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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셨다고 고백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다면 하나님께서는 틀림없이 앞으로도 우리를 지키시고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믿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장래에 대해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염려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평안과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를 믿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안과 두려움이 있고, 장래의 일들에 대해 근심하는 마음이 있다면 우리의 믿음을 다시 한 번 점검해 봐야 합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서 어떤 분들이 이렇게 마음 속으로 말할지 모릅니다. ‘그거야 원론이지’ ‘본래 삶이란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다.’ ‘세상에 나가보면 현실은 많이 다르다.’

맞습니다. 이런 말은 원론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단지 원론만을 말씀합니다. 말씀을 그대로 믿으면 그런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원론이라고 말해 버리면, 그리고 실제의 삶은 많이 다르다고 말해 버려면, 성경의 모든 약속을 우리 앞에서 무의미해지고 맙니다.


본문에는 보아스라는 당시 베들레헴의 유력자가 나옵니다. 이 사람은 룻과 나오미에게 큰 은혜를 베풀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사랑과 자비를 베풀고 있습니다. 율법이 다스리는 시대에 그는 은혜를 알았고, 엄격한 법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기 어려운 사사시대에 그는 법을 넘어선 은혜의 원리를 따라 산 사람입니다. 말씀이 보아스에게서 사실이 되었고, 복이 되었습니다. 원론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말씀이 보아스 안에서 현실적인 약속의 성취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약속을 잡아야 합니다.

18절에 보면, 나오미는 보아스에 대해 “그가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보아스에게 하나님의 성품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 하나님이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일을 성취하기까지 결코 쉬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아시야 62장 1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시온의 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우리 하나님은 쉬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사실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분과 보조를 맞추면 됩니다. 그분이 하시는대로 따라 가면 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다는 말은 그분과 보조를 잘 맞추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어렸을 때 부모님 손을 잡고 밤 거리를 다녀본 적이 있으신 분들은 기억할 것입니다. 부모님의 손을 잡은 것만으로 어린아이는 충분합니다. 어디로 갈 것인지, 어느 정도의 보폭으로 갈 것인지 뒤에서 어떤 발자국 소리가 들리든지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아빠의 손만 잡으면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발걸음입니다. 단지 할 것은 아빠의 손을 꼭 잡는 것입니다. 아빠의 지시를 따르는 것입니다. 아빠가 하자는 대로 하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안전과 미래의 소망과 평안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책임지실 분은 내가 아니라 아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그렇게 동행하며 살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원론이 현실이 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룻과 나오미는 그런 마음으로 보아스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보아스를 통해 인도받는 모습을 보면서 성경은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어떻게 받으며 살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 수 있겠습니까?


첫 번째, 원론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신뢰가 필요합니다.

룻은 보아스를 신뢰했습니다. 한 밤 중에 룻이 타작 마당으로 보아스를 찾아왔습니다. 보아스는 룻의 마음을 금방 읽었습니다. 룻은 거리의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현숙한 여인이었습니다. 나오미는 룻으로 하여금 밤에 그곳에서 머물게 한 후 이른 새벽, 서로를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어두울 때 타작 마당에서 나가도록 말합니다. 그것은 룻을 위한 조치였습니다. 괜한 소문은 룻을 어렵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보아스는 룻으로 하여금 이른 새벽 집으로 돌아가도록 지시합니다.

하지만 룻은 달리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룻은 다소 적극적인 여자였던 것 같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다소 무모한 면도 있어 보이는 여자였습니다. 모압에서 이스라엘로 오는 것이나, 나오미의 명령을 따라 기꺼이 보아스에게 가는 것을 보면 이 여인은 상당히 용기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생각을 앞세울 수 있었습니다. 룻은 아마도 이 소문이 나면 보아스가 결국 자신과 결혼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당시 율법에는 남자가 여자를 범하면, 그 여자와 결혼해야 하는 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룻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룻은 보아스의 명령을 철저히 따랐습니다. 왜냐하면 룻은 보아스를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일단 신뢰하고 나니 그의 판단, 결정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늘은 그 반대로 예수를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지만, 머리로는 배우면서도 여전히 가슴으로는 동의하지 않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성경말씀을이 일리는 있는데, 마음으로 신뢰가 되지 않습니다. 상황은 그렇지 않아고 말합니다. 현실은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기 어려운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원론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멀게 느껴집니다. 말씀을 들을 땐 언제나 고개를 끄덕끄덕하지만, 삶의 현장으로 돌아오면 말씀은 멀어진 하나의 이론이 되어버립니다. 세상은 점점 살기 어려워지고 있고, 그 안에서 우리는 허덕이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신뢰가 안되기 때문입니다. 보아스가 룻을 살려줄 수 있는 힘이 이싸는 것은 믿지만, 정말 보아스가 그럴 의사가 있을까 하는 확신은 안 듭니다. 그래서 성경도 세상의 논리를 따라 선포됩니다. 그래서 설교도 설득이라고 표현합니다. 즉 설교는 설득력 있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 말입니다.

두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설득은 인간에게 하나님을 변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인간에게 변호하는 것이 설교(설득)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둘째 설교를 설득이라고 말할 때 그 말은 설교 내용이 인간이 생각하기에도 맞는다는 동의를 얻으려는 것입니다. 설득이란 말은 맞지만, 잘못된 이유는 이렇습니다. 설득이라는 말은 그 내용이 인간이 생각하기에도 맞는다는 동의를 얻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논리에 따라 말씀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설득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설득이기 전에, 선포입니다. 우리는 말씀 앞에 설득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순종은 없고, 자신을 납득해 보려고 말합니다.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장차 고난을 받고,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하게 될 것과 삼일 후에 부활할 것을 말씀했을 때 베드로가 이를 만류했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베드로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왜 죽어야 합니까? 죽을 필요도 없고, 죽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생각이며, 모든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논리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분명 베드로가 예수님을 많이 사랑하고 생각해서 한 말이었습니다. 이것은 제자로써 스승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를 책망합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책망하셨습니다. 책망의 이유는 베드로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베드로가 사람의 논리를 따라 판단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논리로는 베드로의 말이 맞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이런 말씀을 하셔도 인간으로서의 제자는 예수님의 죽음을 만류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베드로를 향해 ‘사탄’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인간의 논리와 지혜로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입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미 태초에 정하신 예정입니다. 이것을 설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선포입니다.

저는 설득이라는 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설득도 필요합니다. 광신자처럼 무조건 믿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설득 이전에 선포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믿음은 신뢰를 의미합니다. 신뢰란 어떤 것을 설득하기 전에, 즉 어떤 것이 논리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전에 그 대상을 믿기 때문에 그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에는 반드시 이 단계가 필요합니다. 신뢰의 단계가 필요합니다. 내 것을 다 맡길 수 있을만큼 그분을 신뢰하는 마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온전하게 믿을 수 없고, 믿음의 능력을 맛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신뢰할 때,  비로소 진정한 안식과 위로를 얻게 됩니다. 주님을 믿고 신뢰할 때, 그리고 그 안에서 순종할 때 비로서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서, 우리를 위해서 일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고 신뢰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은혜와 능력을 얻는 길입니다. 이런 은혜가 충만하시길 축복합니다.



두 번째, 원론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용서와 관계의 회복이 필요합니다.

룻은 시어미니를 사랑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다섯 절인데, 그 중에 세 절이 나오미와 관련된 말씀입니다. 룻은 보아스의 배려로 보리를 많이 얻어서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가져 갑니다. 룻은 나오미를 엄청 사랑했습니다. 물론 그것을 아는 보아스도 나오미에게 보리를 갔다 주도록 배려했습니다.

룻이 나오미를 이렇게 사랑하고 섬기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점입니다. 룻은 왜 무엇 때문에 나오미를 따라 왔으며 그렇게 나오미를 섬기고 있는 것입니까? 물론 앞에서 1장을 볼 때 우리는 룻이 나오미를 따라온 이유를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는 나오미를 통해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1:16)”

그렇습니다. 룻은 하나님을 이미 만났습니다. 룻이 나오미를 따라 나선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룻은 하나님을 만났고, 또 나오미를 사랑했습니다. 떨어질 수 없는 관계로 묶여졌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시어머니와 며느리 관계가 이렇게 붙을 수 있는 관계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도 남편이 죽은 상황에서 말입니다. 이것은 흔하지 않는 현상입니다.


요즘 한국에 아파트 이름이 복잡하고 읽기 어려운 영어를 많이 사용한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삼성, 현대, 롯데 아파트 등이었는데, 요즘은 타워팰리스, 미켈란쉐르빌, 아카데미 스위트, 현대 하이케리온 등의 이름을 사용합니다. 어떤 사람이 이름을 그렇게 어렵게 짓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봤더니 시어미니가 찾아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랍니다. 말을 만든 것이겠지만, 시대를 풍자한 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사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이토록 중요합니까?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고, 이웃과의 관계가 형통하지 못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복되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자신과 이웃과의 관계는 뗄 수 없는 역학관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인간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소홀히 합니다. 이 양자 사이를 서로 무관하게 봅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예물을 제단이 드리다가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예배를 드리기 전에 먼저 형제에게 원망들을만한 것을 해결하고 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즉각적인 회개를 촉구하는 것입니다. 즉각적인 회개는 매우 중요합니다.

즉각적인 회개가 중요한 이유는 즉각적으로 회개하지 않는 죄는 그 죄가 의도적인 죄라는 점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복해서 같은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반복적인 같은 죄를 짓는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가 ‘약’해서 그럴 수 있습니다. 즉 용납될 수 있습니다. 회개하면 용서하십니다. 매일 같은 죄를 범하고 다시 회개해도 주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그러나 즉각적인 회개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예배하는 것은 의도적인 죄가 됩니다. 그것은 죄를 회개할 의사가 없는 것을 말하며, 앞으로도 그런 죄를 지을 의도가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성도와 불화했습니다. 마음이 불편합니다. 하지만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용서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생각할 때는 불편해서 용서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예배를 드리러 나와서도 여전히 그 마음을 가진 채 화해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동일한 상황이 일어날 때 동일하게 불화하고 반복할 의사가 그대로 있다는는 것을 말합니다.

반복적인 죄는 약해서 짓는 죄일 수 있지만, 즉각적인 회개가 없는 것은 의도적인 죄이기 때문에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와 화목하지 않고, 용서를 구하지 않은 상태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결코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 새로운 어떤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자체가 곧 믿음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부족할 때, 잘못했을 때, 형제에게 원망들을만한 일이 생각났을 때 얼마든지 용서를 구하고, 화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용서를 구하고 화목하는 것은 그 일이 쉽고 어려움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의 본질의 문제입니다. 정말 믿으면 용서를 구할 수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신뢰하면 화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룻에게 왜 이렇게 놀라운 길을 열어주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룻이 올바른 예배자였기 때문입니다. 룻은 나오미를 사랑했습니다. 시어머니를 사랑했습니다. 정말 사랑했습니다. 온힘으로 나오미를 사랑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삶이 형통한 이유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쉽게 소홀히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보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결단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세 번째, 원론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18절에서 시어미니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에 시어미니가 이르되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알기까지 앉아 있으라.” 기다림입니다. 시어머니는 보아스의 타작 마당에서 돌아온 룻에게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알기까지 앉아 있으라고 말씀합니다. 기다림에 대해 말씀합니다.

저는 기다림이 신앙의 백미라고 생각합니다. 기다림은 어떤 면에서 인내입니다. 그러나 기다리는 동안 우리에게는 안식하는 복을 누립니다. 룻은 그동안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모든 것을 해 놓고, 보아스가 답을 주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 어려운 일들이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미의 말을 다시 한 번 잘 보십시오.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알기까지 앉아 있으라.”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룻과 나오미는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결정할 사항도 아니고, 그들의 의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보아스의 처분에 맡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 불안해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런 상황에 처하면 염려합니다. 사실 이런 기다림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어떤 길이든 결정되기 전까지는 마음의 평안을 갖지 못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이 때가 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본문의 의미를 보십시오.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알기까지 앉아 있으라.” 앉아 있으라고 합니다. 이제는 앉아 기다리는 일만 남았습니다. 쉴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간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때 쉬지 못합니다. 가장 불안하고 염려하는 시간입니다. 학교에 원서를 제출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직장에 입사 원서를 내놓고 합격 통지를 받을 때까지, 인턴이나 job을 구하면서 답을 기다리는 시간들, 이런 시간들은 우리에게는 대부분 견딜 수 없을만큼 힘들고 어려운 시간입니다.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이런 상황에서 쉼을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 여부에 따라 달라집니다. 룻은 결코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보아스는 룻이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의 길이 없었습니다. 보아스가 못하는 것은 누구도 못하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에서 보아스 이상으로 룻을 도와줄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마치 그런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영원히 의지할 분이시고, 우리가 가장 신뢰할만한 분이십니다. 그분이 하지 못하실 일은 누구도 못하시고, 그분 이상으로 우리가 의지할 존재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믿음은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을 믿기 때문에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기 때문에 그 시간을 즐길 수 있는 것입니다. 기다릴 수 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그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노래하며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은혜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분을 믿기 때문에 그 시간에 안식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런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그분 안에서, 그분을 신뢰함으로 그분의 답을 기다리며, 기뻐하며, 여유를 갖고, 안식하는 것입니다. 마치 다니엘이 사자굴 속에서 여유 있게 하루 밤을 보냈던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그것이 그렇게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믿음은 기다림입니다. 이 기다림은 지루하거나 불안하거나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이 기다림은 기쁨이고, 여유이고, 안식입니다. 이런 안식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결론

성도는 원론이 삶(현실)이 되는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분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의 것을 다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관계의 회복과 이웃 사랑의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용서하지 않고, 화해하지 않는 것은 주님 앞에 진실한 예배자가 아님을 그 자체로 증명해 줍니다. 정말 뜨겁게, 미치도록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용서와 화해가 있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예배만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드려집니다.

마지막으로 기다림입니다. 내 인생을 주님께서 어떻게 만들어가실지 몰라도 우리는 그분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일하시는 동안 우리는 기다리면서 안식하고, 기뻐하고, 여유를 즐길 수 있습니다. 불확실한 미래를 앞에서도 주님과 함께 하는 자는 가장 큰 안식과 기쁨을 누립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룻의 삶처럼 우리에게도 이런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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