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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의 주된 흐름 중에 하나는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을 비교하여 설명함으로써  복음을 이해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하고, 천사와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합니다. 제사장과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합니다. 이러한 비교는 복음의 핵심을 이해하는데 매우 유익합니다.

오늘 본문은 시내산과 시온산을 비교합니다. 시내산은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은 산이고, 시온산은 예루살렘에 있는 산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다소 상징적인 의미를 담은 산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산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의 상황을 출애굽기와 신명기 등에서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시내산은 엄청난 위엄과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모세를 제외한 누구도 들어올 수 없게 했습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그곳에 들어오면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산 위에서 나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소리를 들은 백성들이 다 떨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더 이상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너무도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율법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율법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하나님의 법이었습니다. 율법은 곧 두려움의 상징이었고, 율법을 어기는 것은 곧 죄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 앞에서 온전히 순종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것이 바로 지성소 제사였습니다. 1년에 단 한 번만 대제사장이 들어가서 제사를 드립니다. 하지만 여기서 잘못 제사를 드리면 제사장은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구약의 백성들은 이로 인해 항상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두려움이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율법에 제대로 순종하지 않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음을 당하기도 했지만, 실은 이 율법으로 인해 그들은 온갖 고난을 이기는 힘을 얻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율법은 그들에게 언제나 두려움의 상징이었습니다.


반면 신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죄를 지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아야 하는데, 그 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으신 것입니다.

본문에서 시온산이라고 하는 곳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보혈의 피를 뿌린 곳입니다. 용서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인간을 죄로 인한 심판으로부터 구원하는 용서의 사건, 구원의 사건이 일어난 곳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두려움의 장소였던 시내산이 용서와 구원의 사건이 일어난 시온산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히브리 성도들에게 여러분들이 지금 시내산에 있지 않고 시온산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즉 그들은 지금 굉장한 두려움의 장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엄청난 은혜와 용서, 구원의 자리로 옮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신약으로 온 것은 우리를 무한히 자유롭게 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구약의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되고, 지성소의 두려움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즉 이것을 율법에서 은혜의 세계로 옮겨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히브리서 4장 16절 말씀은 우리가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선포합니다. 누구든지 갈 수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도 주님 앞에 자유롭게 들어갑니다. 사실 오늘 우리는 자유롭게 예배드립니다.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제사장으로서 우리 스스로 예배자가 되어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구약 시대의 예배 개념은 제사장이 대신 드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직접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이것이 은혜의 사건입니다. 우리가 그분께 기도를 드리고, 또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듣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는 은혜의 시대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받아드림으로,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셨다는 이 놀라운 사건을 받아들임으로 구원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25절입니다. “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 이 말씀은 아주 역설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은혜는 거져 받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대신해서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구원 받기 위한, 즉 하나님께서 인간을 처음 창조할 때의 그 풍성한 삶으로 돌아가기 위한 어떤 댓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아주 놀라운 은혜이며, 우리를 자유케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장 1절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그런데 25절 말씀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조금 어렵게 표현되어 있지만, 이런 뜻입니다. 구약에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의 말씀을 거역한 사람들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거져 주시는 은혜를 받은 우리가 그의 말씀을 배반한다면 그분의 심판과 진노를 피할 수 있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은 이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고 구원하시기 위해 단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내어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주셨습니다. 선지자들과도 비교할 수 없고, 천사들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마지막 방법임을 말씀합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4장 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신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한 길이었습니다. 측량할 수 없는 은혜요, 다함이 없는 은혜입니다. 우리로 더 이상 죄에 얽매이지 않게 하시려고, 주님의 강력한 속죄, 구속의 역사를 성취하신 사건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이것은 신학적으로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표현했습니다. 거부할 수 없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어떤 명분으로도 이 은혜를 피해갈 방법이 없음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누구도 이 은혜 앞에 서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가 이 엄청난 구속의 역사를 피해갈 수 있으며 누가 이 엄청난 구원의 은혜를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이 놀라운 구속의 은혜, 이 놀라운 속죄의 은총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시온산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분의 은혜를 거부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끝까지 이 은혜를 거부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사람에게는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25절의 말씀입니다. 25절을 다시 보십시오. “너희는 삼기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 땅에서 경고하신 모세의 율법을 거역해도 심판을 받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 그분의 십자가의 구원의 역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의 심판을 피할 수 있겠냐고 말씀합니다.

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구약의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을 거역하고 광야에서 하나님께 원망하며 불평한 사람들도 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주신 은혜의 길을 거부한다면 누가 그 진노의 잔을 피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로 받은 구원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보통 이 구원의 은총을 잘못 해석하고 이해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놀랍기 때문에, 거져 주신 은혜이기 때문에 여전히 우리는 잘못해도 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죄를 범해도 구약시대와 같은 심판은 없다고 말하곤 합니다. 여전히 잘못 살아도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그것이 바른 성경의 이해입니까? 물론 우리는 예수를 믿은 후에도 약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넘어질 수 있고, 다시 죄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실패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의 약함을 용서하실 것이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용서의 복음은 우리의 지나온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가 힘써 주님을 따르다가 여전히 약하기 때문에 죄를 범할 수밖에 없었다면 그것을 용서하시는 것이지, 십자가의 은혜가 앞으로도 죄를 지을 수 있다는 면허증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마치 죄를 지을 수 있는 면허증처럼 생각합니다.

이 은혜는 매우 종말론적인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마지막 길입니다. 마지막 카드입니다. 이것 말고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 말씀으로 우리가 반응하지 못하고, 이 복음의 은혜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면 우리에게는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는 아주 심각한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그렇게 주를 위해 살았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그토록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주님 앞에 나아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이 복음을 알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이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사건인지를 알았습니다. 이것은 그 크기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그 사랑의 종말적 성격 때문에 더 하나님 앞에 바르게 응답하여 살려고 몸부림쳤습니다.

그들은 이 십자가의 은혜가 어떻게 자신들에게 온 것인지를 잘 알았습니다. 이 은혜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가장 마지막 방법이었고, 그분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것이었습니다. 이 은혜를 놓치면 더 이상 구원의 기회는 다시 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간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 방법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능력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구원의 역사에 응답할 수 없다면 우리는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의 그 구원을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의 그러한 사랑의 성격을 바르게 알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믿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구원은 행함으로 받은 것이 아니라 거져 받은 것이기 때문에 그냥 막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행함으로 받았다면 오히려 주장할 수도 있지만, 거져 받은 것이라면 주인이 다시 가져가도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이 구원은 한편으로는 두려운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도 감격스럽고 놀라운 역사입니다. 그런 면에서 히브리서는 히브리 성도들에게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것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은혜에 대한 바르지 못한 이해가 인생을 불행하게 하고 주의 사랑을 누리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오늘 이 은혜를 바로 알고 그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나라”

본문은 예수님의 구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씀하신 후에 이어서 흔들리지 않는 나라에 대해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나라에서 그분의 통치를 받고 산다면 우리의 삶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28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습니다.

이 말씀을 히브리서 기자는 앞선 18-21절의 말씀으로부터 이끌어 옵니다. 즉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실 때 시내산이 요동치며 흔들렸습니다. 천지가 떠나갈 듯한 천둥과 번개가 일어났고, 산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와 불이 붙고 불이 붙기도 했습니다. 백성들은 더 이상 그 앞에 나갈 수 없을만큼 두려웠습니다.

이것을 히브리서는 땅이 흔들리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26절에서 말씀합니다.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이르시되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그 때는 땅만 진동하였지만, 장차는 땅만 아니라 또 한 번 하늘까지도 흔들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게 흔드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27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하지 아니하는 것을 영존하게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드신 것들을 변동될(없어질) 것을 나타내심이라.” 즉 진동하지 않을 것, 사라지지 않을 것을 영원히 보존하고 구별하기 위하여 사라질 것을 사라지도록 땅과 하늘을 흔드신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다”는 28절의 말씀과 흔들리지 않는 것을 영원히 구별하여 있게 하고 흔들리는 것을 영원히 소멸하시기 위하여 땅과 하늘을 흔드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날도 세상은 자주 흔들리고 있습니다. 지진으로 흔들리고, 쓰나미로 흔들립니다. 태풍으로 흔들리고, 경제적 위기로 흔들립니다. 수많은 재난과 전쟁으로 흔들리고, 원전 사고로 흔들리고 있습니다. 과연 이런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혼탁하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어떤 위기와 고난, 지구를 흔들어대는 놀랄만한 사건들 속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런 것에 대해 생각해 보셨습니다. 땅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주택입니까? 아니면 우리의 지식과 직장, 아니면 경력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진동하지 아니하는 것을 영존하게 하기 위하여 영원히 보존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결국 사라질 것들이 사라지도록 흔드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흔드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흔들림 속에서 당신의 자녀들이 정말 영원히 보존할 것이 무엇인지를 찾고 그것을 굳게 붙들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것,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기서 그런 것을 다시 일일이 말씀드릴 수 없지만, 몇 가지만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먼저 구원이 영원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빼앗기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십니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할 때 구원은 하늘과 땅에 흔들릴 때조차도 우리을 온전하게 붙들어 줍니다. 평안하게 합니다. 삶의 기쁨과 기대를 갖게 합니다.

2. 또한 사랑은 영원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사랑은 영원합니다. 사랑은 끝까지 남아있습니다. 사랑은 죽어도 남습니다. 부모의 사랑은 부모가 죽은 후에도 자식의 마음 속에 남아서 자녀의 삶을 움직입니다. 사랑은 영원하기 때문에 형제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3. 세 번째 관계가 영원합니다. 관계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의 관계로 맺어졌으면 이 관계는 끝까지, 주님 오실 때까지 흔들리지 않습니다.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늘과 땅은 흔들려서 사라져도 관계는 남아 있습니다. 때로는 미워지는 사람이 있고, 외면하고 싶은 사람이 있더라도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것은 관계가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4. 진리는 영원합니다. 진리는 절대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은 세상이 바뀌어도 옳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붙잡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진리는 영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를 열심히 묵상하고 탐구해야 합니다.

그 외에도 얼마나 많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히 누릴 것으로 주신 풍성함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것을 잡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주셨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주셨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 나라를 누리며 어떻게 그 나라의 가치를 누리면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날마다 그 나라의 보화를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다른 것은 다 하나님께서 필요에 따라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물질과 명예, 삶의 필요들은 주님께서 채워주기로 하셨습니다. 주님의 약속을 기억하십시오. “너희는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는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1-33).”

이것이 주님의 은혜를 누리는 자의 삶입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무한한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미 이 땅에서 우리는 그 나라를 얻은 자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염려하지 않고 그분을 무한히 신뢰한다면 우리는 놀라운 그분의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풍성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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