감정이 이끄는 대로 갈 뿐입니다. 그런 그들의 마음이 그들의 의지를 넘어서 가고, 결혼을 약속했던 또 다른 남자(상혁)이와 헤어지게 만듭니다. 알지 못함으로 생기는 아픔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압니다.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작가의 입장에서 문제는 간단하게 풀릴 수 있습니다. 이 드라마가 실제의 사건이라면 그들은 이 문제를 작가에게 가지고 가면 해결 될 것입니다.

인간의 삶의 문제도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사실 문제의 근원을 알게 되면, 그 순간 모든 답은 풀리게 되어 있습니다. 답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답은 바로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그 분은 우리의 인생의 해답을 아십니다. 그 분은 우리 인생의 해답이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사람들은 이 말씀을 기독교의 독선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독선이 아니라 답입니다.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인생의 답을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의 기억에 잊혔던 것을 다시 일깨어 주십니다. 우리의 기억에서 잊혔던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 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매우 단순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것을 잘 믿지 못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정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을까요? 본문 32절에 보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 바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25년 후에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 지었습니다. 이삭이라는 이름은 ‘웃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얻고서 매우 기뻤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삭이 얼마만큼 자라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바치라고 말씀합니다. 번제란 제물을 칼로 각을 떠서 태워 바치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갔습니다. 아들 이삭을 나무로 제단을 쌓고, 제단 위에 이삭을 올려놓습니다. 그리고 칼을 빼어서 이삭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급하게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께서 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도록 요구 하셨을까요? 하나님이 그렇게 잔인하신 분이실까요? 성경을 깊이 묵상하는 사람들은 이 부분을 보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것은 무조건적인 순종을 요구하고자 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라고 고백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이미 그 때부터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인류를 위한 대속물로 십자가에 죽도록 계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 사랑인지를 먼저 아브라함을 통해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아들을 번제로 드리는 것이 얼마나 가슴아픈 일인지를 보게 하셨습니다. 아들을 잃는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를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시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지를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그런 희생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그런 사랑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잊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불안합니다. 그래서 염려합니다. 그래서 초조해 습니다. 왜 그렇다고요? 하나님의 사랑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32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아들도 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다른 무엇을 걱정하냐고 질문하십니다.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35절은 이렇게 이어서 말씀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8-39절에서 이렇게 다시 답을 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누구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입니다. 사람도 자기를 닮은 자기 자녀를 사랑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신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겠습니까? 우리의 기억은 사라졌지만,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당신의 사랑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기억은 사라졌지만,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여전히 우리들을 사랑하고 계심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억이 깨어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알아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37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인간의 불행은 하나님을 떠나면서부터 생겼습니다. 질병과 고통, 관계의 단절과 죽음과 같은 것들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삶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면서 넉넉히 이기도록 하십니다. 이길 수 있습니다. 이기게 하십니다. 세상에 경쟁이 심하다고요? 오늘날의 세상이 얼마나 각박한 세상인줄 아시고 하신 말씀이냐고요? 2000년 전에 그 시대에 하신 말씀으로 과연 오늘도 동일하게 이 말씀을 받을 수 있냐고요? 그렇습니다. 바울이 살던 시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보다 더 어려운 시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은 성도에게 승리하는 삶을 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을 나의 것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승리를 선언해도 무관심하면 이 승리의 선언을 맛볼 수 없습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맹의순이라는 한 신학교 출신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6.25 사변이 일어나 피난길에 올랐는데, 그만 빨갱이로 오해를 받고 체포를 당해 포로수용소에 들어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당연히 원망이 나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수용소에 들어가자마자 거기서 자신이 섬길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수용소에서 광야교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날 너무 기뻐서 이렇게 고백했답니다. “하나님, 저를 여기에 보내신 이유를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저를 이곳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는 열심히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그러다가 얼마 후 그 수용소에는 중공군 포로들이 몰려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맹의순 선생은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갈 수 없었던 중국, 그 곳에서 가기 위해서 일생을 헌신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내 앞에 중국 사람들이 몰려 오다니.... 그는 세월 가는 줄 모르고 그들을 섬겼습니다.

반면 밖에서는 맹의순 선생의 친구들을 그의 억울한 사정을 알고 구명운동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 곳에서 새벽 한시, 두시, 세시까지 중환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손 발을 씻기고 복음을 전하다가 그 자리에서 쓰러져 숨을 거뒀습니다. 그의 장례식은 수용소 밖의 어느 교회에서 진행되었는데, 장례식이 진행되기 직전 어떤 사람이 편지 한 장을 가져 왔습니다. 편지는 포로수용소에 있었던 중공군 포로들 거의가 서명한 편지였습니다. 그 장례식장의 자리에서 이 편지가 읽혀졌습니다.

번역된 편지의 일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맹의순 선생 영전에 드립니다. 평화의 왕자. 화평의 사도, 인애의 왕, 우리에게 사랑의 주였던 맹의순 선생이 정말 가셨습니까? 우리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않던 이방인이었습니다. 우리처럼 포로의 옷을 입은 그가 미국 군인 의사들을 도우며 우리 병동을 찾아오던 초기에 우리는 그를 경멸했고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늘 온화했고, 우리를 돕는 그의 행동은 희생과 헌신으로 언제나 꾸밈없이 한결같았습니다. 우리는 대개가 그 무엇인가에 대해서 몹시 화가 나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적이 따로 없었습니다. 전쟁이라는 것에 대해서 화가 났고 우리를 전장에 보낸 사람들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들을 죽도록 원망했습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맹 선생은 십자가의 도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에게 글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일일이 글씨를 가르쳐 가며 찬미가를 불러 주셨고, 나무 십자가를 안고 다니며 그 뜻을 성심껏 설명해 주셨습니다.

선생은 새벽 한 두시면 늘 병동으로 오셨습니다. 초저녁에 치료와 간병을 맡았던 사람들이 모두 물러 가고 나서 중환자들이 더욱 심하고 무거운 고통에 짓눌리는 시간에 선생은 고통을 다시르는 천사로 우리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선생의 한 손에는 성경책이 다른 한 손에는 물통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선생은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를 골고루 만져 주고 주물러 주면서 간절히 기도를 하셨습니다.

중간 생략

시편 23편을 봉독하신 후 그 분은 한 번 더 힘차게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하시고 나서 먼 곳을 바라보시며 쓰러지셨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그 자리에 세워진 것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알았고, 이 사랑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이 자신의 삶의 목적인 것을 알아서 사랑의 명령 앞에 순종했던 맹의순 선생의 마지막 고백은 “내 잔이 넘치나이다”였습니다. 우리는 통곡합니다. 우리는 통곡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맹 선생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예수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통곡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버려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맹 선생과 함께 주님 안에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혹시 이 맹 선생처럼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우리가 여기서 기억할 것은 내가 처한 자리가 어디라도 우리는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돈이 많다고 꼭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지위가 있다고 꼭 만족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높으면 높을수록, 많으면 많을수록 긴장과 피로, 그리고 비교의식 가운데 빠진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잊혔던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을 기억하며 넉넉히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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