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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주신 예언의 말씀이지만, 실제로는 이사야가 활동했던 때보다 약 150년 정도 후의 상황을 배경으로 선포된 말씀으로 보여집니다. 3절에 “너희가 값없이 팔렸으니”라는 말씀과 5절에 “내 백성이 까닭없이 잡혀갔으니” 라는 말씀은 모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가 있는 상황을 암시합니다.

이사야서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메시야의 오심을 간접적으로 선포하면서 그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7절 말씀은 메시야가 오심으로 이런 일들이 일어날 것을 예언합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이처럼 메시야의 오심에 대한 예언은 주로 어둠의 시간에 선포되었습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둠 가운데 있을 때 사람들은 메시야의 오심을 더욱 더 간절히 사모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기에 선포된 말씀

그래서 바벨론의 포로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본문을 볼 때 본문은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1절입니다. “시온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힘을 낼지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민으로써 어려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어려운 노동의 고역을 감당해야만 했었습니다. 한 밤중에 그들은 피곤한 몸을 뒤척이며 깊은 잠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밤중에 선지자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힘을 낼지어다.” 그리고 아름다운 옷을 입으라고 말합니다. 바벨론이 멸망했고, 하나님은 우리 백성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셨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 소리가 얼마나 놀라운 선포였겠습니까?

포로민은 아무런 의욕도 없이 살아갑니다. 그들은 하라는 일만 하고 살아갑니다. 그들은 어떤 것을 계획할 수도 없었고, 아무 것도 자기 의지와 판단, 결정으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그들을 본향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부푼 꿈을 안고 먼 거리, 무려 4달 이상 걸려서 갈 수 있는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길은 힘든 길이었지만, 힘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은 자유인의 길이며, 은혜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2절에는 이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는 티끌을 털어 버릴지어다. 예루살렘이여 일어나 앉을지어다. 사로잡힌 딸 시온이여 네 목의 줄을 스스로 풀지어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이제 노동하며 옷에 묻었던 먼지를 털어버립니다. 이제까지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옷을 빨아 입을 힘도 의욕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그렇게 무력하지 않았습니다. 옷의 먼지를 떨어버리고, 목의 줄을 스스로 풀어버렸습니다.

성탄의 기쁨

아른 새벽 일어났지만, 단잠을 깨우는 소리에 잠이 깨었지만, 전혀 피곤하지 않았으며 전혀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성탄절을 두 주 앞두고, 대강절을 보내면서 우리가 누릴 기쁨은 바로 이런 기쁨입니다. 포로된 자가 해방될 때 누렸던 바로 그런 기쁨입니다. 이른 새벽 일어났지만, 그것으로 조금도 피곤해하지 않는 기쁨과 감격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성탄은 우리에게 그렇게 큰 기쁨을 가져다 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삶의 피곤과 어려움을 우리의 마음을 펴지 못하게 합니다. 삶의 지친 모습은 교회에 와도 여전히 지속됩니다. 그러나 본문의 상황을 잘 보십시다. 그들은 삶의 변화 때문에 기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해방의 소식을 듣고 기뻐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아직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성탄소식,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소식만으로도 기뻐할 수 있고, 또 기뻐해야 합니다.

내 백성은 내 이름을 알리라

오늘날 왜 우리에게는 성탄의 기쁨이 줄어들까요? 본문(4-5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은 커다란 세 가지 고난을 언급합니다. 애굽의 노예생활과 앗수르의 공격, 그리고 바벨론의 포로생활입니다. 구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사건 중에 하나는 애굽의 노예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홍해를 건너 구원하셨다는 말씀을 지속적으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왜 출애굽의 역사를 반복하실까요? 그 답을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내 백성은 내 이름을 알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당신의 이름을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러 가지 고난에서 구원하시면서 원하셨던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을 위해 끊임없이 계속 일하셨습니다. 노아의 방주, 아브라함의 이삭 번제 사건, 모세의 갈대 상자, 성전 동물 제사, 가나안 정복 사건 등 수많은 사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 없이 그냥 구원해 주시면 안 될까요?’ 출애굽기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에 보내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라는 명령을 하고 있는데, 이 때 모세가 자꾸 못하겠다고 거절을 합니다. 그러던 중에 모세가 하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그들이 누가 당신을 보냈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까요?’ 그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있는 자가 너를 보냈다고 하라.”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면 이스라엘 민족이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누구신지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칠 때 하나님이 어떤 존재이신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노아의 홍수 사건 때 노아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은 너무도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주시며, 온 천지를 물로 가득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죄악이 관영한 것을 용납하지 못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분의 뜻을 위해 세상을 물로 멸망시키시고 새롭게 노아를 통해 회복하실 계획을 이루실 분이셨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 하나님을 너무도 구체적으로 느끼고 경험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떤 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누구신지가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럴 때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이방신과 함께 섬겼습니다. 그들이 이방신을 섬겼다고 해서 그들이 하나님을 떠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을 돕는 신이 하나님이시든, 아니면 이방신이든 굳이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이었고, 타락이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에게 있지 않았고, 그들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 자신의 번영과 부유함에 대한 추구였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누구신가?

오늘 우리들은 어떨까요?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관심이 있습니까? 우리는 평소에 이런 생각들을 잘 하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나의 진로를 고민할 때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내가 좋은 배우자를 만나려고 할 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것은 그렇게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가 건강하게 크기를 원하는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우리가 병원을 갔는데, 암 4기 혹은 말기쯤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우리는 심각하게 고민할 것입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나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내가 믿는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신가? 이렇게 내가 고통과 두려움에 싸여 있는데 하나님은 나를 여전히 사랑하시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알아야 할까요?

우리는 대개 이런 고난 중에 있을 때만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고 묵상을 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을 알아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평강의 주인이시며, 우리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복음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죄에 빠져 불행해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 없는 구원의 역사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분 없는 평강이 가짜 평강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 평강의 주최를 알고, 그 구원의 주인을 알 때 우리가 진정한 평강을 맛볼 수 있고, 진정한 구원의 능력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역사를 포로민이 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장면을 본문에서 보여줍니다. 그래서 8절에 보면, 그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들을 이끌고 시온으로, 즉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시는 장면을, 그리고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쳐 보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성탄의 의미

성탄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사건을 축하하고 기뻐하는 절기입니다. 우리는 그분이 가져온 기쁨과 평강, 구원보다 먼저 그분을 알아야 합니다. 그분과의 관계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요14:9)고 하셨고,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요10:30)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말에 별 감흥을 받지 못합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그렇게 심각하게 와 닿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가져오시는 선물 보따리보다 그분 자신에 대해 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분과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을 좀 더 깊이 알아가고, 그분과 눈이 마주치는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의 나라의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분을 알 때

그분을 알 때 우리에게는 몇 가지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노래하는 것입니다. 9절 말씀입니다. “너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기쁜 소리를 내어 함께 노래할지어다.” 이사야 선지자는 포로에서 돌아오는 이들에게 기쁜 소리를 내어 함께 노래하라고 말씀합니다. 진정한 기쁨은 주님을 알아갈 때 나옵니다. 선물을 구하는 자의 기쁨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지만, 그분을 인격적으로 알아가는 자에게는 기쁨이 영원합니다.

둘째, 성경은 우리들에게 ‘거기서 떠나라’고 말씀합니다(11절). 바벨론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아는 자는 죄의 자리를 떠납니다. 포로지에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해 갑니다. 예루살렘까지 가는 길은 보통 4달 정도 걸리는 광야의 행군입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포로생활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길은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이런 고난을 감내하는 자들입니다. 그동안 살던 자리를 과감히 기꺼이 떠날 수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셋째 성경은 ‘스스로 정결하게 하라’고 명령합니다(11절하). 포로민의 삶은 지배자의 명령을 따라 사는 길입니다. 그들은 어떤 의욕도 없었기 때문에 하라는 대로만 하며 살았고, 밤이 되어 더러워진 옷을 빨 의욕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유인이 된 후에 그들의 삶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긴 여행길을 걸어오면서도 자유인으로서의 모습,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기 자리, 자기 모습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고, 삶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삶의 변화, 즉 예수님께서 성탄절에 주시는, 그의 손에 들려진 선물에 관심을 갖지만, 실은 그 전에 우리는 그분 자신을 보고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놀라운 삶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분 안에서 기뻐하고, 죄를 떠나고, 스스로 정결한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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