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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 믿어야 구원 받는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를 3년 간 따라다닌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밤을 보내면서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워했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에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믿지 않고 있었거나, 그들의 믿음은 불완전했었음습니다.

9절에서 예수님은 빌립에게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라고 반문하셨습니다. 안다는 것은 그냥 지적인 정보를 기억하고 있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녔지만, 예수님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피상적인 것들만 보았습니다.

10절에 가면 예수님은 다시 제자들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당연히 자기 스승을 믿어야 했음직한 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제자들은 예수님을 잘 알지 못했고, 믿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아는 것과 믿음은 동의어입니다. 믿음이란 아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단지 어떤 사실에 대해 동의하는 것만도 아닙니다. 믿음은 그냥 입으로 예수를 믿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만도 아닙니다. 믿음은 경험과 느낌과 보는 것을 넘어섭니다.

믿음은 그분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전적으로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며, 그분께 나의 삶의 전존재를 의지하고 의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 안에 들어가는 것이며, 그분이 그리고 그분의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런 면에서 믿음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제자들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셨습니다. 주님의 남은 사역은 제자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사역을 맡기시면서 주님은 본문의 말씀을 제자들엑 하셨습니다. 12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실제로 제자들은 에수님을 바르게 알고 믿은 후 예수님처럼 사역했고, 또 어떤 면에서는 예수님보다 더 큰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앉은뱅이를 고치셨는데(마11:5, 눅7:22), 베드로도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를 고쳤고(행3장), 바울도 루스두라에서 발을 쓰지 못하는 앉으뱅이를 치유했습니다(행14장).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것처럼 사도들도 귀신을 쫓아냈고(행5:16). 또한 바울도 점하는 귀신 들린 여종을 고쳤습니다(행16장). 예수님께서 죽은 자(과부의 아들, 회당장 야이로의 딸, 나사로) 를 살리셨는데, 베드로도 욥바에 도르가를 살렸고(행9장) 바울은 드로아에서 유두고를 살렸습니다(행20장). 제자들은 참으로 주님께서 행하신 사역을 그대로 행했습니다. 주님의 능력은 제자들에게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주님의 말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주님은 사실 33년 동안 사시면서 팔레스틴을 벗어난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분은 불과 남북으로 100마일, 동서로 40마일의 한계 안에서 사셨습니다. 그분은 대부분 유대인들만 상대하셨고, 말씀 선포도 유대인들에게 한정하셨습니다. 더욱이 때때로 이방인을 만나게 되면 당신의 능력 행하심을 꺼리기조차 하셨습니다. 그분의 사역은 놀라웠지만, 후에 제자들이 행한 사역에 비하면 미비했습니다.

제자들은 놀랍게 사역했습니다. 예수님은 오천명을 먹이시고도, 다 뿔뿔이 흩어졌지만, 베드로는 한 번의 설교로 삼 천 명을 회개시켰습니다. 제자들은 이방인 지역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소아시아와 유럽까지 복음을 들고 갔고, 지금은 온 세상에 복음이 안들어간 곳이 없을만큼 위대한 복음 전도의 역사는 이어졌습니다. 복음은 또한 가는 곳곳마다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일으켰고, 변화의 가져왔습니다. 남녀차별, 노예 해방, 각 가지 삶의 문제들을 변화시켜왔습니다.

물론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본질적이고 질적인 면에서 주님이 행하신 일보다 더 큰 일이라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아무리 더 큰 일들을 행했다고 해도 그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구원의 역사 위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모든 역사는 주님의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님께서 생명의 씨앗을 뿌렸고, 제자들은 물을 주고 가꾸고 거두는 일을 했습니다. 가꾸는 자가 아무리 열심해 해도 생명의 씨앗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가꾸고 키우고 열매를 거두는 일은 언제나 씨앗에 의존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교만할 수도 없으며, 자랑할 일도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주님의 일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됩니다. 제자들이 그것을 보여주었고 기독교 역사가 증명합니다. 그러므로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 우리의 인생 계획을 맡긴다면 우리는 너무도 놀라운 역사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기도 하고, 더 넓은 곳을 다니며 주를 위해 일하게도 하십니다. 더 많은 재물을 통해 일하게도 하시고, 더 좋은 은사를 통해 일하게도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주님을 믿으면 그렇게 하시겠다고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이 무엇인가? 참 믿음은 어떤 것인가? ‘내가 네 안에 거하고, 네가 내 안에 거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항상 생각하며 믿음 안에 거하는 성도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이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사역을 제자들에게 맡기실 준비를 하시면서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3절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그분이 행하십니다.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일을 행하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여전히 주님이십니다. 다만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서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는 제자들과 “함께”하셨습니다. 아니 사실은 주님께서 거의 대부분 혼자 하신 것이고, 제자들은 옆에서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은 제자들을 통해서, 제자들의 손과 발과 입과 믿음과 마음을 사용하셔서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병을 고친다고 해도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위대한 일을 행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근본적으로 주님께서 행하신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통해 일하신다는 사실로 인해 우리는 감사할 뿐입니다.

사도행전 3장에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치유하는 장면이 나온다.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고쳤다. 많은 사람들이 놀라 두 사도를 주목하고 몰려들었다. 이 때 사도 베드로가 이렇게 말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이것이 지금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요지이다. 베드로가 이 일을 행한 것이 아나라 그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으로 이루어진 일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 개인의 권능이나 경건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경건해야 합니다. 마땅히 기도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기도했습니다. 경건했습니다. 사실 그래서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만약 베드로가 기도도 하지 않고, 경건한 삶도 살지 않는데, 하나님께서 뭐가 아쉽다고 그를 통해 역사하시겠습니까? 경건과 기도는 주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통로였습니다. 그것은 능력의 원천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일하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심판 때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어떤 사람들은 천국 문에 서서 이렇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이 때 주님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이것은 엄밀히 말해서 그들이 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했다는 것은 그 모든 일이 주님께서 행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행했다고 말하면서도 그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공로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에서 개인의 경건과 기도를 마치 공로처럼 여기는 일은 오늘의 교회에서도 여전히 있습니다. 교회가 개인의 경건을 자랑하는 것은 치명적인 잘못입니다. 내가 기도해서 됐다는 것입니다. 누가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좀 아프다가 나면  내가 기도해서 됐다는 것입니다. 기도해 주는 것은 좋고 감사한 일이지만,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신다는 믿음의 고백을 한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런 의미만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고, 하나님께서는 행하십니다. 우리는 철저히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기도는 공로가 아닙니다. 기도는 마땅한 것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믿음이 곧 능력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행하십니다. 이것은 놀라운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붙들고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인생을 허락하십니다. 이 은혜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놀라운 일을 이루시는데,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라”고 하시는데, 그 일은 첫 번째로는 믿음을 통해 행하시는 것이고, 두 번째는 기도를 통해 행하신다고 하셨고, 그리고 세 번째는 사랑을 통해 행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15절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사랑이 아니면 주님의 일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의 복음을 지난 2천년 동안 강력하게 전파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주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알지 못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사랑으로 행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전혀, 조금도 복음의 진보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15절을 다시 봅시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여기서 ‘계명을 지키리라’는 말씀은 명령형이 아니라, 서술형이고, 미래형입니다. 즉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조건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계명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3장 34-35절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방금 이 다락방에서 처음 말씀을 시작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내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서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주님의 계명은 사랑입니다. 즉 15절 말씀을 다시 보면 그 의미는 이렇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 즉 서로 사랑하는 일을 행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웃을, 인간을, 원수를, 미워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사랑하게 되라라, 즉 미래형이며 그러기에 약속의 의미를 담긴 이 말씀의 의미는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겠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요? 주님을 사랑하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사랑하면 주님의 계명, 즉 이웃을 사랑할 힘도 주신다는 것입니다. 즉 원수도 사랑하고, 미운 사람도 사랑하게 되고, 배신 당하면서도 사랑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다시 뒤집으면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아직도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도 모르고, 주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때 그 의미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보기만 해도 사랑스럽고, 사랑하고 싶어서 사랑할 수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사랑할만하지 않은데, 사랑하고 싶지 않은데, 주님께서 저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래서 사랑한다는 뜻이 될 수 있습니다.

결혼한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 일은 쉽고도 어려운 일입니다. 서로 사랑해서 결혼한 것이기 때문에 부부간의 사랑은 당연한 것이지만, 개개인의 마음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없으면 부부간에도 여전히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의 정수, 사랑의 원본을 보고 경험하고 알아야 그런 사랑에 다다를 수 있는데, 그 사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는데, 주님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남편과 아내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평생 왠수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Father’s Day입니다. 남편을,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십시오. 그러나 그 전에 주님을 사랑하는지를 살펴보라.

이웃 사랑의 조건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힘들 때 스스로 조용히 살펴보십시오. 내가 정말로 주님을 사랑하는가 말입니다. 주님과의 사랑의 채널이 바르게 연결된 사람은 미운 사람도 사랑하게 되고,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의 뿌리는 주님께로 돌아가는 것이고, 그분으로부터 사랑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사랑은 일생의 과제입니다. 사랑하는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서로 사랑하지 않고 살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입니다. 서로 인사합시다. 주님 안에서 사랑합니다. 주님 안에서 의지적으로 사랑합니다. 예, 의지적으로 사랑하십시오. 육체의 본성을 이기십시오. 죄악의 본성에 노예가 되지 마십시오. 본능을 따라 사는 것은 동물입니다. 인간은 동물적이지만, 동물을 넘어섭니다.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에 가장 가까운 모습은 사랑입니다. 사랑하기를 힘쓰십시오.

자기 감정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실수할 수 있지만,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할 수 있지만, 나는 다혈질이야. 라고 말해 버리면 되는 것입니까? 뭐 다혈질이 단가요? 다혈질은 아무 때나 화내도 됩니까? 우울증이라고 하면 살인을 해도 죄가 안되고, 오히려 동정을 받아야 되는 이런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 이상한 세상입니다. 우리는 남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용서는 사람을 새롭게 세워줍니다. 사랑이 위대한 일을 이룹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할 때, 그 사랑 안에서 주님은 위대한 일을 행하십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리보타 주님의 말씀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하나님을 사랑하면 다 극복됩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수는 없어도 주님을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 그 사랑을 기억하며 주님을 사랑할 때, 우리를 사랑할 수 없었던 원수까지도 사랑할 힘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약속입니다. 그 분 안에 거할 때, 그분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주님의 행하신 일, 아니 그보다 큰 일까지 행하게 하시는 주님의 약속을 얻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믿음입니다. 둘째는 기도입니다. 셋째는 사랑입니다. 이 세 가지가 주님의 위대한 일에 참여하는 놀라운 역사를 이룬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에 참여하는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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