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샬롯츠빌한인교회

주일설교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비디오 설교] [비디오 찬양] [비디오 특송] [비디오 경배]


고린도교회는 초대교회들 중에서 현대교회와 가장 유사하다고 합니다. 성경공부에 대한 열정이 있었고, 방언과 예언, 치유 등 은사들이 풍성하게 알어났었습니다.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했습니다. 성경에 대해 해박했습니다. 그런데 또한 교만했습니다. 신앙적으로 성숙한 행세를 했습니다. 서로 자신의 신앙이 옳고 높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신앙을 자랑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신앙의 자유함’에 대한 주장이었습니다. 자유는 그들의 신앙을 아주 고상한 것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그들은 자유주의적인 신앙 사고를 가지고 성숙한 신앙인의 행세를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당시 시대의 세상문화에 어울릴 수 있었습니다.

이런 자유주의적인 개념이 어디서 왔을까요? 그것은 두 가지 줄기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방종을 일삼는 당시 헬라철학의 자유주의적 철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육체를 경시하고 영적인 세계만을 더 가치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육체적 욕망을 따라 사는 것에 대해 자유한 것이 마치 고상한 철학자의 자세인 것처럼 행세했습니다. 또 하나의 자유에 대한 개념은 사도 바울에게서 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가르쳤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이 말씀은 잘못된 율법주의의 멍에에서 벗어나라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잘못 오해하고 남용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았으니 앞으로도 계속 죄를 지을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12절은 그런 배경을 가지고 언급된 말씀입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유대인들이 율법을 철저히 준수함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여인도 구원했고,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도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당시 가장 심각한 죄인으로 취급받던 세리 마태도 있었고, 세리 삭개오도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는 그런 여인을 용서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우리는 당연히 하게 됩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이런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배우면서, 그리고 사도 바울이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듣고 배우면서 그들은 세상의 문화, 죄에 대해 전혀 통제되지 않은 삶을 살아도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 생각은 매우 개방적인 성문화에까지 적용했습니다. 고린도라는 도시는 가장 성문화에 노출된 도시였습니다. 고린도라는 도시 이름을 따서 만든 단어 ‘고린띠아조마이’라는 말은 ‘고린도인처럼 되다.’ ‘고린도화하다’ ‘고린도처럼 살다’ 라는 말인데, 실제 그 의미는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 12절에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자유의 개념은 어떤 것입니까? 바울이 말하는 자유는 ‘마치 주인이 종에게 주는 백지 위임장’과 같은 것입니다. 고대 시대 어느 집에 종이 있었습니다. 주인의 물건을 훔치고 귀중품을 팔아 자기 주머니에 넣고 주인의 재산을 축냈습니다. 다른 종들을 때리고 주인을 곤경에 빠뜨리고, 불순종했습니다. 일은 우리가 다 하는데 누리는 것은 주인 혼자다 라고 하면 불평했습니다. 그러다가 주인이 자신의 죄를 알게 되었습니다. 종은 도망을 쳤고, 주인은 종을 공개수배했습니다. 결국 주인에게 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이 종을 긍휼히 여겼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모릅니다. 종의 어떤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기보다는 주인의 긍휼히 여기는 마음, 아주 깊은 내면의 성품에서 나온 결단이었습니다. 주인은 그 종에게 형벌을 가하지 않았습니다. 그 종에 그동안 범한 잘못, 주인에게 입힌 손해, 여러 곳을 다니면서 다른 사람들의 물건을 훔치고, 심지어는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던 모든 잘못에 대한 변상을 주인이 다 하고 그 종을 살려주었습니다. 그 종을 자기 양자를 삼았습니다. 피로 맺어진 혈육은 아니지만 양자의 관계로 부자지간이 됩니다. 본래 로마시대에는 혈육으로 맺은 자식보다 양자가 더 큰 권세를 가진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이제 양자가 된 종에게는 모든 자유가 내려졌습니다. 어떤 의무도 법칙도 형벌도 없습니다.

아들이 된 종은 이제 그가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다만 그에게 있다면 주인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들로서의 신분이 주어지고 가정의 대소사에 결정권이 주어졌습니다. 종을 거느릴 수 있는 특권도 주었습니다. 그야말로 ‘백지 위임장’이 주어진 것입니다.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뭐든지 얻을 수 있고,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된 종은 뭐든지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인의 아들이며,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종일 때는 훔치고 도적질하고 속이며 원망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종에게는 규율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규율이 있어도 종은 그 규율을 범합니다. 하지만 주인은 뭐든지 할 수 있지만, 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자유란 바로 이런 자유입니다.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닙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8-10장을 보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자유롭게 되지 않는 자유, 즉 복음을 위해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려는 의도적인 선택이라고 열렬하고 설득력 있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중 몇 구절을 읽어봅니다.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나를 힐문(공격)하는 자들에게 발명(변론)할 것이 이것이니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이것이 바울이 주장하는 자유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자신에게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자유롭게 쓰지 않을 자유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내가 종으로 있다가 주인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 은혜가 너무도 고마워서 주인을 위해, 아니 아버지를 위해 충성을 다합니다. 아버지의 재산이 결국 대부분 나의 재산이 되겠지만, 그것을 생각하고 하는 그런 계산된 충성이 아니라 정말 이미 죽었어도 열 번도 더 죽었어야 할 자신을 살려주시고, 사랑해 주신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충성입니다. 이제는 아버지와 아들로 맺어진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충실한 것입니다. 이것이 자유입니다. 이 안에서 누리는 자유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다른 종들과 함께 주인을 욕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주인의 재산을 축내지 않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주인을 험담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전의 종들과는 다른 존재가 되었습니다. 종들과는 삶의 가치관, 삶의 방식, 삶의 목적이 달라졌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교회에서 봉사를 할 때, 혹은 직장에서 일할 때 누군가와 함께 섬겨야 하는데, 그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나만 고생해서 뭐하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마치 손해를 보는 것 같고, 나만 바보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조용히 질문해 봐야 합니다. 내 안에 자녀의 마음이 있는가? 아니면 종의 마음이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고린도교회의 성적 타락에 대한 말씀의 근거로 말씀했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마치 성적 타락이 권리인양, 그리고 성숙함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바울은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종은 허락된 모든 것을 다 누리려고 하지만, 자녀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같은 맥락으로 성적인 문란을 극복하고 경건할 삶을 살도록 말씀합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바울은 몇 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이 성적 타락에 빠져서는 안될 이유들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첫번째로 그리스도인이 경건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몸의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몸을 주신 이유는 그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라고 13절에 말씀합니다. 몸은 주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주님을 위해 존재합니다. 이것은 우리보다 성문화에 노출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훨씬 더 잘 이해되는 말일 것입니다. 전에 종이었던 아들이 이제 자기 몸을 주인이었던 아버지를 위해 사용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합당한 고백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본인에게도 선한 일입니다.

당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육체적 타락을 일삼으면서 인용하던 말이 있었습니다. 13절에 나오는대로, 그 의미는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음식을 먹도록 식욕을 주셨고, 그것을 소화시키도록 위장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식욕이 없으면 어떻게 음식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배고픔만으로 음식을 먹는 것은 불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식욕을 즐기기 위해 필요 이상 먹는 것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이 말을 인용하면서 더불어 성적인 부분까지 적용시켰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적인 욕망을 주셨습니다. 왜 성적 욕망을 주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채우라고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적인 욕망을 채우는 것은 마땅한 권리요 특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주님을 위해 존재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살 때만이 진정으로 자유해집니다. 성적인 기쁨은 부부 안에서만 누리도록 한정하셨습니다. 그것은 자유의 제한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무한한 자유가 있습니다. 먹는 것이 필요하지만 우리 몸의 목적이 아니듯이, 성적인 기쁨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지만, 그보다 하나님은 우리 몸을 주님을 위해 사용하도록 하셨습니다.


두 번째 우리가 성적 타락에 빠져서는 안될 이류를 14절에서 말씀합니다. 그것은 부활에 대한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의 몸도 다시 살리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영만 살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몸도 다시 살리십니다. 그 때 우리의 몸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으로 변한다고 말씀합니다. 요한일서 3장 2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가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이 될 것을 안다’고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 몸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분명 살과 뼈가 있는 몸이지만, 예수님께서 부활 후에 나타나셨던 것처럼 그렇게 시공간을 초월한 거룩한 존재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을 거룩하게 보존해야 합니다. 당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성적 타락에 빠졌던 이유 중에 하나는 헬라 철학적 사고에 바탕을 둔 영지주의자들, 즉 이원론에 근거합니다. 이원론이란 영과 정신은 거룩하고 깨끗한 것이지만 육체는 더럽고 추한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육을 학대하고 필요없이 고행하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육체적 쾌락을 저지르면서도 결국 썩어 없어질 육체이기 때문에 상관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 몸은 다시 부활하게 될 것이며, 그러기 때문에 몸의 거룩함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장차 우리의 몸을 다시 살리실 것을 바라보십시오. 그것은 허황된 일이 아닙니다. 종말에 대한 믿음,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이 오늘의 시대에서 거룩함을 지키는 것은 어렵습니다. 종말적 신앙을 가짐으로 거룩한 주님의 뜻을 성취하는 삶을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세 번째 우리가 몸의 거룩함을 지키고 성적 순결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우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고린도전서 12장과 로마서 12장에서도 다시 말씀합니다. 그리스도는 몸의 머리와 같고 우리는 그 지체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매우 밀접하게 관련을 가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피로 맺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보다 더 밀접한 관계가 바로 몸과 지체의 관계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8장을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유대인들의 돌에 맞아 죽을 상황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습니다. 간음을 하고도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씀에 근거해서 간음을 해도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성적 타락자도 용서해야 하고, 그들에게도 안수를 줘야 한다고 말하고 법을 바꾸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다시 잘 살펴봐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여자가 대답합니다. “주여 없나이다.” 다시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오늘날 교회의 딜레마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람을 변화시킬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변화가 없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킬 능력을 상실한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능력을 회복하지 못하는 이상 동성애자와 성적 타락자를 교회가 받아들여야 하느냐 마느냐는 끝없는 논쟁의 씨앗이 될 뿐입니다. 용서를 하지만 삶은 변화되어야 합니다. 변화가 없는 용서는 교회를 더 크게 타락시킬 뿐입니다. 그래서 용서가 없이 교회의 문을 닫아버리면 교회는 다시 율법주의로 빠져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런 딜레마가 오늘의 교회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고민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네 번째 우리가 성적인 순결을 지키고 거룩한 성도로 살아야 할 이유는 우리 몸이 성령의 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은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니님께서 솔로몬을 통해 성전을 짓게 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그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성령으로 임재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우리를 세우십니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우리가 잘못을 할 때 우리를 책망하십니다. 우리가 낙심해 있을 때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우리가 범죄할 때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있을 때 그 분은 우리 안에서 슬퍼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몸을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성적인 방종에 자신을 방임해서는 안 됩니다.


다섯 번째 우리가 성적인 타락에 빠져서는 안되는 이유는 우리 몸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값주고 산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도망친 종을 다니면서 온갖 범죄 가운데 저지른 모든 값을 주인이 변상해 준 후 그 종을 자신의 양자로 삼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르시고 우리를 우리를 사망에서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소유권이 있습니다. 우리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공식적으로 하나님의 것입니다. 처음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할 때 사람을 만드시고 그 사람은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지으므로 인간은 사단에게 내어준바 되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다시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다시 인간을 사시고, 그의 소유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말씀합니다. 우리는 주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문화를 따라 성적인 타락을 일삼아서는 안되는 이유는 단지 좀 더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좀 더 도덕적인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노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하는 훨씬 더 깊고 심오한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를 바르게 알고 있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의 시류에서 빠져 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신의 신분이 종에서 주인의 아들로 바뀌었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종들에게서 나와서 아들처럼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엄청난 목적과 임재, 부활의 때 몸으로 부활한다는 약속, 값으로 산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어떻게 그들의 엄청난 문화적 압력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이 시대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았습니다. 우리는 세상과는 다른 존재입니다. 인생의 목적도 다르고, 장래의 약속도 다릅니다. 신분도 다릅니다. 저들은 세상의 자녀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비밀들은 우리가 세상 사람들 앞에 고개를 뻣뻣이 들고 교만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복음으로 다가가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삶의 목적을 다시 돌아보십시오. 오늘 마지막으로 성적 순결을 지키기 위해 매우 중요한 실제적인 지침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음행을 피하라(18절)’는 것입니다. 음행은 피하는 것이지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인터넷을 켜 놓고 이겨야지, 이겨야지 한다고 이겨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컴퓨터를 끄고 말씀을 들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거룩함과 고요함, 그리고 내적 평화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평화를 주십니다. 그리고 그 안에 무한한 능력과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일자 설교 제목 성경
649 2023-07-23 주병열 목사 내 증인이 되리라 (녹화 방송) 사도행전 1:6-8
648 내 허물을 자복하리라(시32:1-11), 2007. 8. 5 주일예배
647 내가 남길 유산(딤후1:3-5) 2008. 5. 4 어린이주일예배(박진석목사)
646 2023-03-19 주병열 목사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녹화 방송) 요한복음 13:34-35
645 내가 너희를 택하였노라(요15:12-17) 2010. 7. 11 주일에배
644 내가 새 언약을 맺으리라 (히8:6-13) 2011. 2. 6 주일예배
643 2021-02-28 김용진 선교사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file 요나서 4:1-11
642 2020-01-05 주병열 목사 내가 여기 있나이다 file 이사야 6:1-13
641 2020-12-27 주병열 목사 내가 여기 있나이다 file 이사야 6:1-13
640 내가 온 것은(1)-생명을 주기 위해(요10:7-15) 2012. 12. 2 주일예배
639 내가 온 것은(2)-섬기기 위해(막10:32-45) 2012. 12. 9 주일예배
638 내가 온 것은(3)-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마9:9-13) 2012. 12. 16 주일예배
637 2018-08-05 주병열 목사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아라 (I am Willing and Be Clean) 마태복음 (Mathew) 8:1-4
636 2015-07-19 주병열 목사 내가 원하노라 (I want) 디모데전서 2:8-15 (1 Timothy 2:8-15)
635 2015-10-18 주병열 목사 너 자신을 연단하라 (Train yourself) 디모데전서 (1 Timothy) 4:6-10
634 2017-03-05 주병열 목사 너는 복이 될지라 file 창세기 (Genesis) 12:1 - 5
633 2016-06-19 주병열 목사 너는 평안히 가라 (Go in Peace) 열왕기하 (2 Kings) 5:15-19
632 너를 당할 자 없으리라(수10:1-11) 2007. 4. 29 주일예배
631 2017-05-07 주병열 목사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 (You, your children, and their children) file 신명기 (Deuteronomy) 6:1 - 9
»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2-20) 2008. 11. 2 주일예배
Board Pagination Prev 1 ... 4 5 6 7 8 9 10 11 12 13 ... 41 Next
/ 41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