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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이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던 날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나와 경배하던 것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때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이었습니다. 며칠 후면 예루살렘에 유월절이 시작됩니다. 이 때 이스라엘 전역과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 약 250만 명이 예루살렘으로 몰려듭니다.

예수님도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많은 사람들은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 믿고 모두들 자기들의 겉옷을 펴서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라고 하며 외쳤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 가까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 가까이 오시자 그 성을 바라보시며 우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그리고 주님은 예루살렘 성의 멸망을 예언하십니다. 때가 되면 원수들이 와서 토성을 쌓고 예루살렘 성을 사면으로 둘러 진치고, 그 가운데 있는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건은 주님께서 예언하신대로 주후 70년에 말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우리는 묘하게 중첩되어 보이는 두 가지 상황을 그릴 수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왕의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그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는 것은 균형이 맞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을 보면서 장차 예수님께서 예루살렘과 유다 백성을 로마 정부로부터 해방시킬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오랜 세월 메시야를 기다려온 가장 절대적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것을 계획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십니다. 그리고 새로운 나라를 꿈꾸고 계셨습니다. 주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사람의 욕심과 권력으로 통치되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곳은 사람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 나라는 오직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으로 다스려지는 나라입니다. 세속 정권의 힘으로 유지되는 나라는 그 힘에 의해 다시 멸망합니다. 예루살렘은 천년을 이어온 종교적 도시이며, 또한 정치적 도시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다스리는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은 필연적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새로운 나라를 이루어가셨습니다. 그 나라는 바로 주님의 사랑과 공의가 다스리는 나라며, 또한 겸손과 평강이 있는 나라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루살렘’이라는 도시는 ‘평화의 성’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름이 평화의 성이라고 이름이 붙여졌다고 해서 평화가 있는 도시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다스림과 지배를 계속적으로 구하는 도시여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새끼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장면은 정말 놀라운 사건입니다. 과거 예언자들은 말씀을 입으로 전하다가 그것이 어려울 때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행동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선포했습니다. 행위로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행위는 생각보다 더 강력한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말로 전한 메시지는 기억에서 사라지면서 없어지지만, 행위로 전한 메시지는 오래 오랜 사람들의 마음속에 기억됩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행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이것은 그 분이 왕이심을 드러내시는 사건입니다. 사람들도 예수님을 그렇게 알고 기대하면서 찬양했습니다. 그들은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그런데 왠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귀입니다. 나귀는 큰 나귀도 아니고, 그렇다고 짐을 실어보거나 사람을 태워본 나귀도 아닙니다. 그것은 한 번도 사람을 태워보지 못한 나귀 새끼였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을 태우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나귀 새끼는 익숙하게 예수님을 태우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왕으로서의 권위를 드러내기에는 매우 초라했을 것입니다. 나귀의 키도 크지 못했고, 그렇다고 숙련된 나귀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보통 왕들은 말을 타고 입성합니다. 말은 전쟁을 수행하는 왕에게 어울리는 것입니다. 말은 권위와 힘을 상징합니다. 왕도 평화 시에는 나귀를 탔습니다. 하지만 나귀보다는 말이 훨씬 더 어울렸습니다. 더욱이 지금의 상황에서 백성들이 원하는 것은 혁명입니다. 그럼으로 예수님께서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면 그것은 혁명을 일으키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 번도 타보지 못한 나귀 새끼는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백성들에게 두 가지 메시지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는 주님께서 만왕의 왕으로 지금 예루살렘에 입성한다는 사실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겸손하여 섬기는 왕으로서의 모습입니다. 나귀는 겸손을 상징합니다. 스가랴 9장 9절 말씀에 의하면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은 곧 자신을 겸손한 자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그 상황을 상상해 봅시다. 주님께서는 바로 오늘 종려주일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바로 자신들이 기다리고 기대하던 바로 그 메시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그리고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나귀 새끼의 등에 얹어 예수님으로 타게 하시고, 또 길 위에 깔아놓으므로 예수님의 나귀가 그것을 밟고 지나가도록 했습니다. 그들의 꿈은 예수님께서 바로 이 썩어버린 시대를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아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손에 잡히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들은 수십만, 아니 수백만 사람들이 움집한 가운데 예루살렘으로 나귀 타시고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 보았습니다. 그 모습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너무도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모든 것은 끝이 났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도 잊혀져 갔습니다. 예수님은 빠르게 잊혀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들은 주님의 나귀 새끼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주님을 태우고 가던 나귀 새끼는 처음 사람을 태우는 나귀였습니다. 제대로 걷지도 못했습니다. 왠지 서툰 모습이었습니다. 수많은 군중들의 함성과 분위기로 인해 바로 그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분위기를 바꾸고, 로마의 권력을 뒤엎을 세속 권력을 가지신 분으로 오셨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 사람들은 그 때의 예수님의 모습을 다시 그리고 있습니다. 그냥 잊으려고 했지만, 어느 순간 다시 떠오르는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합니다.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과 자기들이 기대하던 예수님, 즉 예루살렘의 입성과 더불어 일어난 로마정권을 타도하고,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무너뜨리시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가실 예수님과 무참히, 힘없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을 그려보면서 그들은 뭔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한 번도 타보지 못한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왕 되심은 정치적 권력자로서의 왕이 아니었음을 알았습니다. 자기들의 욕망을 채우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처음부터 예루살렘을 정치적으로 지배하셔서 새로운 정권을 만드실 계획은 아니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놀라운 발견입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음을 깨달아 갑니다. 만약 주님께서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하셨더라면 주님은 나귀 새끼를 타지 않으시고, 아마도 말을 타셨을 것입니다. 주님은 평강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고난 받는 종으로, 섬기는 종으로, 평강의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마태와 마가와 누가복음은 동일하게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구하는 장면을 그려줍니다. 그것은 이 종려주일 일어난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사건으로 우리에게 계시해 줍니다. 나귀 새끼를 구하는 상황에서 등장하는 세 부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하나는 두 제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건너편 마을로 가서 아무도 타보지 못한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풀어오게 됩니다.

두 번째는 나귀 새끼의 주인입니다. 나귀 새끼의 주인은 영문도 모르고 제자들이 나귀 새끼를 풀어가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어찌하여 푸느냐’라고 물었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쳐준 대로 ‘주께서 쓰시겠다’고 대답합니다. 이 말을 들은 나귀 새끼 주인은 더 이상 아무 말도 없이 나귀 새끼를 풀어가는 것을 허락합니다.

세 번째는 나귀 새끼입니다. 나귀 새끼는 정말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갑니다. 나귀 새끼는 아직까지 아무도 태워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태우게 됩니다. 사람들의 환호를 들으며 예수님을 태우고 예루살렘 성을 향해 들어갔습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과 나귀 새끼의 삶을 살펴보면, 이들 중 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이유를 모른 채 주님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나귀 새끼의 주인도 이유를 모른 채 나귀 새끼를 내어주었습니다. 나귀 새끼 자신도 이유 없이 주인 아닌 다른 사람을 태우고 갑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이들에게 있어서 주님의 왕 되심을 선언하고, 그것은 권력과 힘으로 오는 왕이 아니라 평강의 왕으로 오시는 주님을 준비하는 일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 상황에서 주님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바로 예수님의 두 제자들이었고, 나귀 새끼의 주인이었고, 나귀 새끼 자신이었습니다. 나귀 새끼는 스스로를 알았습니다. 자기는 아직 왕을 모실만한 나귀가 되지 못합니다. 사람을 태우는데 익숙하지도 못합니다. 예수님을 태우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면서 몇 번이나 넘어질 뻔 한 자신을 보면서 예수님께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릅니다. 나귀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분은 분명 세상에 일반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그런 왕은 아니실거야! 아마 그런 왕이었다면 이렇게 서툴게 걸어가는 자신을 그냥 두지 않았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귀 새끼는 주님께서 평강의 왕으로 오신 분이심을 알았습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화려하게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그리고 그런 예수님을 기대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을 향해 입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찬양합니다. 하지만 그들 중에 진정으로 주님께서 평강의 왕이심을 보는 사람이 얼마나 되었을까요? 주님께서 한 번도 타보지 못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모습에서 진정한 주님의 모습을 보는 사람이 얼마나 되었을까요? 주님을 바로 알지 못한 사람들은 불과 며칠 안 되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에 소리치며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만큼 교회의 가치가 땅바닥에 굴러다닌 적은 별로 없었습니다. 복음의 능력을 말하기에는 너무도 부끄러운 현실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보여지지 않습니다. 모두가 화려하게 예루살렘을 향해 들어가는 예수님만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예수님께서 지금 한 번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 그래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그런 초라한 나귀를 태시고 들어가시는 예수님의 겸손함을 보지 못하거나, 아니면 애써 외면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나귀 새끼를 타시고 중심도 제대로 집힐 힘들만큼 힘겹게 타고 가시는 예수님이 보이십니까?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이 느껴지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나귀를 타고 왕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예수께서 오셨으니 이제 새 나라가 세워질거야.’  ‘예수께서 오셨으니 저 원수 같은 로마 권력을 부숴 버릴 꺼야.’ ‘예수께서 오셨으니 악한 예루살렘의 종교적 귀족층들을 멸하실거야.’ 그런데 주님은 그만 며칠 못가서 십자가에 죽고 맙니다.

돌아보니 주님이 타고 가신 짐승은 전쟁터에서 타고 달리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그런 싸움판에 뛰어들 계획이 없으셨습니다. 주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겸손한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평강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며칠 만에 다 꺼져버릴 소망을 추구하는 자가 아니라 나귀 타고 입성하신 주님,’ 그 주님을 바라보는 성도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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