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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잡히셔서 십자가에 죽던 주간이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은 금요일 십자가에 돌아가셨는데, 바로 그 주간 화요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잡히시기 이틀 전입니다. 마태복음 23장에서 주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심하게 꾸짖었습니다. ‘화 있을진저’를 7번이나 외치시면서 그들의 위선과 거짓을 고발하시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난 후 성전에서 나오셨습니다. 나오시면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을 예언하십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은 모두 세 번에 걸쳐 지어졌습니다. 첫 번째는 솔로몬이 지은 성전입니다. 솔로몬 성전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설계를 하고 당시 솔로몬 왕국의 엄청난 부를 드러낼 만큼 위대하게 지어진 성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다 민족이 바벨론 나라에 포로가 되면서 예루살렘 성전은 모두 무너지고 황폐화되었습니다. 주전 537년 바벨론이 망하고 페르시아가 들어서면서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 원년에 고레스 왕의 허락을 받아 스룹바벨이 지도자가 되어 함께 돌아온 일반 백성이42,360명이고, 노비가 7,337명, 노래하는 자가 200명, 그래서 합이 49,897명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복원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포로생활로부터 돌아왔기 때문에 그들이 복원한 성전은 초라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전이 예수님 당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은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고, 헤롯이라는 에돔 인이 로마로부터 권력을 받아 다스렸습니다. 에돔인은 에서의 후손을 말하는데, 에서의 후손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후손이긴 하지만 야곱의 자손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늘 유대인들로부터는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한 족속이었습니다. 그래서 헤롯 왕은 효과적으로 유대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한 가지 수단을 마련했는데, 그것이 바로 유대인을 위해 예루살렘에 성전을 개축하는 것이었습니다. 헤롯 왕은 엄청난 재물을 사용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개축합니다. 헤롯은 예루살렘 성전을 새로 지은 것이 아니라 개축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스룹바벨 성전이라 하지 않고 헤롯 성전이라고 하는 이유는 워낙 방대한 규모로 공사를 했서 전에 있던 스룹바벨 성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헤롯 성전은 주전 19년에 시작해서 주후 63년에 완공되어 무려 80년이 넘도록 건축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 성전은 계속 건축중이었고, 그 규모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헤롯 성전은 시온산 정상 300평방 미터의 평지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예루살렘 도시는 낮은 지역에 있었고, 성전은 산 위에 있었습니다. 둘 사이에 계곡이 있었는데, 이 계곡을 가로지르는 길이 13m의 다리가 있었고, 교각의 높이가 7m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성전이 얼마나 멋있었겠습니까? 더욱이 성전에는 기둥이 장정 세 사람 정도는 팔을 벌려 서야 겨우 안을 수 있을 만큼 굵었다고 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성전은 금으로 도금했기 때문에 태양이 비치면 빛이 반사되어 성전을 쳐다보고는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또한 금이 없는 부분은 흰 대리석으로 지어져서 성전을 처음 오는 사람들에게는 마치 눈이 성전에 내린 것과 같은 착각을 하게 한다고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말하고 있습니다. 성전의 모퉁이 돌은 가로 세로가 각각 6m에서 12m까지 되는 무게 100톤이 넘는다고 합니다.

이곳은 갈릴리 어부 출신들인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들어왔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오늘의 본문 말씀을 하실 때의 시기는 주후 29년쯤이므로 성전이 아직은 많이 완성되지 못했을 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성전의 위압감은 무시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성전을 제자들과 함께 보고 있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앞으로 이 성전의 운명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2절의 말씀입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그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감람산에 올랐을 때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3절).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여기서 제자들은 적어도 세 가지 때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때이고, 둘째는 주님께서 다시 임하실 때를 묻고 있고, 세 번째는 세상 끝이 언제 오며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제자들이 그 세 가지를 구분하고 질문하는지는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세 가지의 때를 질문합니다.

제자들은 아마도 예루살렘 성전이 멸망하는 때와 주께서 임하실 때를 동일시하고 있었을 런지 모르지만, 예수님의 대답 속에서는 결국 세 가지의 때를 말하게 됩니다. 1)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때 2) 주님이 임하실 때 3) 세상 끝. 주님이 오실 때 세상의 끝이 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리고 사실 시간적으로 동시적으로 이루어질 것이지만 주님이 오시는 사건으로 인해 세상의 종말이 온다는 것을 생각하면 주님께서 오시는 것이 논리적으로 앞선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의 예언대로 예루살렘에 헤롯 성전은 주후 63년에 완공되었는데, 그로부터 불과 7년이 지난 후에 예루살렘 성전은 로마의 Titus 장군에 의해 완전히 초토화되었습니다. 금으로 성전을 도금하고, 대리석으로 치장을 한 성전은 로마 병사들에게는 커다란 전쟁 노획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또한 역사 기록에 의하면  투르누스 루프스(Turnus Rufus)란 사람은 이 성전의 기초까지 파헤치는 일을 감행했다고 합니다.

본문 2절과 15절부터 22절까지를 보면  당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때의 상황이 얼마나 처참했는지를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기록하기를 로마의 Titus는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결국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끝까지 버텼지만, 기아와 기근으로 온갖 악행이 자행되었다고 합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매장하려고 해도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 없었고,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최후의 시간이 오기 전에 스스로 관에 들어가 누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한 기록들은 차마 말로 옮기는 것조차 끔찍했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십 만 명이 포로로 잡혀 노예가 되었고, 일백 십만 명이 사망했다고 요세푸스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상황을 성경 22절에서는 ‘그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들이 더 지속되었다면 그나마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것이란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제자들에게 이러한 예언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상황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 적어도 세 가지의 때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때와 주님이 다시 오실 때, 그리고 세상 끝에 대한 것입니다. 세 가지 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 세 가지 상황을 동시에 놓고 설명하십니다. 왜냐하면 이 세 가지 상황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영적으로 위기요 성도로서는 깨어있어야 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미 그 중 한 가지 사건, 즉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는 사건을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억하는 오늘의 시대 사람들에게는 주님의 말씀이 어느 것이 예루살렘 성전 파괴에 대한 말씀이고, 또 어느 것이 종말의 때에 대한 말씀인지 잘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그 말씀을 하실 때는 굳이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주께서 당시 제자들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은 우선적으로는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지만, 또한 후세에 동일하게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도 주시는 말씀이었기 때문에 동일한 자세와 당부를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예루살렘 성전 파괴의 사건을 다시 경험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오늘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도 여전히 동일한 영적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듣고 있는 제자들과 동일한 마음으로 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에게 닥쳐올 환란 가운데서 겪을 수 있는, 교회를 위협하는 두 가지 위험을 경고하십니다. 첫 번째 경고는 4-5절과 11절에 나옵니다. 그것은 거짓 선지자에 대한 위험입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거짓 선지자가 많은 사람을 미혹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는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거짓 선지자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씀이 단지 ‘몰몬교도들을 집에 들이지 말고, 여호와의 증인들과 상대하지 않는 것만으로 끝나는 말씀일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워낙 인터넷이 발달하고 매체가 발달해서 많은 설교를 듣고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목사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참 많이 유익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전달하는 설교자의 인격을 통해 선포됩니다. 그러므로 설교자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이 편하지 않으면  설교자가 아무리 좋은 말씀을 전해도 듣고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결국 설교를 들으면서 우리는 관계를 점검하게 됩니다. 한 교회에서 한 공동체 안에서 목사와 성도로 만나서 말씀을 전하고 듣는 관계가 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스피커로서의 설교자만의 의미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설교에 은혜가 되면 목사가 좋아지고, 또 설교에 은혜를 받지 못하면 목사가 싫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의 영적 체온을 재는 것입니다. 목사의 설교가 너무 강해서 순종하거나 감당하기 어려우면 힘들어하다가 기도하면서 다시 힘을 얻어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이나 다른 매체를 통해 말씀을 들을 때는 그런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고 싶지 않고, 맘에 안 들면 다른 채널을 틀면 그만입니다. 그 말씀에 부담을 가질 필요도 없고, 그 설교자를 향해 다른 마음을 품을 필요도 없습니다. 결국 그 결과는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말씀의 중심에 서는 것입니다. 내가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정해놓은 것 가지고, 내 맘에 드는 말씀만 들은 결과는 성경에 나오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해진 설교자를 통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두 번째 경고는 12절입니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마지막 때에 사랑이 식어질 것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교회를 위태하게 하고, 위험하게 하는 가장 큰 것이 바로 사랑의 식어짐입니다. 왜 사랑이 식어질까요? 본문은 불법이 성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불법이란 법대로 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법이란 바로 하나님의 법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의 권위가 우리 마음에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감정만이 아닙니다. 이성 간에 느끼는 사랑은 사랑의 지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합니다. 사랑은 인격적입니다. 그러므로 지성과 감정과 의지가 함께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사랑이 의지적이라는 말은 사랑하려고 할 때 사랑할 마음이 생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해야지! 사랑 하는게 하나님의 뜻이야!’라고 말하면서 사랑으로 순종하려고 할 때 사랑의 마음이 생깁니다. 마지막 때는 불법이 성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떨어지고, 결국 사랑의 힘도 잃어버립니다. 사랑은 결단이고 순종이며 희생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 없는 은사에 대해 말씀합니다. 사랑 없는 예언과 사랑 없는 능력에 대해 말씀합니다. 사랑 없이도 구제할 수 있고, 사랑 없이도 자기 몸을 불사를 만큼 열정을 가질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사랑하기를 결심합시다. 환난 시대의 교회는 말씀의 권위를 세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목사에게 말씀의 능력을 주시라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불법이 성하므로 식어지는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사랑을 회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앞에 서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교회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경건함과 두려워함으로 서서 그 분이 주시는 사랑을 우리의 시대 가운데서 회복하는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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