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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는 본래 지극히 세속적인 도시였었지만, 교린도교회가 겪은 어려움은 잘못된 유대주의적 율법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은 것 때문이었습니다. 복음을 바르게 믿고 바르게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복음으로 바르게 훈련되어야 할 이유는 잘못된 복음이 우리 자신과 교회를 불행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할 때 항상 악한 사단이 배후에서 우리를 유혹하고 넘어지게 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고린도교회는 잘못된 복음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악한 거짓 선지자들이 고린도 교회에 침투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마음을 빼앗아 갔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중심을 잃어갔고,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을 배척했고, 불신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진짜보다는 가짜가 매력적일 때가 많습니다. 본문은 16절부터 봐야 합니다. 16절 이하를 보면 좀 더 구체적인 상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19-20절입니다. “너희가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 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구나.”

고린도교회의 분위기를 잘 이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다른 성경(공동번역)은 이 말씀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 어리석은 사람들을 그렇게도 잘 받아 주니 여러분은 어지간히도 똑똑합니다. 누가 여러분을 종으로 삼아도 그만, 잡아 먹어도 그만, 착취해도 그만, 깔보아도 그만, 뺨을 쳐도 그만, 여러분은 그저 참아 주기만 하니 말입니다.” 여기에는 빈정거리는 듯한 분위기가 다분이 깔려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와서 너희를 종으로 삼아도 그냥 아무 생각없이 따라가는 종과 같은 모습을 그려줍니다. 잡아 먹어도 그만입니다. 착취해도 그만이고, 깔보거나 심지어 뺨을 쳐도 그만이라고 말합니다. 참 잘 참아준다고 말합니다. 거짓 선지자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귀에 솔깃한 말로 현혹했습니다.그리고 바울을 자유주의자라고 몰아붙였습니다.

본래 참 진리는 받아들이기 힘든 법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첨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섰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 앞으로 오다가도 때로는 자신의 약점을 감추기를 원합니다. 의도적인 타협선을 찾기 원합니다. 신앙적인 노력도 적당한 선에서 멈추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에게 그런 타협은 없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이것이 항상 바울이 서 있는 자리였습니다. 그가 전하는 말씀은 항상 종말적이었습니다. 항상 깨어있어야 했습니다. 그는 복음이 타협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복음에 불순물이 들어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항상 말씀 그대로 믿기를 결단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때때로 복음의 본질을 희석시킵니다. 그리고 물을 탑니다. 그런데 그렇게 복음을 잘못 전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고린도교회에서 인기를 얻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인기를 얻는다는데 초점이 있지 않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말씀을 떠나고 있다는데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은 말씀으로 훈련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 점은 우리 모두에게서도 동일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은 말씀을 떠나고 있습니다.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귀에 듣기 좋은 말로 현란하게 속이고 있는 거짓 선지자들로 인해 고린도교회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교회가 바르게 가고 있는지 아닌지, 건강한지 아닌지를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기준은 교회의 거룩함과 연합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성도들에게 거룩하려는 열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  건강한 교회의 첫 번째 증거입니다. 말씀과 기도에 대한 열정이 있고, 훈련받으려는 열망을 가지고 있을 때 건강한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연합입니다. 다른 성도를 돌아보는 마음입니다. 갈등과 비판을 자제하고 이해하고 용납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런 기준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과 교회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이런 점에서 매우 어려운 상황으로 몰려가고 있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바울과 고린도교회 성도들 사이를 이간시킬 뿐만 아니라, 고린도교회 성도들 자체를 잘못된 복음에 서도록 유혹하였습니다. 여기서 거짓 선지자들은 자신의 우월함을 자랑했습니다. 자신들의 화술과 비위를 맞추는 그들의 선포는 정도를 넘어섰음에 틀림없습니다. 전에 들어보지 못한 재미있는 말과 귀를 즐겁게 하는 그들의 설교는 그들의 마음을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사도 바울을 깍아내립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말씀을 전하지 안았습니다. 사실 바울은 고린도에 있을 때 매우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그는 아마도 아덴에서의 쓰라린 경험으로 인해 고린도에서는 매우 힘들고 어려운 시간들을 보냅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말하듯이 그는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전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인간적인 수사학을 가급적 자제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무미건조할만큼 딱딱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말씀 그 자체로 교회를 세워갔습니다. 그런 말씀은 듣기 힘든 것 같아도 사실은 교회를 세상 속에 동화되지 않게 하며 바르고 든든히 세우는 길입니다.

하지만 고린도교회는 거짓선지자들의 점점 복음의 능력을 잃어갔고, 결국 교회 전체가 온통 혼란의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어렵고 곤혹스러운 상황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성도들 중에 상당수는 사도 바울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주고 있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거짓 선지자들이 자신을 자랑하면서 자신들의 사도성을 주장했듯이, 동일하게 자신을 자랑해야 했습니다. 나도 그들 못지 않게 잘난 사람이다 라고 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자신을 자랑하는 사람이 눈에 잘 띄고 인정을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지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면 정말 바보처럼 취급받기가 쉬운 시대입니다. 바울은 꼭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고린도교회를 위해 사례를 거절하고, 지극히 낮은 자리에서 교회를 세우고 섬겼지만, 그 결과는 사도 바울에 대한 의심과 비난뿐이었습니다. 뭔가 역점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이런 상황을 가능할까요? 오늘 우리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과연 오늘 우리가 믿음을 지키기 위해 겸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교회에서조차도 말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닌 줄 알고, 목소리 한 번 높이면 그가 높은 사람인 것처럼 인정하고 높여주는 그런 모습은 아닙니까? 눈에 보이는 것이 없듯이 안하무인격으로 소리치고 밀어붙이고 자기 소리를 내는 사람은 뭔가 확신이 있고 자신이 있고 복음에 대한 확신이 있는양 인정받고, 리더십이 있는 것처럼 인정받고, 그렇지 않는 사람은 발끝의 때보다도 못한 것처럼 그렇게 느껴지지는 않습니까? 고린되는 지금 그런 상황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제 드디어 자랑을 시작했습니다. 나도 자랑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인 마음으로 팔을 걷어부치고 자랑시합을 한 번 해 보자고 나서고 있습니다.

바울은 22절부터 자랑을 시작합니다.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이것이 바울의 자랑의 시작입니다. 이 말들을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23절을 보면,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라고 말합니다. “내가 수고르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여기서 그의 자랑의 방향이 바꼈습니다. 그는 자신의 세상적인 자랑으로 시작했다가 이제는 주님을 위해 고난받은 자신의 모습을 자랑합니다. 24-27절까지는 그가 그동안 복음을 전하면서 겪었던 고난을 열거합니다.

그가 겪은 고난을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조금 엿볼 수 있지만, 사도행전에서 보여주는 바울의 고난은 거의 절반도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은 사도행전 19장 초반부까지의 상황이기 때문에 사도행전 28장까지, 그리고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그가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할 때까지 당한 그의 고난은 참으로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입니다.

24절부터 27절을 한 번 같이 보겠습니다. “24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24절에 사십에 하나 감한 매라는 것은 유대인들의 형벌입니다. 신명기 25:1-3에 보면 보통의 경우 사람과 사람이 시비가 생겨 악인과 의인이 가려지고, 악인에게 태형이 합당하면 그에게 사십 대까지 때리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율법 해설서인 미슈나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이 규정을 지키기 위해 한 대를 덜 해서 서른 아홉 대까지 때리도록 했습니다. 만에 하나 잘못 계산해서 한 대라도 더 때리고 그로 인해 이 사람이 죽게되면 죽인 자는 추방당하도록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이런 형벌을 다섯 번이나 맞은 것입니다.

또한 그는 태장으로 세 번 맞았습니다. 태장은 로마의 형벌이었습니다. 로마의 법에 의하면 로마의 시민권이 있는 사람은 그의 죄가 확정되기 전에는 절대로 때릴 수 없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시민권이 있는 바울은 세 번이나 로마의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 외에도 돌에 맞은 적도 있습니다. 바울이 첫 번째 전도여행을 하던 중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사람들이 바울을 돌로 쳐 죽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은 줄 알고 그를 성밖에 버려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그는 많은 전도여행 중에 수많은 어려움과 고통, 환란을 당했습니다.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했다(26절).”고 말합니다. 당시 로마가 세계를 통치할 때 다른 어느 시대보다 치안이 확보되었었지만, 지금과 비교하면 얼마나 열악했을지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많은 여행 중에 예기치 않은 사고와 위험, 고난과 환란에 노출되어야만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또한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27절).”고 말합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지금 이것은 자신의 자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것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사도로 인정할만한 증거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거짓 선지자들의 모함에 분노해서 시작한 자랑이었는데, 내가 그들보다 조금도 모자라지 않고, 아니 그들은 거짓 선지자들이고 내가 참된 사도임을 말하기 위해 시작한 말인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겪은 비참하고 힘들었던 고난을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12장에 가면 그는 “…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9-10).”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32-33절을 보면, 그의 또 하나의 초라한 모습입니다. 그것은 그가 다메섹에 예수 믿는 사람을 잡으러 갔다가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고 다메섹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이로 인해 유대인들이 분노해서 바울을 잡으려고 했었을 때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당시 다메섹의 왕 아레다의 군사들을 통해 추격당하고 있었고, 그는 이를 피하기 위해 비참하고 초라하게 광주리를 타고 성벽에 탈출하는 비참한 모습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마도 잠언 21:22을 기억할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용사의 성에 올라가서 그 성의 견고히 의뢰하는 것을 파하느니라.” 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사도 바울은 초라하고 비참하게 그 성을 탈출하는 모습을 여과없이 드러냅니다.

바울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는 지금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모습을 그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벌거벗은채 부끄러운 부분까지 여과없이 노출한 채 십자가에 여섯 시간이나 달리셨다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그가 겪을 수 있었던 가장 참혹하고 비참한 죽음을 당하신 주님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을 주님께 드리기로 작정하고 그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어떤 고난이 와도,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만 바라봅니다.

고린도교회의 거짓선지자들이 자기를 자랑하고 교회를 어지럽히는 안타까움 때문에 나도 한 번 나를 자랑해 보겠노라고 말했지만, 이내 다시 자신의 고난을, 자신의 초라함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바울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이 바울에서 참 교회, 참 성도의 모습을 봅니다. 고린도교회를 향한 그의 마음에 무엇이 있었을까요? 28-29절입니다.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그의 마음에 무엇이 있습니까? 그의 마음에 누가 들어가 있습니까? 우리는 바울의 마음에는 교회를 위해 염려하는 마음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를 위한 그의 염려는 다른 모든 고난과도 비교할 수 있는 아픔이었고, 고통이었습니다. 그는 무슨 고난을 받아도 교회가 바르게 서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을 택할 마음입니다. 교회가 바르게 세워질 수 있다면 그는 어떤 고통도 받을 수 있습니다.

바울이 생각할 때 교회가 바로 서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그의 마음에 약한 자들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약한 자가 세워지는 것을 그는 그리고 있습니다. 넘어진 자를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연약한 성도를 생각합니다. 목소리는 크지 않아도, 말을 잘 못해도, 사람들에게는 인정받지 못해도 그들을 마음에 품고 함께 약해지고, 함께 애타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이 목사인 저 자신에게 얼마나 부담이 되는지 모릅니다. 늘 말씀을 준비할 때마다 그 말씀이 목사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처럼 느껴질 때는 감당할 수 없는 마음을 갖습니다. 저는 제게 날아올 화살이 두려워서 그 말씀을 약화시키고, 물을 타고, 희석시키는 제 모습을 발견하곤 합니다. 목사의 설교가 강하면 교인들의 눈치를 보고, 목사의 설교가 약하면 하나님 눈치를 보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믿음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설교가 들리지 않고, 섬김이 그리 달갑지 않고, 그냥 적당히 그렇게 지나가고 싶은 마음이 우리 안에는 솔직히 있습니다. 뭐 그렇게 별나게 믿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우리는 별나게 믿자는 것이 아닌가 참되게 믿자는 것입니다. 특별하게 믿자는 것이 아니라 진실되게 믿자는 것입니다. 교인의 수를 증가시키는 의미에서의 부흥을 위해 힘쓰자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참된 교회로 설 수만 있다면 거짓 선지자의 말을 따르는 사람, 즉 적당히 믿고 적당히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다 떠난다고 해도 참된 교회, 진리 위에 서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 서는 수고가 없으면 우리는 진실한 교회, 진실한 복음의 능력을 맛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하나 하나 교회 안에서와 교회 밖에서의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의 참된 자녀들인가 말입니다. 진리 위에 서 있는 교회만이 참된 교회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설령 멋진 교회 간판을 걸어놨다고 해도 교회가 아니며 교회로 서 있을 가치도 없습니다. 참된 교회로 세워갑시다.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고, 약할 때 오히력 강함을 고백하는 바울의 고백은 오늘 우리 가운데, 교회가 서야 할 진정한 자리입니다. 참된 교회, 참된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세워지는 성도와 교회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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