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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는 매년 두 번씩 주소록을 업데이트합니다. 성도님들이 아시는대로 주소록에는 가족들 이름과 생일, 주소, 이메일, 전화번호, 자녀들 이름이 나오고, 그리고 맨 마지막에는 비고란이 있는데, 이 비고란에는 주로 성도님들의 직장, 직업을 기재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 어느 분이 건의를 해 오셨습니다. 주소록에 비고란(직업란)을 빼면 안 되겠느냐는 제안이었습니다. 물론 제가 직접 들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누가 그런 제안을 하셨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지난 주일에 있었던 운영위원회에서 이 일을 논의하고 다음 주소록에는 이 란을 빼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로 이 제안이 제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주소록에 나오는 내용은 간접적이지만, 우리가 그 내용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메시지가 담겨져 있다고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는 빼기로 했으나 문제 없지만, 우리교회가 정말 그런 가치 기준을 가지고 살았는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부정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그것이 아주 중요한 삶의 기준이었고, 또 어떤 점에서는 매우 숙명적인 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꼭 그런 이유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우리는 처음 오신 성도님들을 맞이하고 대화를 할 때 우리는 대개 그 사람의 배경에 대해 질문합니다.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전공했는지, 어느 학교 출신인지, 고향은 어디인지, 저는 또 한국에서는 어느 교회를 다녔는지를 꼭 묻습니다. 질문의 의도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을 잘 이해해야 잘 도와드릴 수 있고, 대화의 공통점을 찾아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모르면 무슨 말을 해야할 지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그런 대화가 나쁘다거나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소록 문제는 저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었습니다. 주소록이 어쩌면 우리 안에 있는 우선순위,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 주소록이 말해버리고 있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의 정체를 고발해 버린 듯한 느낌이 들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믿음의 공동체라고 부르는 교회 안에서 가장 바람직한 질문은 어떤 것이어야 하겠습니까? 새로운 사람이 올 때 우리는 무엇을 가장 궁금해 하고, 무엇을 나누고 싶어하고, 무엇을 함께 공유하고 싶어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 있는 가장 중요한 삶의 우선순위일 것입니다.

사실 이 점에 대해서 제가 두려워(염려)하는 것은 이것이 어쩌면 교회의 신앙적(혹은 영적) 영향력이 없다는 것일 수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적 대화, 물론 꼭 교회에 다니는 이야기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본질적인 면에서 교회 안에서 신앙적 대화가 쉽지 않다는 것은 어쩌면 교회가 성도의 삶에 실제적으로 주는 영향력이 없다는 것을 반증할 수 있다는 점이 목사인 저의 마음을 두렵게 했습니다. 즉 교회를 오래 다녀도 그것이 그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는 인식이 깔려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대화해 보자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의 이력이나 신상파악을 하지 않고도 그와 깊이 대화하는 방법을 시도해 보면 좋겠습니다. 즉 그의 과거로부터 그를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그의 현재와 그의 마음에서 나오는 이야기로부터 그를 이해하고 그와 관계가 형성되는 시도를 하는 것입니다. 흔히 누가 누구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덕과 영향력을 말해주는 것처럼 여기는 어떤 미묘한 분위기를 깨보자는 것입니다. 좀 모르면 어떻겠는가? 문제는 그의 과거로부터 그를 이해하려는 한계를 벗어나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확실히 성경적인 인간 이해가 아닙니다.


주소록에 관련해서 이렇게 긴 말씀을 드린 이유는 본문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19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오늘 본문은 그렇게 하나님을 믿게 된 이방인들이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 되었다고 선포합니다. 즉 유대인들이 누리던 은혜를 동일하게 누리고 동일한 신분과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당시 유대인과 이방인의 입장에서 볼 때는 매우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에 보면, 초대교회 당시 베드로가 한 아주 큰 실수가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안디옥 교회에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예루살렘 교회에서 아주 보수적인 성도들, 즉 예수를 믿어도 여전히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안디옥교회로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내려온다는 소리를 듣고 베드로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그만 그 자리에서 일어서 버린 것입니다. 즉 자신은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은 것처럼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인정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는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 19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동일한 시민’입니다. 조금도 다르지 않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전에 어떤 사람이었느냐는 전혀 상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의 신분은 현재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면 충분했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과의 식사 자리에서 피한 것은 이방인들은 예수를 믿은 후에도 여전히 이방인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메시지가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을 완전히 무효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어서 교회라고 하는 믿음의 공동체에 들어왔지만, 그들에게는 여전히 이방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녀야 했고, 그들은 유대인들과는 여전히 같은 식탁의 자리에 앉아서는 안 되는 신분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피를 흘리시고 생명을 주심으로 이루어 놓으신 구원의 길을 가치 없는 사건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행위는 그리스도인이 된 이방인을 이등 성도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방인이 예수를 믿고 교회 안으로 들어왔을 때, 교회는 그들이 어디로 왔는지, 어느 종족의 사람인지를 물어볼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의 삶을 가장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가 이방인이라는 점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조금도 약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교회에서 가끔 이런 말을 합니다. 예배만 잘 드린다고 되는게 아니다. 기도만 많이 한다고 신령한 것이 아니다. 성경을 많이 안다고 신실한 것이 아니다. 맞는 말입니다. 예배를 잘 드려도 삶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도를 많이 해도 마음이 온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도하면서 매일 남의 험담만 한다면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성경을 아무리 안다고 한들 행함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매일 자기 편리한 대로 성경을 인용하는 사람은 오히려 모르는 것만도 못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왜 이런 말이 나왔을까요? 그거은 예배가 능력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예배만 잘 드린다고 되는 게 아니라, 삶이 변해야 한다는 말은 예배가 그 사람을 지금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기도만 한다고 다기 아니다. 마음이 온전해야지 라고 하는 말은 기도를 해도 그 기도가 그의 마음을 온전하게 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배만 잘 드린다고 다냐? 라고 누군가 말할 때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동의를 표시할 것이 아니라 아니 예배를 드리는데 어떻게, 왜 삶이 변하지 않는 것이지 하고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교회에서 우리의 믿음에 대해 나눌 수 없고, 과거의 이야기, 경력과 이력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할까요? 그것은 바로 교회가 행하는 것들, 그것이 예배이든, 기도이든, 말씀이든, 그런 신앙적 삶으로부터 아무런 능력도 변화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꼭 예배드리는 이야기, 기도하고 응답받은 이야기를 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와 기도와 말씀이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할 말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면 뭐하러 교회에 나오겠습니까? 이것은 심각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무가치하게 여김을 받을 때 교회는 교회로서의 능력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능력을 잃어버리면 우리가 교회로부터 얻는 유익과 능력이 없기 때문에 결국 우리가 할 말은 세상적인 경력과 이력에 대한 것밖에는 없게 됩니다. 만약 제자훈련을 받아도 안 받은 사람과 별로 다른 것이 없고, 교회를 더 열심히 나와도 안 나온 사람과 별로 다는 것이 없고, 기도를 더 열심히 하지만, 그것이 그의 삶과 인격을 별로 바꾸는 것이 없다면 누가 제자훈련과 교회출석과 기도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겠습니까? 때때로 제자훈련을 받아 보시지요? 라고 말하면 이렇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도 열심히 교회 다니고, 제자훈련 받다가 당신 같이 될까봐 못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사실 성도님들을 나무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 시대의 목사의 한 사람인 저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정말 우리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주님께 떨리는 마음으로 물어볼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 우리교회는 예배가 사람을 변화시키며, 제자훈련이 사람의 생각을 바꾸고 있으며,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해 교회가 역동적으로 변하고 있는가?하는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꼭 기억해야 할 말씀을 몇 가지 나누고자 합니다.

1. 과거에 대해 묻지 맙시다.
당신의 과거는 무엇입니까? 내가 당신의 과거를 통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밝혀보겠다는 마음을 내려놓읍시다. 철저히 우리의 생각을 말씀의 기초 위에 세워야 합니다. 베드로의 실수를 기억하십시오. 이방인과의 식탁교제를 떠남으로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이등성도로 취급했습니다. 그들의 과거에 대한 고려는 그들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구속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과거에 묶어두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다른 사람과 대화하려고 할 때 그의 경력을 묻고 싶으면, 한 번 더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현재의 모습에 집중해서 대화하는 법을 찾아봅시다. 물론 그것이 쉽지는 않은 일입니다. 우리는 현재에 대해 할 말이 없으면 자꾸 과거의 경력을 말하려고 합니다. 내가 과거에 이런 사람이었다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내가 느끼고 누리고 즐기며 함께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을 때 우리는 훨씬 더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2. 할 말이 있는 성도가 됩시다.
이 말도 잘못 이해하면 이상한 말이 되겠지만, 현재의 고백을 가진 성도로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교회에 나오면서도 아무런 감동이 없으면 안타까운 것입니다. 말씀을 들으면서도 아무런 삶의 변화가 없으면 울며 통곡해야 할 일입니다. 은혜의 자리로 나오기를 힘쓰십시다.

3. 우리교회를 아름다운 교회로 만들어 가기를 소망합시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능력을 누리며 살려고 한다면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아름답게 만들어 가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절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그 마음이 곧 하나님과 통하는 은혜의 통로를 만드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불편한 관계를 만들지 마십시오. 서로 사랑하십시오. 상대방를 정죄하면 절대로 교회에서는 은혜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교회에 새 예배당을 허락하셔서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새예배당에서 예배드리는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새예배당이라고 해서 감동이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을 꼭 가지고, 아름다운 교회를 세워가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함께 주의 교회를 섬기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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