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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장면입니다. 당시 팔레스틴 지역은 먼지가 많은 곳이었기 때문에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면 반드시 발을 씻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정결 예식으로 인해 늘 손과 발을 씻는 일을 자주 행했습니다. 집에 들어오면 돌 항아리에 물이 담겨 있어서 언제든 씻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은 가장 낮은 급의 종들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특히 손님이 들어오면 종들이 손님의 발을 씻어주어야 했는데, 이런 일은 유대인 종들에게는 요구해서는 안 될 만큼 아주 비천한 일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식사를 위해 한 집에 가셨는데, 아무도 발을 씻어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스승이신 주님의 발을 씻어주는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스승의 발을 씻어줄 수는 있었겠지만, 다른 동료 제자들보다 더 급이 낮은 제자로 취급될까 싶은 염려가 그들에게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결국 주님께서 일어나셔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1절은 세 가지 중요한 점을 소개합니다. 첫 번째는 유월절 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본 사건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제 다음 날이면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주님의 발을 씻기는 행위는 당신의 죽음과 관련됩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셨다는 표현입니다. 자신의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돌아가시는 것은 아버지께서 정하신 일이라고 말합니다. 십자가는 주님에게 맡겨지신 사명이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일을 준비하고 있는 주님의 모습을 암시합니다.

세 번째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말씀은 시간적인 의미보다는 사랑의 정도, 사랑의 깊이, 사랑의 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제한이 없는 사랑, 끝이 없는 사랑, 조건 없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이런 사랑의 결정체였습니다. 그것은 쉽게 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랑의 한계는 바로 2절에서 가룟 유다를 사랑하는 것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이 말씀은 여러 가지 함축된 의미를 부여해 줍니다. 먼저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자리에 가룟 유다도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가룟 유다의 발을 제일 먼저 씻었을 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교부 크리소스톰는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의 발을 제일 먼저 씻겼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본문은 사실 의도적으로 그런 뉘앙스를 우리에게 충분히 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상황에서 가장 눈에 먼저 들어오는 것은 바로 그 자리에 가룟 유다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이미 그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이미 예수님을 배반할 것을 마음으로 결정하고 배신의 기회를 궁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미 가룟 유다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의 발을 먼저 씻기십니다. 주님은 가룟 유다까지도 사랑하셨습니다. 열 두 제자 모두 한심한 사람들이었지만, 그 중 더 형편없고 가장 악한 가룟 유다를 예수님께서 먼저 씻기셨다는 생각을 하면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사랑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주님에게서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왜 가룟 유다의 발을 먼저 씻겼을까요? 왜냐하면 가장 사랑하기 어려운 자를 먼저 사랑해야 전체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제자들 가운데서 정말 사랑할만한 제자의 발을 먼저 씻기셨다면, 가룟 유다를 씻기는 일은 어려운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랑이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진정한 사랑은 가장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을 먼저 사랑할 수 있어야 가능합니다. 이것이 바로 원수를 사랑하는 방법이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의도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면 모두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향해 배반의 칼을 품은 자를 먼저 사랑함으로 그를 품을 수 있으면 모든 문제는 끝이 납니다. 다 해결됩니다.


며칠 전(11일/목) 한국에 책과 삶으로 영향력을 많이 끼쳤던 법정 스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애도하였습니다. 종교를 초월해서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특별히 사람들이 존경한 것은 그가 무소유의 삶을 실천했다는 것입니다. 소유를 갖지 않음으로 오는 자유,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에 질문이 생겼습니다. 왜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애도할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를 애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는 두 가지 점을 나름대로 생각해 봤습니다.

하나는 그의 무소유 정신을 존경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마도 ‘인간의 행복이 소유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말씀하시듯이 인간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계셔야 하는데, 하나님이 없는 인간은 그 허무함을 채우기 위해 물질과 명예와 자기 욕구로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노력으로 빈 마음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기 삶의 경험을 통해 이미 그런 방법으로 영적 공허함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무소유의 삶을 살아가려고 무진 애를 쓰셨던 스님을 보면서 존경하고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그분 안에는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무엇인가가 있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하지만 두 번째 드는 생각(의문)은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존경한다면, 사람들은 그처럼 살기를 원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그냥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할 뿐입니다. 자신에게 없는 그 무엇인가가 그에게는 있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는 나머지 그 하나를 부러워하고 탐내는 것입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그 무소유의 삶을 통해 얻은 그 명예, 존경, 아름다움, 그 남은 하나조차 부러워하고 탐내는 것입니다. (제 생각이 너무 심한 비약일까요?) 현대인들의 탐욕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제자에 의해 적들에게 팔림을 당하고, 그 제자들에 의해 자기 스승을 모른다고 배반을 당하셨습니다. 철저하게 외면 당하시고, 철저하게 수치를 당하시고, 철저하게 무시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적어도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그분을 존경하고 따르고 그의 명예를 귀하게 여기고, 따른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불과 여인 몇 명이 그를 좇았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어떤 것입니까? 그분이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것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겸손하고, 얼마나 아름다운 섬김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름답나요? 그것이 정말 본받을만한 것일까요? 그것이 정말 우리가 본받고 싶은 모습입니까? 그런 주님의 모습처럼 우리도 섬기자고, 주님을 닮아가자고 말할 수 있습니까?

말을 그렇게 쉽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법정 스님의 길도 어려운 길이었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철저히 무시 당하고, 부서지고, 깨어지면서도 제자들의 발을, 아니 자기를 배반하여 유대인들에게 예수님 계신 곳을 알려주고, 잡힐 수밖에 없도록 고발한 그 제자의 발을 씻으셨고, 또 뿔뿔히 다 흩어지고,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할 그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것이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 5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5:43-44),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5:46-48)


우리는 어떻게 사랑합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감상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것을 보면서 감동만 받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정말 아름다운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모습이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그것을 보면서 내 안에 있는 겸손하지 못한 모습, 먼저 섬기지 못하는 이기적이고 추악하고, 다른 사람들과 얼마 안되는 키재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우리 안의 추함이 보이지 않나요? 주님의 이 모습을 단순히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정말 나쁘고 악한 마음 아닐까요? 우리 안에 그런 마음이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으로 하여금 계속 발을 씻게 해 놓고서는 감상하는 마음이 아닐까요?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주님께서 기대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를 향해 당신의 모습처럼 그렇게 수건을 겸손하게 허리에 묶고 다른 이의 발을 씻기는 삶을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냥 감상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가룟 유다에 대한 언급을 그를 비난하고 미워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것은 주후 95년입니다. 그 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지 60년 이상 지난 후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이미 오래 전에 스스로 목을 매 죽었습니다.

본문에서 가룟 유다에 대한 언급은 그를 미워하라는 뜻이 아니라, 그조차도 사랑하신 주님, 그의 발조차도 씻으신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원수를 사랑할 때 그 사랑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부족한 자를 향한 사랑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자신을 향해 배신의 칼을 품고 음모를 꾸미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향해 묵묵히 사랑의 행위를 하는 것이 진정으로 주님께서 기대하시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도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실체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우리는 진정으로 주님의 제자입니까? 우리교회는 진정으로 그런 사랑을 살아내려고 애쓰는 교회입니까? 아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사랑의 실체를 제대로 이해는 하고 있는 것입니까? 나와 생각이 다르고, 나와 마음을 맞출 없을 때조차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과 함께 하는 지체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의 발을 씻을 수 있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냐고 주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사랑하다가 지치신 분들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랑을 하면 마음을 열게 되고, 자기를 오픈하면 그렇게 열려진 마음으로 언제 칼이 들어올 지 모릅니다. 그래서 마음을 열면 다치기 쉽고, 사랑을 베풀다 보면 오히려 배반의 아픔을 겪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 사랑으로 살아보려고 애쓰다가 오히려 더 큰 상처로 인해 아파하고 힘들어 하는 분들을 때때로 볼 수 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주님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렇게 지치고 배반 당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걸어가신 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바로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사랑하는 것, 그렇게 끝까지 사랑하다가 그를 살리면서 내가 죽는 것, 그것이 바로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이런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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