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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사순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사순절이란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날을 기억하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40일간을 말합니다. 이 기간은 보통 주일을 제외하고 일주일에 6일씩 계산해서 6주간이면 36일이 되고, 그 전에 4일을 합치면 전체 40일이 됩니다. 그래서 사순절은 수요일 시작되는데, 올해는 2월 21일이 사순절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이 날은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라고 합니다. 사순절 기간은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고 묵상하는 기간입니다. 보통 경건한 성도들은 이 기간 금식을 하거나 혹은 고기나 기호식품을 절제하고, 근신하는 마음으로 오락을 삼가고,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우리교회 성도님들 중에도 개인적으로 그런 경건의 시간을 갖는 분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공식적으로 사순절을 지키기 위해 사순절 첫 번째 주일부터 알려드리고 함께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시간들을 갖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흐를수록 점점 더 주님의 고난에 대한 생각들을 잊어가고 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주님의 고난보다는 주님의 부활에 더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십자가에서 그 절정을 이루고, 다시 부활의 영광을 맛보게 됩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현대 교회는 고난 없는 영광을 구하고, 십자가 없는 부활을 그리고 있습니다.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고 생각하기에는 마음이 너무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주님의 고난에 대한 묵상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입구에 세 개의 십자가를 세웠습니다. 교회를 오고 가실 때마다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순절의 가장 마지막 한 주간을 ‘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사순절 내내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고난주간만큼은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이번 고난주간에는 전과 같이 한 주간 동안 ‘특별새벽기도회’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금요일(6일)은 성금요일 에배를 드립니다. 샬롯츠빌에 공립학교들은 이 주간이 봄방학입니다. 자녀들도 이 한 주간 새벽기도와 성금요일 예배를 참석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은 6일간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으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으로 만드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는 말에 담겨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완전함을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인간은 완전한 자유와 기쁨과 행복을 누리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이것은 구속이나 억압이 아닙니다. 이것은 자유며 기쁨이고 행복의 길입니다. 이런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감사가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이 믿음이 왜 중요하겠습니까? 이 믿음이 없는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아무 것도 구할 수 없습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 믿음이 없는 사람은 주님을 향해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향해 구합니다. ‘하나님! 당신이 나를 창조하셨다면, 그리고 주님 안에서 나의 완전함을 찾을 수 있다면 나를 그리로 인도하소서.’하고 기도할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길을 열리게 됩니다. 하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은 이러한 놀라운 사실을 향해 단 한 걸음도 옮기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믿어야 합니다. 믿음은 우리의 인생을 놀라운 삶의 진리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에는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잡히셔서 이곳저곳 끌려 다니시며 심문을 받으시는 장면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을 봅니다. 초반에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잡아 죽일 계책을 논의합니다. 그러다가 유월절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 이 명절이 끝난 다음에 모의를 도모하자고 결의합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예수님의 제자 중 가룟 유다라는 사람이 유대 종교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 와서 자기는 예수의 제자인데, 예수를 은밀히 체포할 기회를 제공할 테니 돈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가룟 유다는 이 흥정으로 은 30을 받습니다. 가룟 유다는 지극히 적은 돈을 받고 자기의 스승 예수를 팔아버립니다. 그리고 적당한 기회를 봐서 사람들이 모여 있지 않은 은밀한 시간에 유대 종교지도자들로 하여금 군병들을 동원하여 예수님을 체포하도록 안내합니다.

가룟 유다가 자기 스승을 팔아버린 이유가 무엇일까에 대해서는 적어도 다음의 세 가지 이유를 말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탐욕 때문이었을지 모릅니다. 바로 이 사건 전에 한 여인이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 한 옥합을 붓는 사건이 나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 때 이 여인을 꾸짖은 사람이 바로 가룟 유다였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는 도적이요, 돈 궤를 맡고 있는 사람인데, 때때로 돈 궤로부터 돈을 훔쳐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돈에 눈이 먼 가룟 유다는 단 돈 은 30에 자기 스승을 팔아버리는 역사상 가장 무서운 계약을 맺습니다. 만약 그의 탐욕이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버리는 원인이었다면 이것은 금전을 사랑하는 욕심이 얼마나 무서운 죄를 범하게 하는가를 보여줍니다.

두 번째 가능성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에 대해 철저히 환멸을 느낀 데서 그런 일을 저질렀을 가능성입니다. 유대인들은 항시 권력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들 중에는 로마의 세력을 팔레스틴에서 축출하기 위해 어떠한 살인이나 폭행의 수단까지라도 행사할 수 있는 과격파 민족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단검을 품고 다녔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라면 그의 기적적인 능력을 가지고 자기 민족을 위대한 투쟁을 이끌 수 있다고 생각했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기적적인 능력을 더 이상 행하시지 않고 십자가의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유다의 충성은 먼저 환멸로 바뀌었고, 그 다음은 증오로 변했습니다. 유다의 증오심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죽는 데로 몰고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 번째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가룟 유다가 예수님께서 기적적인 능력을 행하시는 분으로 신뢰했다는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이 보내신 위대한 지도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기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느리게 걷고 있습니다. 이제쯤이면 거사를 준비하고 작전을 세우며 구체적인 모의를 해야 할 시점이 되었는데, 예수님은 도무지 움직이실 기미를 보이지 않으십니다. 가룟 유다는 결국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 분의 권능의 손을 쓰실 기회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버립니다. 그러면 아마도 예수님께서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이 기회에 거사를 일으키실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성경은 가룟 유다의 배반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 세 가지 이유가 조금씩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세 번째 이유, 즉 예수님으로 하여금 거사를 일으키시도록 유도하기 위해 예수님을 팔아버렸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를 바로 가룟 유다의 자살 사건에서 찾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버리고 예수님께서 밤새도록 이곳저곳을 끌려 다니시면서 심문을 받으시다가 마지막으로 빌라도의 법정으로 나아갔을 때 가룟 유다는 자살을 했습니다.

그는 그 순간 자신의 행동이 잘못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자신이 지금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가룟 유다가 돈에 대한 탐욕 때문에 예수님을 팔아버렸다면, 아니 가룟 유다가 예수님에 대한 환멸과 증오 때문에 예수님을 팔아버렸다면, 그는 굳이 자살까지 했을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가 의도한 대로 얻을 것을 얻은 것입니다. 스승을 팔아 은 30을 얻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고 해도 그는 그가 얻을 것을 얻은 것이고, 스승에 대한 환멸 때문이라도 그는 속 시원하게 자신을 실망시킨 스승을 멀리 보내버린 것이 됩니다.

하지만 가룟 유다의 자살은 아마도 단순히 그런 것이 아니라 로마를 향해, 혹은 유대의 부패한 종교 세력을 향해 기적을 행하심으로 힘차게 일어서기를 의도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계획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스승 예수님은 다시 살아 나오실 수 없는 자리로 들어가셨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 외에는 길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위의 세 가지 관점 중 어떤 것이 옳다고 생각하든지 간에  유다의 비극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그가 예수님을 그 본래의 예수님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예수님이 자기가 원하는 예수님이기를 원하는데 문제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설득시키고 변화시키려고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예수님을 우리의 목적을 위해 이용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의 목적을 위해 쓰이기 위해 그에게 복종할 때 참 생명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유다의 비극은 하나님 보다 자기가 더 현명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의 비극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그 분은 인간을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참 기쁨과 행복과 완전한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그것을 거부합니다. 자기 생각과 자기 뜻대로 살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거부합니다. 하나님은 없다고 선언합니다. 자기에게 어느 정도의 유익을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러나 더 나쁜 것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능력도 믿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자이심도 신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을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하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의도를 미리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을 하면서 가룟 유다로 하여금 돌이키도록 계속 도전하고 기회를 주셨습니다.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21절) 이 말에 제자들이 다 근심하며 ‘주여 내니이까?’라고 묻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합니다.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 이 때 가롯 유다가 말합니다. ‘내니이까.’ 다른 성경에는 ‘나는 아니지요?’라고 말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바로 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떡 한 조각을 가룟 유다에게 찍어 주시면서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다른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이때의 분위기를 말하자면 예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가 다시 알 수 없는 상황으로 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분위기가 워낙 특별했기 때문에 예수님께 자세히 묻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가룟 유다는 알았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자기 스승 예수님께서 자기를 향해 계속해서 돌이키도록 도전하고 있음을 가룟 유다는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어떻게 듣습니까?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남은 못 듣지만 자기는 듣는 것이 있습니다. 꼭 목사가 그 말씀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마음 중심을 향해 외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이 다른 곳에 있을 때 우리는 애써 그것을 외면합니다. 믿음이 있을 때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막상 돌아서면 아무 것도 듣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이 불행이요 저주입니다. 말씀을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합니다.

주님은 여러분들을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을 누리십시오. 그 사랑을 누리기 위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주님의 음성을 바르게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결코 우리의 인생을 멸망으로 어둠으로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그 분이 인도하시는 길은 우리가 계획하고 구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놀라운 길입니다. 내가 원하는 예수를 그리지 마십시오. 주님이 원하시는 나를 세워 가십시오. 내가 기대하는 것을 예수님께 강요하지 마십시오. 나의 지혜와 계획이 주님의 것보다 더 전략적이고 낫다고 교만하지 마십시오. 그 분이 나보다 더 지혜롭고 뛰어나십니다. 감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그 분은 지혜로운 분이십니다. 그 분께 자신의 삶을 맡기십시오. 그 분 앞에 나의 생각과 고집과 경험을 내려 놓으십시오. 그리고 그 분이 주시는 은혜를 누리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삶에서 정말 놀라운 역사가 체험할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모든 성도님들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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