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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는 우리가 왜 예수를 믿어야만 하는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로만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비슷해 보이는 길도 있고, 그것도 가능할 것 같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그러나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로만 가능합니다. 이것이 히브리서의 주제입니다.

예수를 믿는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유혹을 받을 때 이 말씀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다른 것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예수를 믿으면서 히브리인들이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성막(성전) 제사를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그것은 구원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가능한 것이고, 다른 길이 없음을 성경은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3개의 단락으로 그 내용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1-10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 드렸던 제사 제도와 관련된 성소와 지성소에 대해 말씀하면서, 성소와 지성소의 제사가 온전한 제사가 되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 말씀합니다. 11-14절에서는 성소와 지성소의 제사를 대치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에 대해 말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대제사장이 되셨고, 또 희생 제물이 되셔서 하늘에 있는 성소에서 하나님께 직접 드려지셨습니다. 마지막으로 15-22절에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희생 제물로 드려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는 바로 그분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구원받았을 때 나타나는 세 가지 증거를 보여줍니다.


첫 번째 구원의 증거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자기 죄를 발견하고, 고백하며, 그 길에서 돌아서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은 후 회개하게 될 때 그것은 우리가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해 주십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자신이 죄인인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를 믿고 난 후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보기 시작하고, 회개하게 됩니다.

1-10절 말씀은 성막을 중심으로 구약 시대의 제사 제도에 대해 말씀합니다. 구약 시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던 성막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졌습니다. 성소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먼저 나타나는 것을 흔히 성소라고 일컫습니다. 이곳에는 주로 제사장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본문에서 설명해 주듯이 이곳에는 등잔대가 있어서 항상 불이 켜져 있었고, 상이 있고, 그 위에는 진설병, 즉 거룩한 떡을 올려 놓았십니다. 이것은 매일 반복된 제사 의식이었습니다.

또 성소 앞에는 또 하나의 막이 처져 있었고, 그곳은 성소보다 훨씬 더 거룩한 곳으로 구별되어 있었습니다. 이곳을 지성소라고 말합니다. 이곳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고,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함부로 들어가면 그 자리에서 죽게 됩니다. 오직 대제사장만, 일년에 한 번, 대속죄일인 7월 10일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 때 대제사장은 자신의 죄와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는 피의 제사를 제단에 드렸습니다. 그 안에는 금 향로와 언약궤가 있었고, 언약궤 안에는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 그리고 언약의 두 돌판이 있었습니다. 그 위에는 속죄소가 있었고, 속죄소 위에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었는데, 그 위에 피를 뿌림으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지성소는 엄청난 두려움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속죄일이 되면 대제사장을 비롯해서 모든 제사장들과 백성들까지 자신을 정결하게 해야 했습니다. 자칫 부주의함으로 대제사장이 죽을 수 있었기 때문에, 대제사장의 옷 끝에는 방울을 달았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움직일 때마다 소리가 나게 했습니다. 밖에서 그 소리를 들을 때 대제사장에게 아무 일이 없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한동안 소리가 나지 않으면 대제사장은 필히 죽은 것이고, 이 때를 위해 대제사장의 허리에 매어 단 끈을 잡아당겨서 밖으로 끌어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말씀을 언급하는 이유를 8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고, 대제사장도 일년에 한 번만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들어가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소(지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성소(지성소)로 가는 길이 아직까지는 열려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는 누구도 맘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지성소로 들어갈 수 없다는 점이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마다 그들이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의 죄 때문입니다. 대속죄일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을 성결하게 해야 했습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곳이었고, 잘못하면 그 자리에서 죽음을 맛볼 수밖에 없는 곳이었습니다. 이 때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를 돌아보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 죄를 고백하면 죄의 용서를 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막 제사를 통해, 그리고 율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시는 것은 그들의 죄인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절과 10절을 보면, 이 성막 제사가 제사를 드리는 자의 양심을 온전하게 하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다만 “이 제사는 해마다 죄를 기억나게”(10:3)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을 온전하게 하지 못합니다. 다만 그들의 죄를 드러냅니다.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알게 합니다.

구약의 제사는 제사를 드리는 사람을 온전하게 하지 못하고 다만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먼저 경험하게 되는 것은 죄의 깨달음입니다. 자기 죄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결단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십자가의 구원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 앞에 두려움을 갖게 합니다. 우리의 악함을 고백하게 합니다.


그래서 구원론에 대해 말씀하는 로마서에서도 처음 세 장에서 인간의 죄에 대해 말씀합니다. 로마서 1장 18절 이하 몇 절을 제가 봉독해 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여기서 말씀하는 불의는 모든 사람 사람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서 바울은 다시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결국 모든 사람은 자기 죄를 발견하지 못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구약의 제사 제도와 율법은 우리 안에서 죄를 발견하게 하고, 그리스도께로 나올 수밖에 없도록 인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의 죄를 발견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죄의 고백이 없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필요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절망하지 않는 사람은 본질상 그리스도께로 나올 영적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죄의 고백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합니까? 지난 금요일 대학부 설교를 했습니다. 어제와 오늘 권오국 목사님께서 뉴저지 초대교회에 청년부 수련회를 인도하러 가시면서 저에게 대학부 설교를 부탁했습니다. 제가 본래 매 학기 첫 예배와 마지막 예배는 대학부 설교를 하기로 했기 때문에 지난 1월에 했어야 했는데, 바빠서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피하면 하나님께서 꼭 그만큼의 시간을 다른 곳에 쏟게 하십니다. 게으름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권 목사님께서 수련회를 인도하려 가니까 아무래도 수련회 준비를 해야 하기도 하겠지만, 그런 말을 하지 않고, ‘지난 번에 하지 않으셨으니까 한 번 해 주세요’ 라고 자꾸 부탁을 해서 피해갈 방법이 없어서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설교를 잘 못했습니다. 대학생들도 시쿤둥했습니다. 학생들에게 너무 미안했습니다. 하나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모처럼 담임목사가 대학부 학생들을 위해 설교했는데, 은혜로운 말씀을 전하지 못했으니 마음도 별로 안좋고, 힘도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끝내고 집으로 가면서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야! 주 목사. 너 왜 설교를 재탕하냐?’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전 수요일에 한 설교가 너무 좋아서 그냥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설교를 한 본문을 다시 하는 것 자체가 재탕은 아닙니다. 같은 본문을 할 수도 있고, 같은 원고를 가지고 설교할 수도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같은 회중들에게 같은 설교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재탕이라는 개념은 설교자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너무 좋았으니까 다시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쉽게 하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말씀을 듣는 영혼들의 얼굴과 갈급한 마음을 보지 못했습니다. 설교자의 편의를 따라 갔습니다. 나름대로 이유는 있었지만,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설교가 풀리지 않았습니다. 답답했습니다. 그렇게 설교하는 동안 제 안에 양심이 저에게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말씀을 전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회개했습니다. 앞으로는 절대로 재탕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나의 죄를 깨닫고 나니 제 마음이 얼마나 가벼웠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문제의 원인을 알았을 때 오는 기쁨은 죄로 인한 어두움과 고통을 이기고도 남았습니다. 이것이 은혜였습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은혜의 보좌, 이것은 흔히 시은좌라고 하는데, 이 시은좌가 바로 지성소에 있는 언약궤 위에 놓여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제사장이 죄를 가지고 들어가면 그 자리에서 죽었던 바로 그 자리를 말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자들에게 그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라고 권면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자기 죄를 고백하고, 죄의 용서를 받은 자에게 주시는 은총이며 담대함이고 기쁨이고 감사입니다. 이런 은혜를 누리게 하는 것이 바로 죄 고백의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죄를 고백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기도하라’(약5;16)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자기 죄를 고백하지 않으면 우리는 주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알지 못하면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고,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는 자는 성도가 아닙니다. 자기 죄를 고백하십시오. 죄를 고백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에 대한 반응이 따라 옵니다. 회개는 다시는 그 길로 가지 않겠다는 결단이 함께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는 자는 삶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사모하게 되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삶의 결단을 가지고 주님께로 나아가게 됩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고자 결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 구원의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길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11-14절은 구약 시대의 불완전한 성막 제사가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염소와 황소의 피로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희생 제물이 되셔서 그 피로 영원한 속죄의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드리신 곳은 땅에 있는 임시적인 지성소가 아니라, 하늘에 있는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이었습니다. 그분의 제사는 오직 한 번으로 충분했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온전한 제사가 아니었고, 그랬기 때문에 계속 반복되어야 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죄를 사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죄를 기억나게 하는 역할에서 그쳤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온전한 죄의 용서의 길을 찾게 되었는데, 바로 그 길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입니다. 이렇게 드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가 인간의 죄를 온전히 씻고, 인간의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을 집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구약 시대에 드렸던 성막의 제사는 나쁜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구약의 성막 제사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악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죄를 깨닫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성막 제사는 제 역할을 담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심으로 온전한 제사를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성막 제사를 드리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악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인간을 위해 열어놓으신 구원을 길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원형이 나타났기 때문에 모형은 사라져야 합니다. 모형이 원형처럼 계속 존재하면 본래의 원형이 부정되는 것입니다. 모형은 원형이 나타날 때까지만 그 목적을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도 바울은 율법을 철저히 부정합니다. 율법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역할에 있어서 그 한계를 분명히 그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발견합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어떤 길도 구원의 길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지난 해 부흥회에 오셨던 김성수 목사님께서 아주 좋은 예화를 들려주셨습니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서로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한 후 이 남자가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가장 사랑해. 세상에 그 어떤 누구보다 당신이 최고야.’ ‘그런데 당신 말고 두 번째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Miss 최야. 세 번째 사랑하는 사람은 Miss 김이야’ 이렇게 말한다면 되겠냐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의 관계는 유일합니다. 다른 것이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다른 것이 끼어드는 것을 성경은 모두 우상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히브리 성도들에게 과거로부터 철저히 돌아서라고 말합니다. 한 번쯤 과거를 그리워하면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구약 시대의 경건한 성막 제사는 그들에게 늘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해 주는 의식이었습니다. 그들은 대속죄일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시며 전능하신 분이신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구약의 제사는 나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희생 제물이 되셔서 우리의 죄를 사해주셨기 때문에 여전히 구약적인 제사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것이고,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성막 제사를 드리는 것은 악한 것입니다.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단 한 번도 안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철저히 주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히브리 성도들 사이에 어떤 빈틈도 용납될 수 없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 그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서로 사랑을 나누고 매일 매일 얼굴을 맞대고 살아갑니다. 지겹지도 않은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함께 살아갑니다. 1년도 아니고, 10년도 아니고, 20년도 아니고, 죽을 때까지 같이 살아갑니다. 1년에 한 두번쯤은 다른데 가서 자도 될만도 한데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단 하루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고 관계입니다. 지나가는 여자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돌아갔다면 거기까지는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발걸음을 옮겨서 따라간다면 이것은 문제가 심각한 것입니다. 그것은 단 한 번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물론 어쩌다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서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가 1년 52주 주일마다 예배를 드립니다. 주일에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주의 말씀을 배우고 성도들 간에 교제를 나누는 일체의 과정을 우리는 성수주일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52주 매주일 그렇게 나와야 되는 것입니까? 꼭 그렇게 예수를 믿어야만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주일에 예배를 드리면서 헌금을 합니다. 헌금의 목적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특별히 십일조 헌금은 우리가 자원해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드리는 것입니다. 말라기서에는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은 도둑질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달아보는 시금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자선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도님들이 드린 헌금에 의해 교회는 운영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으로 소위 운영되는 교회라면 그런 교회는 오늘 당장 없어져도 됩니다. 아니 그런 교회는 사라져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물질에 대한 질못된 사용으로 비난을 받고 한국 교회가 전체적으로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문제들 때문에 성경이 말씀하는 본질이 다시 한 번 더 왜곡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는 보통 십일조를 매달 드립니다. 한 번쯤 그 돈으로 불쌍한 사람을 돕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선한 마음에서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것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는 단지 교회의 운영을 위해서 자선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이신 하나님과의 우리의 관계를 드러내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단지 드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드림 안에 담겨진 우리의 믿음이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오직 그분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고백이 없으면 그는 구원 받은 자가 아닙니다. 성막 제사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지만, 이제는 중단되어야 하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주님을 향해 신실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면 그분은 또한 우리를 그렇게 지키십니다. 그런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세 번째 구원의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께 헌신하지 않는 성도는 구원 받은 성도라고 확증할 수 없습니다. 물론 아직 부족한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헌신의 이유도 없고, 헌신의 동기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엄밀하게 말해서 자신이 구원 받은 존재인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그렇게 헌신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15절 이하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약의 중보자가 되셨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언약이라는 말이 계속 8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한 번 세어보십시오. 성도님들은 4번밖에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나머지 4번은 유언이라는 단어로 나옵니다. 헬라어로는 “디아데케”()라는 동일한 단어로 나와 있습니다. 즉 언약과 유언은 갖는 단어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여기서 말씀하는 언약은 죽은 자가 남겨놓고 간 유언과 같아서 상대방의 의사와 상관없이 맺은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이 언약은 무조건 효력을 갖습니다. 이 언약은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은 구원의 언약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이 언약의 또 다른 개념을 말씀합니다.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만 효력을 갖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이 언약, 구원의 언약을 맺으시면서 당신이 죽음을 겪으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값진 희생, 희생 제물로 자신을 드리신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셔서 감당하신, 정말 헤아릴 수 없는 은혜입니다. 값을 수 없는 은혜, 바다보다 더 넓고, 하늘보다 더 높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구원의 은혜는 조건 없이 주신 것입니다.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우리에게 이 은혜에 합당한 삶을, 이 은혜에 합당한 반응을 보일 것을 끊임없이 촉구합니다. 그래서 구원에 대해 말씀하는 로마서 12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은혜에 대한 합당한 반응은 헌신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강제적인 것도 아니며, 안하면 안되는 것도 아닙니다. 마치 자녀가 부모에게 효를 행하는 것은 법이 요구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부모에게 어떤 모양으로든지 효를 행하지 않으면서 부모의 은혜를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친히 죽으심으로, 당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심으로 사랑하셨고, 생명을 주셨고, 사망에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그 은혜를 안다고 하면서 어떻게 그 은혜에 반응하지 않겠습니까? 그 은혜를 아는 사람이 어떻게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마땅히 헌신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의 은혜가 조건 없이,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고 주어지는 것처럼, 주님의 은혜에 헌신으로 응답하는 것도 아무 거리낌 없이, 감사와 기쁨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조금의 부담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헌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부모님께 드리는 감사의 인사가 인색함이 있어서는 안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은 구원을 받았습니까? 자신의 죄를 발견하셨습니까? 오늘도 자기 죄를 고백하면 회개함으로 하나님 앞에 새롭게 나갑니까? 매일 새로워지며 사십니까? 죄를 고백함으로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감으로 그 기쁨을 누려 보십시오.

또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길임을 인정하십니까?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는 것은 선택이 아닙니다.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께 자선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 성수도 그렇고, 헌금을 해도 그렇습니다. 한 번 결혼을 하면 검은 머리가 팥뿌리가 되도록 오직 한 여자만 바라보고 사는 것이 마땅한 것처럼 우리의 믿음도 그러해야 합니다. 한 남자가 한 여자만을 사랑하고 한 평생을 사는 것이 아름답고 기쁜 일인 것처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섬기는 것이 가장 행복한 구원의 삶입니다.

또한 주님께 헌신한 삶을 살아가십니까? 믿음의 구원은 우리를 당연히 헌신의 삶으로 인도합니다. 헌신이 없는 것은 자신의 구원을 다시 한 번 점검하셔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헌신은 억지로나 인색함으로가 아니라, 한없는 자유와 기쁨으로 드리는 자원적인 반응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은혜가 너무도 크고 감사해서 나도 그렇게 기쁨으로 기꺼이 헌신하는 것은 구원 받은 자의 당연한 삶입니다. 이런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넘쳐서 구원의 능력을 지니고 살아가는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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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6 2018-10-14 주병열 목사 구원 받은 자는 어떻게 사는가? (How Do Saved People Live?) file 빌립보서 (Philippians) 2:12-18
735 구원에 이르는 지혜 (딤후 3:13-17) 2011. 2. 13 주일예배
734 2022-07-17 문성환 선교사 구원은 공짜지만,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녹화 방송) 신명기 1:32-39, 34:4-7
733 2016-03-13 주병열 목사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How is Salvation Completed?) file 요한복음 (John) 3:13-21
732 2018-09-16 주병열 목사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1) (How Are We Saved?) 에베소서 (Ephesians) 1:3-6
731 2018-09-23 주병열 목사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2) (How Are We Saved? (2)) 에베소서 (Ephesians) 1:7-12
» 구원의 증거(히9:1-22) 2011. 2. 27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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